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 해부 - 성 혁명 (4)

일단 히피부터 마저 다루고 넘어가자.

히피는 이미지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전에도 얘기해줬듯 대충 풀어헤친 긴 머리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부터가 히피의 영향 중 하나며, 청바지가 '힙'한 옷으로 여겨지는 것도, 뼈만 남은 마른 몸에 대한 선망이 새로운 미의 기준이 된 것도, 타민족의 전통 의상이 일상 패션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도 히피의 영향이다. 이렇게 히피가 이미지에 영향을 준 건 그만큼 히피들이 존재를 외관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역설적인 부분은 기존의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게 반문화였는데 이들이 선불교의 유입에 친화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부터 뭔가 미묘하게 엘리트주의적인 이미지가 히피에게 생겼다는 점이다. 이래서 신비화를 질색하는 건데, 이해하기 어려워보이니까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해보기 싫어서 '신비'로 치장하는 게 아닌가 싶어 속이 뒤틀려서 그렇다.

당시 활동가의 90% 정도가 자신을 히피라고 칭했는데, 그렇다고 무조건 히피 = 활동가는 절대 아니다. 히피 자체가 하나의 패션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다양한 종류의 반체제주의자들은 히피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하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외관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이 그렇게 비판하던 소비사회의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지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물건을 소비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다 보니 빈곤층은 가난을 가볍게 취급하는 히피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흑인들도 히피들을 짜증스럽게 여겼는데, 흑인들이 투쟁으로 얻으려는 자유가 백인 중산층이 누리는 안정된 삶과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면, 히피들의 자유는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환경을 거부하고 (노동 없이)자연 속에서 쾌락을 누리는 거라서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히피는 기존 사회의 물질주의와 보수적 윤리관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확고한 가치관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반전운동이 반문화의 중요한 주제기는 했지만 어떻게 반전운동 하나만으로 좌파 내부의 내적인 분쟁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게다가 반문화 언론에서도 여성은 성적인 대상으로 제시되는 등의 이차적 위치로 다뤄졌다. 

그런 의미에서 성 혁명은 예정되어있었다. 우선, 경제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면 그렇다.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에서 전국 회장 역임한 변호사 카렌 디크로우(Karen DeCrow)가 1971년에 발표한 책 <The Young Woman's Guide to Liberation>에서 지적했듯 여성의 경제적 환경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남성의 평균 급여를 100달러로 잡는다고 할 때 미국 여성의 평균 급여는 1955년에 63달러였던 것이 1968년에는 58.2달러로 낮아졌다. 이렇게 된 이유의 하나는, 여성 취업이 약 5% 증가했지만 하위직 근로자의 비율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의 평균소득 격차는 당연히 더 벌어졌고, 일자리는 거지 같은데 불만이 없을 리 있겠는가.

그러다 1963년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가 출판되면서 여성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걸 대중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제2물결 페미니즘이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여성해방운동과 동성애운동, 피임약의 개발 등등 여러 요인이 합쳐져 이를 계기로 성 혁명(Sexual Revolution)이 벌어졌... 는 줄 알았지? 시험이었으면 아주 딱 낚기 좋은 구간이다. 즉, 아니다.

성 혁명 자체는 페미니즘과 역사를 거의 같이 한다. 물론 60년대가 성 혁명으로 대표되는 측면이 있긴 한데 이건 순전히, 에바 일루즈의 말을 빌려 "감정 중심의 근대가 본격적으로 알을 깨고 나온 것은 18세기 이후지만, 그 완벽한 실현은 1960년대에 와야 비로소 이루어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계몽주의 시기를 첫 번째 성 혁명으로 보고 60년대의 성 혁명을 두 번째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통은 성 혁명이라고 하면 60년대를 먼저 떠올리는 게다. 왜냐. 60년대 이전의 성 혁명이 세상에서 가장 고요히, 꾸준히 진행된 혁명이었다면 60년대를 기점으로 '혁명적으로'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꾸준히 얘기해줬듯,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서구의 구애와 결혼은 종교에 종속되어있었다. 부부 사이에 이뤄지는 섹스만이 '적합'하다고 교회가 봤기 때문에 사생아에게 아무 권리도 안 줬지 않은가. 그러다 18세기 말부터 계몽주의 바람이 불며 섹슈얼리티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너무 자세히 다루면 밑도 끝도 없이 늘어지니까 아주 간단히 줄여서, 이 계몽주의의 뒤를 이어 19세기에 자유주의, 사회주의, 초기 페미니즘이 기독교가 공고하게 쌓아올린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를 조금씩 무너트린다. 요 부분이 더 자세히 궁금하다면 인류학자 잭 구디의 <The Development of the Family and Marriage in Europe>이 고전이니 이걸 읽으면 되는데... 번역서가 없으니 파이팅이다.

여하튼 얘기를 돌려서, 성 혁명이 꾸준히 진행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19세기 말에 등장한 성 과학(sexual science) 때문인데,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놀랍지 않은 얘기겠지만 기독교에서 아담과 이브를 생각해봐라.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발상이 기본적인 관념으로 박혀있다 보니 성 과학의 등장 이전까지 여성의 몸은 남성의 몸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다. 결코 온전할 수 없고, 결코 남성을 능가할 수 없는 '모자른 몸'으로 인식되었다.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서구에서조차 여성 성기 훼손이 있었다. 일명 히스테리아에 대한 의학적 처방 중 하나가 클리토리스 절제... 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국내에선 잘 안 알려져 있다. 이게 빅토리아 시대의 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서구에 대한 선망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마사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한 의사가 있어서 감히 농담으로 써먹기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19c FGM으로 검색하면 자료를 금방 찾을 수 있다. 한국어 자료는 기대를 많이 내려놓으면 편하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 차이'를 인지하기 시작한 게 아무리 19세기라 한들, 남성과 여성의 몸을 동급으로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건 60년대다. 그것도 급진적(ㅋ) 시선을 가진 사람들 덕에 가능했던 거지만... 오늘날에도 약물의 복용량의 기준이 남성이고, 여성의 몸이 다운그레이드 버전이 아니고 같은 사람이니까 동량을 주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데... 세월이 흐르며 사상도 발전하고 기술도 발전하다 보니 요즘엔 성별간 호르몬 차이도 있고 장기의 차이 등이 있는 데다가, 여성 환자의 고통에 대한 호소는 엄살로 받아들여진다는 데이터도 축적이 되어서 완전히 같은 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서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연구가 더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물론, 이런 연구는 투자를 못 받아서 언제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여성 의사의 경우 여성 환자의 고통에 대한 얘기를 더 잘 들어준다는 연구도 있으니 의사가 자신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 싶으면 한 번 찾아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 물론... 이런 개인의 노력으로 밖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 한의원을 좋아하는 이유가 자신이 토로하는 고통을 경청하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국내에선 사회주의 페미니즘 서적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란 책의 2장으로 들어간 <젠더, 섹슈얼리티, 정치경제>에서 미카엘라 디 레오나르도와 로저 랭카스터가 지적했듯 성해방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운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자유, 레즈비언의 권리, 생식 조절, 원하면 할 수 있는 낙태 그리고 성적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했다. 그런데 동시에 이걸 기억해야 하는데, 20세기 초부터 영화와 광고는 아름답고 성적인 여성의 몸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그러다 보니 섹슈얼리티 해방운동은 쿨하고 재미있는 성적 쾌락을 암시하는 이미지와 이상을 전파하기 위한 무기로 썼다. 그런 의미에서 섹슈얼리티는 해방운동을 이끄는 중요한 가치였지만 정제되지 않은 욕망의 분출이기도 했단 얘기다.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그렇게 쪼아왔고, 초기 성 혁명의 이미지는 엘리트적 속성으로 꾸며졌는데다가... 무엇보다 이런 섹슈얼리티 이미지가 돈이 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마침 피임약도 발명됐겠다, 얼마나 이게 당시엔 센세이션이었겠는가. 특히나 자본주의 시장이 폭발적으로 팽창할 방법으로는 아주 구미가 돋는 이미지기도 하고 말이다.

마침 프랑스에서 68혁명(프랑스 5월 혁명이라고도 한다)이 벌어지면서 유럽에 전반적으로 지금 우리가 유럽하면 떠올리는 여성을 위한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미국도 이 68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영화 <미스비헤이비어>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외에도 60년대까지만 해도 대다수 국가는 오로지 '귀책사유에 따른 이혼'만 인정했다가 70년대 초부터 많은 국가들이 '당사자 쌍방의 책임을 묻지 않는 이혼'을 도입했다. 그래, 한국의 협의 이혼이 요 후자의 형식이다.

성 혁명을 기점으로 섹슈얼리티에 끼친 영향이 크지만 이건 지금 다 다루면 내가 죽을 것 같으니 이건 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반문화를 정리하는 걸로 끝맺어보자.

반문화는 미국이 국제적 차원에서 난국에 처하고 신마르크스주의 이념이 전 세계적으로 유리한 지대를 점령하고 있을 때 발전했다. 이는 미국 사회가 그리도 표방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실행할 역량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음을 보여주지만 크리스티안 생장폴랭이 지적했듯 닉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시작된 미국의 불간섭 정책은 명백히 반문화의 종말을 앞당긴 측면이 있다. 

반문화는 소비자본주의가 점령하고 있는 대중문화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그로부터 썩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사회제도적 변화를 이루어냈고 자유주의가 말하는 가치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사회적, 도덕적 보수주의 시기가 잇따르게 된다. 그래, 대처와 레이건의 시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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