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발데마인에서 (3)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코니엘. 리엔시에를 데리고 왔습니까?”
“네, 교수님.”
“얼른 자리에 앉도록.”
아이들의 시선이 저희에게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황손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리엔시에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제 자리로 가 앉았다. 지금은 종교 역사 수업 시간이었다. 칠판에는 로나르힘 신전의 역사에 대한 것이 간략하게 하얀 분필로 적혀 있었다. 물론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리엔시에는 성녀에 관한 것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최초의 성녀에 대해서 다들 들어 본 적이 있겠지?”
“네.”
학생들이 입을 모아 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교수가 말을 이었다.
“그래. 최초의 성녀, 시에레인은 성녀의 위대한 권능인 빛의 마법을 이용해 성전에서 많은 이들을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그만큼 적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지.”
“사람을 죽였다는 말인가요?”
“전쟁은 원래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다. 시에레인은 우리의 적들에게 살육자나 다름없는 존재였지.”
우리의 적. 리엔시에는 그 적이 이종족들, 특히나 흡혈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라흐벤시아는 예로부터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파르바니에의 모태가 되는 성도(聖都) 뤼바니언이 무너진 이유도 그것이다.
─뤼바니언은 흡혈귀 혼혈이 세운 도시였다. 중앙 대륙의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것을 배척해왔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들과 피를 섞으며 살아왔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레인님은 처형당하셨다고 들었어요.”
“그게 마녀사냥의 시작이라던데.”
“영웅이나 다름없는 분인데 어째서 처형당하신 거죠?”
“호사가들은 그녀가 전쟁 후 얻게 될 부와 명예를 질투해 성녀를 마녀로 몰아가 처형대로 올려보냈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아까 솔튼이 말했다시피 시에레인님의 죽음이 그 옛날 행해졌던 마녀사냥의 시작이었다는 게 널리 알려진 지금의 역사이지.”
시에레인은 비공개로 처형당했다. 신전 측은 성녀 시에레인의 죽음을 공표했다. 그래, 시에레인은 죽은 것이 맞았다. 그러나 시에레인은, 역대 성녀 중 유일하게 죽음이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은 성녀이기도 했다.
“네 번째 성녀 라쉬나님부터는 사고사당하시거나 병사로 일찍이 생을 마감하는 분이 생기기 시작했지. 일곱 번째 성녀 다일렛부터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기 시작했고.”
“누가, 왜 성녀를 죽인 건가요?”
“성녀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신의 곁으로 돌아가는 거란다. 그게 로나르힘 교리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신의 대리인이 대신 성녀를 신께 돌려보내는 것이라 하더구나.”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거라니. 그냥 모르는 사람한테 개죽음을 당한 게 아니고? 리엔시에는 그것이 신의 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체 어떤 신이 어린 소녀를 희생시켜 사람들의 죄를 사해 준다는 말인가? 설령 그런 신이 존재한다 해도, 그는 악신임에 분명했다.
흘끗 옆을 보니 베레니체가 인상을 찌푸린 채 교수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입 모양이 그 한마디를 만들어 냈다. 말이 되지 않았다. 리엔시에는 자신의 가문이 가진 비화를 알고 있었다. 본래 유레이토 공작 가문이 바로 성녀를 배출해오던 가문이었다. 라헤니오는 저희 가문에서 성녀를 보내기를 거부해 희생된 평범한 귀족 가문이었을 뿐이었다. 사실, 세라엘과 리엔시에의 운명은 어쩌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번 대의 성녀님도 곧 돌아가시는 건가요?”
“...”
누군가 그런 말을 꺼냈다. 세라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리엔시에는 퍼뜩 고개를 들어 교수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의 입에서 쏟아질 말을 기다렸다. 교수는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죄를 짓는 한, 성녀의 자리는 계속해서 바뀔 수밖에 없겠지.”
“......”
강의실 내부에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성녀로서 신전에 보내진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간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면서도 저희를 구원하러 신전에 발을 들이는 성녀에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고, 열광했다. 그것은 성녀의 태생이 비천하든 말든 상관없는 현상이었다.
억지로 신전에 팔려 온 성녀의 의지 따위는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어서 사함을 받기를 원했다. 리엔시에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추락한 성녀 세라엘에 대해 떠올렸다. 세라엘의 대에 이르러서는 신전의 사람들도 자꾸 죽어가는 성녀의 존재에 대해 신물이 났는지, 그녀를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것 같았다.
리엔시에는 성녀의 초라한 흰색 원피스와 낡아빠진 방구석에 대해 떠올렸다. 고귀하신 성녀가 자리하시기에 알맞지 않은 의복이었고 장소였다. 누군가 그런 세라엘에 대해 추락한 성녀라는 별명을 붙였고, 이제 그것은 그녀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번 대의 성녀님은 죽지 않을 거예요.”
고요한 교실 내에 퍼진 그 한마디가, 술렁임을 파도처럼 일으키며 시선을 모았다. 리엔시에였다. 리엔시에는 자신에게로 쏠린 시선을 느끼며 화사하게 웃었다.
“세라엘님은 죽지 않을 거예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누군가 물었다. 리엔시에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는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두지 않아.”
최초의 성녀가 선언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성녀가 교체의 섭리를 배반했다. 구름이 드리워져 햇빛을 가렸다. 삽시간에 시위가 어두워졌다. 그 가운데 빛나는 것은 리엔시에의 분홍빛 눈동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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