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과 성좌물

리디에 이어 드디어 카카페에도 로판에 헌터물이 도입된 작품들이 런칭되면서 새로운 시류가 들어왔다. 물론 나는 이를 굉장히 반기는 사람이지만 그건 그거고, 성좌물에 대한 오용이 있다고 판단해서 이번 글에선 성좌물에 대해 가볍게 다뤄볼까 한다.

판타지 웹소설을 좀 보던 사람이라면 성좌물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특히 '전지적 독자 시점'이 엄청난 히트를 치면서 성좌물이 가진 재미를 대중에게 잘 보여줬는데 안 읽은 사람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니 가급적 쉽게 설명해보겠다.

성좌물의 모티브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유래했다. 그래, 그리스로마신화. 지극히 인간과 비슷해서 실수도 하고 성질도 부리고 지들 내키는대로 저지르는 그리스로마신화의 인격신들이 영웅이라 부르지만 잘 따져보면 지들이 인간과 하룻밤 불장난으로 생긴 사생아 반신들에게 지들이 친 사고 뒷수습을 시키다가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실패한 대로 기념 삼아(!) 하늘에 별자리로 박아버리는 그 '성좌'가 성좌물의 기본적인 모티브다.

이런 신화적 모티브가 어떻게 요즘 같은 성좌물로 변형되기 시작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 '(주)판테온'이다. 판테온의 뜻이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니 제목에서부터 바로 느낌이 오지 않는가. 이렇듯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가져온 신화적 모티브를 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형화되어가던 게임 시스템을 신화 모티브임에도 과감하게 도입하고, 사도의 관념을 SNS와 접목해 흥미와 주시를 일종의 힘처럼 묘사한다.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이 지금의 성좌물의 시초인 셈이다. 

'(주)판테온'이 2015년에 나온 이후 판타지 장르에 성좌물이 조금씩 명맥을 자리잡아가는데 사실 당시에는 그렇게 인기있는 소재는 아니었다. 명맥이 이어지긴 이어지는데 그렇게 흥하지는 못하는... 그런 장르 말이다. 워낙에 헌터물이나 게임판타지 쪽이 강세였기도 했거니와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이 히트 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성좌물이라는 분류를 크게 인식하지 못 할 정도였다. 

차분히 따져보면 전독시 작품 내에서의 성좌물의 구조에 대해 했던 묘사는 SNS 그 자체보다는 인터넷 방송에 좀 더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아마도 전독시의 초기 모델은 아프리카TV 쪽에 가까웠을 거라 추측되지만 지금은 유튜브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다보니 사람들의 이해도가 자연스럽게 높아져있는 상황에서 성좌물이 가진 구조가 매력적으로 어필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성좌물에서 SNS와 인터넷 방송 모두 사람들의 반응에 기반해 명성과 실질적 이득을 얻는 점을 인지도 = 힘이란 공식으로 바꿔 도입해버린 건 정말 구미가 돌게 하는 방식이었다. 인지도가 무슨 힘이냐고? 잊을만 하면 터지는 뒷광고가 그 반증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크리에이터의 덩치가 커지면 에이전시에서 영입하려고 하는 부분도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SNS와 인터넷 방송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후원 시스템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전독시는 가감없이 반영했다. 양산형 제작자의 제품을 간접광고 해버리는 것도 그렇고, 작품 전독시의 초반부터 내내 나오는 '성좌가 시키는 대로 하면 장기적 이득이 안 된다'는 메세지가 그렇다. 

아프리카 TV에서 유달리 불거졌던 BJ들의 영상이 가진 선정성, 폭력성 문제가 바로 소설이 메세지를 통해 보여주는 단면이다. 여성 BJ에게 섹스어필을 위한 옷을 입히고 저속한 얘기를 나누는 걸로 후원금을 받아 돈을 버는 케이스나 사회적으로 비난 받을만한 언행을 시청자가 BJ에게 요구하고 이를 따랐을 때에만 후원금을 보내는 케이스 등 겉으로 크게 드러난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사실 이런 식의, 시청자가 창작자에게 비합리적인 사항을 요구하는 일은 웹소설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독자와 작가의 관계 중에서 이런 쪽으로 유명한 걸로 따지면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 시절부터 있지 않은가. 셜록을 소설에서 죽여버렸더니 사람들이 조화를 달고 다니는 걸로는 모자라서 아서 코난 도일에게 셜록 홈즈를 살려내라고 고함 질러대는 사람들도 생겼으며, 나중엔 폭행하려고도 들었다. 농담 하나 덧붙이지 않은 실화다. 

작가가 만든 이야기가 독자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작가에게 공격적으로 구는 일은 요즘에도 굉장히 흔하게 널려있지 않은가. 고작 편당 100원을 주고 소설을 읽으면서 그 작품 바로 밑에 재미 없어서 하차한다는 둥,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전개에 과몰입해서 작가에게 분개하는 댓글을 단다는 식으로 말이다. 개인적인 감상은 떼고 말해도 이런 행위 자체는 작가에게 조금도 도움 안 될 뿐만 아니라 품위는 물론 예의도 없는 행동이니 하지 않는 쪽을 추천한다.

각설하고, 이렇듯 뉴미디어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뉴미디어 서비스에 좌지우지되는 삶을 살고 있기에 성좌물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든 현실과 현실에 기반한 욕망의 반영이기도 하다. 싫든 좋든 뉴미디어의 영향력 아래 휘둘리는 삶이 우리들의 일상이 되었기에 성좌물은 이를 매우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을 보고 반응 하는 사람이 없으면 조용히 망해버리기 때문에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초기 자본금이 없으면 크리에이터로써 흥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빈자일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에 좌지우지 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며, 화면 너머의 타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로 이용해먹지만 동시에 자신의 후원자들을 경멸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반응하는 모든 이들의 행동이 절대 호의에서만 기반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인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판에서 나오는 성좌물에서 보이는 특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매우 애석한 일이지만 성좌물을 '세상을 편하게 살도록 팍팍 후원해주는 절대자를 둬서 인생 편하게 살기'에 가깝게 묘사한다. 이는 로판에서 유달리 흥하는 부둥물이랑 결합이 된 결과이긴 한데... 직설적으로 말해서 성좌물에 대한 이해도 전혀 없어 보이거니와 그렇게까지 해서 좋은 소재를 비틀어가며 절대자에게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절대자에게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음으로써 생기는 부와 권력'은 결국 가부장적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황제와 애첩, 딸바보 애비와 고명딸로 대표되는 구도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런 가부장적 욕망이 가지는 문제점은 몇 번이나 얘기해왔지만 애정에 기반한 권력은 애정이 사그라들면 같이 사라질 속성 때문에 부질 없거니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문제와도 떨어질 수 없을 뿐더러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재미가 없단 점이다.

성좌물에서 성좌로 대변되는 절대자가 언제까지고 주인공이 곤란하지 않도록 후원을 펑펑 하고 있으면 대체 무엇으로 서사에 긴장감을 부여할 건가? 아무 역경이 없이 마냥 사랑만 받는 이야기는 결국 그저 자위에 불과하다. 왜 그런 타인의 자위를 보며 자신을 대입해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현실이 각박하니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 수준이면 별 말 않겠는데 '진심인가?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고 싶은 건가?' 소리가 나오게 하는 작품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당연하지만 로판에만 하는 얘기는 아니다. 판타지 장르였던가, 하다하다 못해 성좌가 어머니였단 설정을 봤을 때는 정말...... 이하생략이다. 설정만으로도 워낙 경악해 차마 본문을 볼 용기가 안 나 자세한 비평은 못 하니 넘어가겠으나 이런 설정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남성향에서 모성을 못 벗어나는 만큼이나 여성향에서 이런 가부장적 권력이라도 상관 없으니 애정과 권력을 누리고 싶어하는 모습을 너무도 쉽게 전시하는데... 성좌물처럼 이런 대중의 욕망을 정면으로 받아칠 수도 있는 장르에서 굳이 그러고 있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대중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비꼴 수 있는 장르에서 그런 식으로 장르 코드를 비틀어버리는 건 꽤 블랙 코미디란 자각 정도는 있으면 싶다. 하다못해 후원 펑펑하던 성좌가 어느 날 갑자기 '잘 놀았다 ㅃㅇ'하고 사라져버리는 수준의 역경이라도 좀 넣자는 작은 바람을 담아 이만 줄이겠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