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03)

*

 

무정한 어린 왕이 햇빛을 등지고 걸어왔다. 터벅터벅. 그 걸음에 신하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태송의 8대 왕, 이 한李 瀚. 동궁에서 옥좌에 앉은 후로도 선왕의 눈치를 살피고 대비의 대리청정을 받든 지 여러 해. 금상께서는 오늘에서야 온전히 용상에 앉게 되었다. 신하들은 동궁 시절부터 보아온 그 성정을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옥좌에 앉은 그는 하품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째, 그대들은 내가 이 자리에 앉은 게 불만인가?”

“당치 않은 말씀이시옵니다. 소신들이 어찌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래? 한데 왜 내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않지?”

따사롭게 대전에 스미던 빛은 이제 구름에 가려진 것인지 어둑해졌다. 용안을 살피던 이들이 뺨이라도 맞은 듯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임금은 그 무엇도 하지 않았으나 이래야만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일 터다.

“전하. 옥좌에 앉으심을 감축드리옵니다. 천세를 누리소서.”

“천세를 누리소서.”

대비의 상 기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의적절한 말은 아니었으나, 먼저 그 말을 꺼낸 것이 바로 좌의찬左議贊이기에 대소신료들은 눈치를 살피며 그의 말을 따라 했다. 한은 비로소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어떤 창고 같은 방, 거의 천장에 닿을 듯 붙은 창문에 가느다란 햇볕이 들었다. 그마저도 직접 들어오는 빛은 아니었다. 어딘가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 같았다. 뿌연 먼지가 빛에 반짝거리며 이 답답한 공간을 부유했다. 방에는 하얀 천이 덮인 상자와 정체 모를 것들이 여럿 있었다.

드르륵― 낮은 기계음이 울리더니 천장 한구석이 열리며 계단이 생겼다. 잠시 후 복면을 쓴 사내가 위에서 걸어 내려왔다.

“큭.”

코에서 폐부로 스미는 퀴퀴한 공기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천들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여러 크고 묵직해 보이는 상자들, 꽤 견고해 보이는 검과 활 등의 여러 무기였다. 그리고 그것들에는 하나같이 태양을 닮은 듯한 꽃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꽃문양이 새겨진 검들은 지나치고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 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검정 가죽에 청색 불꽃이 새겨져 있는 수려한 검집은 복면의 사내가 평소 들고 다니지 않을 것 같았으나 그의 눈매와 퍽 잘 어울리기는 했다. 그는 검을 빼 들었다. 손잡이에서 머지않은 예리한 날에 새겨진 ‘炎(염)’ 자를 사내는 손으로 담담히 쓸었다. 차가운 검의 감촉을 느낀 그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으나 어쩐지 서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지성이 화방에서 지낸 지 벌써 석 달이 흘렀다. 한 달에 이레 정도 본가에 있었으나 아무래도 오가는 거리가 꽤 되다 보니 주로 머무는 곳은 화방이었다.

“윤 도령, 차 마실 텐가?”

류는 대궐 같은 집을 놔두고 제집 시설에 한참 못 미치는 화방에 눌러앉았다. 방을 따로 쓰니 딱히 불편할 것도 없기는 하나 지성으로서는 유복한 집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이 왜 굳이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지내려는 것인지 의문이기도 하고 또 그것이 어쩐지 불만스러워 입을 샐쭉거렸다.

“곱게 자라긴 자네도 마찬가지면서.”

“저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집안 분이시니 그렇지요. 선배님은 영상 대감댁 차남이시니까요.”

류가 눈썹을 씰룩거렸다. 같이 지내며 그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이 나라 영의찬領議贊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류가 제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의 고지식함이나 엄격함이겠지만. 비꼬는 화법이 입에 붙은 지성이었으나 이번에는 아차 하여 제 입을 톡 쳤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이런 말 하는 것 싫어하시는 것을 잘 알면서…….”

“아니오. 사실인데 뭐.”

류가 조용히 찻잔에 차를 따랐다.

“여기가 재밌어서 그래.”

“예?”

“그곳에 있으면 자네도 숨이 막힐걸? 내가 왕세자래도 그렇게는 안 살 거야. 내가 차남이니까 그나마 이렇게 나오는 거지, 우리 형님은!”

류는 장남인 제 형님과 고지식하고 갑갑한 집안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몸서리를 쳤다.

“그렇게 싫으십니까?”

“응. 싫네. 난, 이 화방이 좋아. 자네도 좋고.”

그의 말에 지성이 차를 뿜었다. 석 달 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게는 이런 낯간지러운 말에는 면역이 없었다. 그가 한숨을 쉬며 제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류에게 건넸다. 류가 웃으며 제 얼굴을 닦아냈다.

“그런 말 좀 안 하시면 아니 됩니까?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더는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류 선배님.”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소?”

“전혀요!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익숙해질 일도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도 나한테는 익숙해진 것 같은데? 처음 만나서 차를 뿜었을 땐 안절부절못하더니.”

제가 언제요, 하며 그가 다시 차를 홀짝였다.

“참, 스승님께서 여름이 되기 전에 돌아온다고 전해달라셨네.”

“그렇습니까? 가을까지 느긋하게 계시다 오실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말은 퉁명스럽게 하였으나 지성의 눈이 밤하늘 은하수처럼 빛나는 것을 본 류가 씩 웃었다.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띤 그에게 류가 물었다.

“그렇게 좋은가?”

“많이 티 납니까?”

답지 않게 헤실거리는 지성의 모습이 꼭 강아지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돌연 지성이 벌떡 일어났다.

“선배님, 같이 나가시죠.”

“어딜 말인가?”

“저자 구경을 가잔 말입니다. 곧 설이라 며칠 동안 장이 크게 열리니 같이 바람이나 쐬고 오시죠.”

뜻밖의 제안에 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성은 항상 바빴다. 화방에 손님이 없으면 어디선가 필사 일을 맡아왔고, 정히 화방에 일감이 없는 날이라도 지성은 방에 박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하였다. 또 어떤 날에는 류를 내버려 두곤 오래도록 나갔다가 밤늦어서야 돌아왔기에, 두 사람이 나들이를 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더랬다. 두 사람이 세 달간 같이 한 것은 그저 공적인 일들뿐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 친해진 것도 전부 류가 옆에서 귀찮게 군 덕분이리라. 한데 지성이 먼저 나가자고 말하다니! 스승님 계신 방향으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령, 난 지금 정말 감동했다네.”

류가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자 지성이 피식 웃고는 방에 들어가 간단히 채비하고 나왔다. 제 방에 들어간 류가 나오질 않자 기다리던 지성이 그의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선배님, 아직입니까?”

“거의 다 됐으니 좀만 더 기다리게!”

뭘 하길래 저리 오래 걸린담? 지성이 투덜거리며 마루에 털썩 앉았다. 잠시 후 드르륵 문이 열리고 류가 나오자 지성이 그를 올려다보다 입을 떡 벌렸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것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귀공자가 따로 없었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건만 옥색의 두루마기에 가득 수 놓인 분홍빛 벚꽃이 화사했다.

“왜, 내가 그리 멋있는가?”

“아니 무슨, 고작 저랑 저잣거리에 가면서 이리 꾸미신 겁니까?”

“무릇 선비란 언제 어디서나 바른 몸가짐을 해야 하는 것! 그리고 고작이라니? 내 소중한 지기가 저자에 가자는데 어찌 대충 차려입겠소?”

류가 해사하게 웃자 어쩐지 옷보단 그의 얼굴이 더 환해 보이는 듯했다. 지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입가엔 기분 좋게 미소를 띠고는 마루에서 일어났다.

화방 거리를 벗어나 저잣거리에 들어서자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곳곳에 맛있는 음식 냄새, 달큼한 과자 냄새가 풍기고 한쪽에는 다가오는 설을 맞이하여 글씨를 써주거나 그림을 그려주는 가판대, 또 다른 쪽에는 풍등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곧 명절이다 보니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저 앞 옷집 앞마당에서 청담이 이야기 극을 한다던데?”

“청담이라고? 그 이야기꾼이 왔다고?”

“어서 가세! 늦게 가면 그 머리털 끝 하나도 못 볼 걸세!”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더니 우르르 몰려왔다. 지성과 걷던 류가 별안간 나타난 사람들에 가로막혀 제 후배를 놓치자 그가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윤 도령?”

구름같이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 하고 허둥대는 지성을 발견한 류가 크게 소리쳤다.

“거기 윤 도령! 괜찮은가?”

“윤 도령이라고?”

류의 목소리에 바닷길이 열리는 듯이 사람들이 길을 틔워주고는 류와 지성을 바라보았다. 이야기 극을 보러 가던 사람들마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보며 웅성거리자 지성이 류에게 다가가 말했다.

“선배님이 너무 크게 소리쳐서 다들 쳐다보잖습니까!”

“아니, 그건 딱히 내 탓만은 아닌데?”

“그럼 저 때문입니까?”

“아주 아니라고는 못 하지.”

그의 말에 지성이 저를 둘러싼 이들을 보았다. 태반이 여자들에, 그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미 이 거리의 유명인사였기 때문인지라.

저자의 사람들에게서 지성은 여러 별명으로 통하고 있었다. 첫째는 그의 용모가 아름다운 꽃과 같아 얼어붙은 송하松河를 녹이는 듯, 아직 피지 못한 꽃에 따스함을 불어넣는 듯 봄바람 같다 하여 춘풍 春風 도령이요, 둘째는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학學 도령이요, 셋째는 그가 자주 입는 옷 색이나 그의 자태가 두루미와 같아 두루미 도령이다. 이리 많은 별명을 두루두루 섭렵하니 사람들 입에 ‘화방의 윤 도령’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가 이리 저잣거리의 인기인이 된 것은 필시 석 달 전, 기방 홍화정紅花庭에서 있었던 일도 한몫했을 터다.

“저기 저 잘생긴 선비님이 바로 그 윤 도령인가 본데?”

“그럼 그 앞에 저 선비님은 누구신가?”

“세상에, 류 공자님이잖아!”

류 공자라는 말에 또 한 차례 술렁인다. 그들의 반응에 류가 어깨를 으쓱하며 기분이 꽤 유쾌한 듯 웃었으나, 이 거리에서 지성만이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제 생김새는 물론이거니와, 류를 매일같이 보아왔고 딱히 그의 얼굴 생김새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던 터라 류가 얼마나 미인으로 통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원체 이런 쪽에는 둔한 탓도 있었다.

류는, 뭇사람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단정하고 짙은 눈썹에 나른한 눈매, 늘 고운 호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이 매력적인 사내였다. 한성에 제일 미남을 고르라면 다들 입을 모아 류를 꼽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미인 반열에 오른 지성이 류와 한자리에 있으니, 사람들의 눈이 호강이었다. 그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람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도대체 왜들 저런답니까?”

“왜들 저러냐니, 한성에서 그 이유를 모르는 이는 자네 하나뿐일 걸세.”

“그나저나, 사람들은 다들 어딜 가던 중이었을까요?”

“듣자 하니 이야기꾼이 왔다던데? 청담이라고.”

“청담이요? 그 유명한 청담 말입니까?”

제 외모를 칭송하는 것도 모를 정도로 둔하던 지성이 눈을 빛내자 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류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우리도 보러 가요!”

“청담이 그리 유명한가?”

“당연하죠! 선배님 정말 모르십니까? 얼굴 없는 이야기꾼 말입니다. 늘 금빛 탈을 쓰고 이야기를 하는 사내인데, 그의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임금님도 그를 탐낸답니다. 한데 어찌나 신출귀몰한 지 찾을 수도 없고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그저 그가 예고한 때, 예고한 장소에서만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지요.”

지성이 아이처럼 들떠 말하자 류가 잠깐 미간을 찡그렸다.

“저도 언젠가 몇 번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날은 이야기를 곱씹느라 밤을 지새웠다니까요! 선배님은 뭐든 알고 계시는 줄 알았더니 의외네요.”

그의 마지막 말에 섞인 칭찬에 류가 우쭐하여 어깨를 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류의 팔을 잡아끌었다. 멍하니 두 미인을 바라보던 이들이 두 사람을 따라 우르르 몰려오자 지성이 류에게 말했다.

“청담이 인기가 많긴 하네요.”

“눈치 없는 사람 같으니. 저들이 누굴 보고 있는지 한 번 보게.”

그 말에 지성이 뒤를 돌아보자 저를 따라오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화살처럼 날아와 그에게 꽂혔다. 그가 당황하여 앞을 보고는 류의 팔을 붙들고 속삭였다.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그게 아니라 그대가 워낙에 미인이라 그런 것 아니오!”

“제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저 뒤에 있는 이들의 눈을 보십시오. 남주에 있을 적에는 저렇게 집요하고 맹렬한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류는 그의 확신에 찬 말투에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저 슬며시 웃었다.

청담이 온다는 그곳은 두 사람이 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말로 의복을 파는 가게의 마당은 아니고, 한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십자로 난 큰길의 가운데 땅인데, 그 근처에 제일 큰 가게가 의복 집인지라 사람들은 옷집 앞마당이라 부르곤 했다. 말하자면 약속의 장소였다. 두 사람이 도착하니 이미 옷집 앞마당은 청담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한 와중에 누군가 외쳤다.

“청담이다!”

사내가 어딘가 가리키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옷집 기와 담장 위, 금빛의 탈을 쓴 자. 청담이었다. 그는 키가 컸고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가려져 있으나 어쩐지 범접할 수 없는 귀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청담이 높은 담장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거기, 비켜주시겠소? 그 자리가 마음에 드는군.”

그의 손짓을 따라가다 보니 그 끝엔 지성이라. 그가 어리둥절하여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 선 이들이 물러서 둥글게 자리를 만들자 그와 류도 뒤로 조금 물러섰다. 청담이 가볍게 날아 마련된 자리로 내려앉으니 그 모습이 나비와 같아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저 탈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

“얼굴이 너무 추해서 가린 것 아냐?”

“글쎄. 어쩌면 엄청난 미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윤 도령처럼?”

옆에 있던 이들의 말에 청담이 지성에게 다가왔다. 탈 속의 눈동자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 지성이 흠칫 몸을 떨자 청담이 몸을 돌려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터이니 모두들 앉으시오.”

그의 목소리가 마당에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류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깔고는 멍하니 청담을 보고 있는 지성을 앉혔다.

“왜 그러시오, 윤 도령?”

“아, 아닙니다.”

고개를 갸웃하던 지성이 류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으나 그는 지성의 반응이 퍽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류가 계속 지성의 옆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여전히 웅성거리자 청담은 손가락을 들어 제 입술 위로 가져다 댔다.

“쉬이―.”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이들의 소리가 사라지고 그 넓은 마당이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고맙소.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지. 오늘 여러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청담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와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 큰 파도를 일으켜 청중들을 집어삼켰다. 그가 이끄는 말(語)이 달리는 수레는 느리고 빠르게 달려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너른 평야로도, 복사꽃이 만발하는 무릉도원으로도 데려다주었다. 사람들은 청담의 들숨과 날숨 하나에도 집중하여, 그가 잠시 숨을 고를 땐 그들도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집중하는 와중에도 지성의 표정은 여전히 묘했다. 여덟 팔八자를 그리는 그의 미간은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의식적으로 펴질 뿐이었다.

“어디 불편하오?”

류의 속삭임에 지성은 고개를 젓고는 미소 지어 보였다. 이야기가 끝나고 청담은 가볍게 의복 집 담 위로 올라섰다.

“거기 용모 빼어난 도령께선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눈치인데?”

청담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에게 와 닿자, 지성이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닙니다. 청담 선생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 집중하느라 선생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지성의 말에 청담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뭐, 결례까지야― 하고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바람처럼 청담이 떠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생각에 잠긴 듯한 지성의 모습에 류는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말해보시오.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소?”

“예전 청담과 오늘 본 청담이 다른 사람 같아서요.”

“다르다고? 어떻게?”

그리 물었지만, 이야기 내내 지성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그로서는 전에 청담의 이야기를 들었었더라도 알아채지 못했으리라.

“그게, 말투나 이야기하는 투는 비슷한데, 몸태라든지 음성이 조금 다른 것 같은……, 하긴 꽤 오래전 일이니 그저 제 착각이겠지요.”

류는 모호한 지성의 말에 더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씁쓸하고 멋쩍은 듯 웃는 그의 눈에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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