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17화

돌아온 성녀 03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돌아온 성녀 03


루블, 보쓰, 히즈

***

“헬레니온 님은 아우레티카의 귀족이십니다.”


전혀 상상도 못해본 사실에 아마데아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가까스로 이를 악물어 참아냈지만 표정 관리까지 해내지는 못했다.


“어······ 어떻게? 아녹스의 스파이가 귀족 사이에······. 그런 건······.”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혼란이 여실히 묻어져 나왔다. 그레이스는 주변을 흘긋 둘러보았다. 모두 계약으로 묶인 인물들 뿐이다. 헬레니온 님께서 어련히 잘 배치하신 모양이다.


“엘레우시스 가문에 관해서 알고 계신지요.”


아마데아는 앞으로 고꾸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상체를 들어 올렸다.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가문은······ 왠지 귀에 익은 듯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실 만도 합니다.”


그레이스는 부연 설명은 더 하지 않았다. 어느덧 짐마차가 멈췄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뒷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이단 심판관이었다.


“저희 상단은 숲에서 채집한 것을 가공하거나 그대로 파는 일을 합니다. 이쪽은 일꾼들입죠.”


중년 정도의 나이인 상단주로 보이는 남자는 자신보다 스무살은 어려 보이는 청년에게 굽실거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아마데아는 눈치껏 그레이스를 따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짐마차 안은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이단 심판관은 대충 휘휘 둘러보고 가는가 했더니 기어이 마차에 올라탔다.


“이런 노인도 일을 시키는 건가?”


“예, 예. 직접 힘을 쓰진 않더라도 늙은이의 지혜가 필요한 일이 있습죠. 약초를 구별해내거나 위험한 곳을 살피는 일을 합니다.”


가까이 다가와 그레이스를 빤히 들여다보는 이단 심판관의 눈에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아마데아는 최대한 숨죽이며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을 조용히 로브에 문질러 닦았다. 바로 그 순간.


“!”


“이쪽은 일꾼이 아닌 듯하군.”


아마데아의 손이 이단 심판관의 손에 끌어당겨졌다. 굳은 살 하나 없는 손은 일꾼이라고 주장하기엔 너무도 깨끗했다. 아마데아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 다 끝난 걸까. 이대로 들켜서 그대로 처형당하는 건가. 나와 여기 사람 모두······.


“제 손녀입니다, 나으리. 저희 일손이 부족하여 처음이지만 어린 손을 보태고자······.”


그레이스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비굴하게 말했다. 그 말에 상단주가 정신을 차린 듯 옆에서 거들기 시작했다.


“예, 나리. 저희가 사람이 적어서, 이런 인력이라도 충원하였습니다. 신원도 확실합니다!”


상단주가 내밀은 신분증엔 상단 전원의 신원이 적혀있었다. 요는 어디 마을에서 언제 태어났는지, 결혼 여부 등등이 적힌 종이였다. 상단주는 신분증과 함께 가죽 꾸러미를 건넸다.


“저희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놈들입니다. 여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성실하게 성금도 하고 있습죠.”


이단심판관은 건네진 꾸러미의 묵직함을 가늠하더니 이내 아마데아의 손을 놓아주었다. 덕분에 다리에 힘이 풀린 아마데아는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대의 신실함을 보아하니 엄한 짓을 할 이로는 안 보이는군.”


상단주는 과도하게 굽실거리며 이단 심판관을 짐마차 밖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일꾼 하나하나 다 검사하시는지······. 아, 다른 뜻이 아니라 나리들이 직접 고생하시는 걸 보니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상인이라면 이런 소식에 밝아야 하는 게 미덕인지라······.”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질질 끌면서 상단주가 품에서 꾸러미를 하나 더 꺼냈다. 이단 심판관은 꽤 만족했는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별일은 아닐세. 우리 품으로 이제야 돌아오신 성자님께서 이단자들을 엄격히 잡아내라고 지시하셨다. 예의 가짜 성녀 일도 겹쳤기도 하고.”


“아아 그런······. 자, 용병들은 이쪽입니다요. 이건 용병들의 신분증이고······.”


둘이 짐마차에서 멀어져가며 끝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똑똑히 들린 문장도 있었다.


돌아온 성자. 가짜 성녀.


그레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마데아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는 짐작이 갔다.


“디아나. 일어나렴.”


그레이스는 부러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그 말에 아마데아의 몸이 움찔하더니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손을 잡아 일으켜주면서 본 아마데아의 손목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연한 피부라서인지 멍이 들게 생겼다. 그레이스는 혀를 차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아마데아의 얼굴에 로브를 깊게 씌워주었다.


“저들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아마데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욱신거리는 손목보다도 가짜 성녀라는 말에 상처받은 마음이 더 아팠다. 바로 코 앞에 성녀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이단 심판관에게 부아가 치밂과 동시에, 알아보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함께 했다. 


아마데아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이후에는 검문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단 심판관이 통과시킨 상단을 일개 경비들이 멈출 배짱은 없었던 모양이다. 


용병조로 짐마차를 호위하는 아트레우스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뒤에서는 동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 사이로 톡톡 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더럽게 까다롭네. 얼마나 처먹는 거야. 한 세 번 치 통과금은 썼겠다. 저놈들은 신앙심을 돈으로 측정하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아마 다들 통쾌함을 느끼고 있겠지. 아트레우스 또한 그놈들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저 투정에 미소가 지어졌다.


“야, 아트레우스. 너는 뭐 할 말 없어?”


“맞아. 평소 같으면 너도 한두 마디 보태곤 했잖아. 아, 잠행은 처음이니 평소라기엔 이상한가?”


아트레우스는 풀어졌던 표정을 가다듬고 심통난 표정으로 바꾸었다. 대충 꿍해 있는 척 하면 적당히 넘어가겠거니 여겼다.


“이 자식 왜 이리 울상이래? 뭔 일 있어?”


“야, 야. 관둬. 건드리지 마. 척 보면 모르겠냐.”


제이든은 록시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 몸짓에 납득했는지 드디어 조용해졌다. 둘이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는 앙숙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이미 대기 중일 때 사소한 다툼이 있기도 했었다.


좀 더 치고받고 싸우면서 이미지를 굳혀야 하나 가늠하던 아트레우스는 관두기로 했다. 지금은 호위해야 할 대상이 있으니 연기까지 감당하기 힘들테지.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는 록시 쪽을 본체만체하며 유유히 길을 갈 뿐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둘이 싸우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괜히 데면데면해 보이는 두 사람 때문에 극도로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뭐······. 사랑싸움 직후도 아니고. 계속 이 상태로 가야 하는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친밀하게 풀어졌던 분위기는 두 사람의 냉전으로 인해 급격히 얼어붙었다. 아트레우스는 동료들이 느끼는 어색함을 눈치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모두가 바란대로 무사히 아우레티카의 도시로 잠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저 멀리 빛의 상징이라 불리는 웅장한 아우레티움 대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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