최초의 성녀들

5화. 발데마인에서 (2)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덜컹.

“...”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겨있다. 리엔시에는 멀뚱히 열리지 않는 문의 손잡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협소한 공간에 펼쳐진 풍경을 응시했다. 사람 손이 탄 청소 도구들과 온갖 잡동사니들이 너저분하게 쌓여있는 곳. 1층 구석진 곳에 있는 비품실이었다. 리엔시에는 10분 전 상황을 떠올렸다.

‘영애. 1층 비품실 좀 청소해주시겠어요?’

‘...네?’

‘교수님께서 영애한테서 압수한 성녀님 관련 서적들이 거기에 있잖아요. 다 같이 사용하는 공간인데, 유레이토 영애의 물건만 잔뜩 있으니 다들 불편해해서요.’

‘...알겠어요.’

어처구니없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리엔시에는 묵묵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 김에 돌려받지 못했던 잡지와 고서적들을 다시 가져오면 되겠다.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괴롭히고 싶은 아이들이 비품실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가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싫다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존심이 상해서라…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덫에 걸려들었다. 타 죽을 걸 알고도 불에 뛰어든 불나방이었다.

비품실 위쪽에 작게 난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정오가 조금 지난, 나른한 점심시간.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나중에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 자신이 없어진 걸 교수님이 알아채기 전까지는 비품실에 꼼짝없이 갇혀있어야 했다. 리엔시에는 상자 앞쪽에 비스듬히 기대어진 대걸레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성녀님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원래 긴 점심시간 동안 신전에 들러서 세라엘의 얼굴을 엿보고 오곤 했는데. 여기에 갇혀선 이번 점심시간에 가는 것은 역시 무리겠지. 아쉽다. 오늘은 정규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난 후 가야 할 것 같았다. 원래 보던 시간에 성녀님을 보지 못하게 되어서 슬펐다.

지금 성녀님은 무얼 하고 있을까. 식사는 끝내셨으려나? 아니면 벌써 정오 기도를 올리고 있으실까. 그것도 아니면...

‘나를 생각하고 계셨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바랐다. 어린 날 우연히 마주쳤던 어린 성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의 성녀를 떠올렸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키가 조금 자란 것 빼고는. 세라엘은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성장했다.

여전히 물이 빠진 듯 희멀건 색채를 가진 소녀였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빛내는 이였다. 리엔시에는 다리가 아파 뒤에 쌓인 상자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자 살짝 열린 상자 안의 물건들이 묵직하게 등을 받쳐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 안의 물건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신전 성녀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

홧김에 상자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표지가 세월을 탄 흔적이 많이 보이는 낡은 서적이었다. 최초의 성녀부터 서른 번째 성녀까지의 연대기와 성녀라는 존재의 유래에 대해서 쓰여 있는 책. 책 표지를 엄지로 천천히 쓰다듬었다.

“최초의 성녀라...”

최초의 성녀는 죄를 지은 자였다. 성전에서 공을 세운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녀는 전쟁 살인을 저질렀다. 살육으로써 모든 이들을 적들의 마수에서 구해냈다. 하나 죄업으로써 뭇사람들을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제가 구해낸 바로 그 질투에 눈먼 자들에 의해 처형당했다. 

얼마 있지 않아 신전은 두 번째 성녀를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소녀들이 시간에 스러져갔다. 네 번째 성녀, 라쉬나부터는 모두 젊은 나이에 일찍 생을 마감했다. 사고사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살해당해 죽은 성녀들이 많았다. 이유도, 범인도 알 수 없었다. 모두가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하기 힘들어하지만, 리엔시에만은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젠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성녀들이 죽는 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늘로 올라가는 거래.’

‘...그래?’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성녀잖아. 누군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어.’

‘그럼, 너도 곧 죽을 거라는 뜻이야?’

‘...몰라. 사람이니까 언젠간 죽기야 하겠지.’

‘그 뜻이 아닌데...’

‘너 내가 죽었으면 좋겠니?’

‘아니.’

“...후후.”

그때도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 어린 날에도. 리엔시에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빛이 쏟아지는 비품실 내부를 찬찬히 돌아보았다. 구름이 흘러가면서 빛을 만들었다 가렸다 했다. 그것도 여러 번. 시간이 좀 지났을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누군가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을까. 아마도...

벌컥!

“리엔시에!”

“...!”

갑작스레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쏟아지듯 풍성한 적금발을 가진 붉은 빛 눈동자의 소녀. 코니엘이 열린 문 너머로 자신을 씩씩대며 바라보고 있었다.

“...코니엘.”

“드디어 찾았네요. 여기 있었어요?”

너무 놀라 이름으로 불러버렸지만 리엔시에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다. 코니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른 리엔시에에게 생긋 웃어 보이고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빨리 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당연히, 저희 고전마법학부의 학생들이죠. 누구겠어요. 이미 수업이 시작되었답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는 그녀가 조금은... 고마웠다.

리엔시에는 내민 손을 보다 천천히 코니엘의 따듯한 오른손을 양손으로 마주 잡았다. 조심스럽게 대하는 그 태도에 코니엘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부서질 듯 대하지 않아도 되어요.”

“...네. 어서 가요.”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리엔시에가 오해를 갖기에 충분하고도 넘치는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코니엘의 적갈색 눈동자를 보니 레니발렌이 떠올랐다. 유레이토 공작 가는 역시 예로부터 황가와 이어진 가문이 맞았다. 붉은빛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그리고 리엔시에는 그녀처럼 제게 자꾸만 다가오는 소녀 한 명을 더 알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영애. 그녀는 세라엘보다 더 옅고 밝은 에메랄드빛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다.

‘성녀님, 저한테도... 드디어 친구들이 생긴 걸까요.’

코니엘을 따라 강의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번 점심시간에는 성녀님을 보지 못했지만, 왜인지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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