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 해부 (5)

아름다워야만 하는 여성 이미지

70년대 미국 사회를 돌아보면 페미니즘이 승리한 것처럼 느껴질 테다. 성혁명으로 제도도 많이 개선되었고 여성의 사회 참여, 즉 커리어우먼이 늘어났으며 섹스는 더이상 금기가 아닌 데다가 피임약도 나왔고 <로맨스판타지 속 로맨스 서사와 페미니즘> 5편에서 얘기해줬듯 로 대 웨이드(Roe vs Waid) 사건으로 낙태 금지 법률들이 폐지되었다. 

지금은 좀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에 다시 강조하지만 당시엔 센세이션이었다. 재생산권이 완전히 여성에게 넘어간 것처럼 느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오늘날 돌아보면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여성용 피임약은 갖은 부작용이 있으나 그 동안 개선이라 부를만한 부분은 거의 없고, 부작용의 수준이 비슷한 정도로 남성용 피임약이 개발됐는데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며 외면 받으니 싸악 개선해서 내놓는 꼬라지 봐라. 게다가 실질적으로는 낙태 합법이 막혀있는데 이 '재생산권'이 여성의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났다고 해도 여전히 여성은 저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성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지도 못했고 가정은 여전히 여성의 영역이었다. 거기다 70년대 오일 쇼크도 있었고 일본과 독일이 치고 오니 세계시장에서 미국 제품의 점유율이 밀려나는 등, 러스트 벨트로 대표되는 생산직 남성들의 자리가 간당간당해진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생산직은 장기 고용을 선호한다. 공장을 돌려 물건을 생산해내는 기업 입장에서는 '숙련공'의 존재가 제일 중요하다. 기계가 많은 것을 대신해준다고는 해도 옛날엔 기계가 지금보다 더 수준이 낮았고, 일에 익숙해 금방 문제를 발견해낼 수 있는 노동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했겠는가. 이 부분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장기 고용으로 안정성을 제공하면서 근무한 기간에 따라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지금도 약간은 익숙한 고용과 임금 체계였는데 이를 담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남성들의 직업이 불안정해지고 사는 게 팍팍해지자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나가는,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의 여성들과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오일 쇼크 때문에 물가는 미쳤지, 금리는 고금리에, 이민자와 여성을 비롯한 저렴한 노동자들이 갑자기 늘어나고, 당시 당선되었던 공화당 소속의 닉슨 대통령은 부의 재분배 기능을 하던 갖은 복지 제도를 무력화시켜놓았고, 유럽도 마찬가지로 '영광의 시대'가 저물고 케인즈 학파가 밀리며 신자유주의가 부상하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을 들여다 보면 한국과 유사한 부분이 정말 많다. 요건 좀 뒤에서 다루자.

아직 공고한 가부장제 안에서 얌전히 말 잘 듣는 모습이 아니라면 여성이 찬양 받을 방법은 없었고, 교육과 고용에 있어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기존 사회가 잘못 되었다는 반발감은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해져 있었으나 혁명을 거친다 한들 기존의 관념들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타노스가 손가락 튕기는 것처럼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질 리도 없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여성은 과연 진정으로 해방됐는가? 하, 그럴 리가.

외환위기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났던 여성의 사회진출과 관련된 모습들을 생각해보자.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주로 여성들이 들어가서 하루종일 갈렸는데 그래도 집안일과 양육도 해야 하던 외환위기 시절 이후의 어머니 세대들 말이다. 그러면서도 빌어먹을 가장의 권위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여성들은 그걸 다 했다. 더 정확히는, 다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학교급식을 도입하며 그나마 양육과 관련된 뒷받침해주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지 않은가.

미국도 아아주 똑같다. 가사? 당연히 아내가 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양육? 이것도 당연히 엄마가 해야지! 오일쇼크 때문에 가계가 힘들어졌어도 이젠 여성도 일할 수 있는 시대 아니던가? 그럼 맞벌이 해야지! 하지만 집안일이랑 애 키우는 건 여자 몫이라는, 이제와 아주 익숙한 모습이 미국에서도 있었다.

그나마 1972년 미국에서 고용기회평등법이 통과되면서 교육에서의 성차별은 불법이 되었지만, 직업과 관련된 판례들을 살펴보면 여성은 여전히 '법적 권리를 모두 누리지 못하는 이등 시민'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외모를 근거로 여성을 고용하고 해고하는 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 말인 즉 여성이라면 무릇 화장해야 했고 덤으로 어떤 곳들은 남성들 돈 털어 먹겠답시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혀놓고 일하게 했다. 그런 주제에 성희롱에 대한 문제 인식은 90년대에나 생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희롱은 여성이 노동하면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니까 피해를 최소한으로 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봤다. 거짓말 같은가? '스노볼 대 가드너 머천트 회사(Snowball v. Gardner Merchant)' 케이스를 보자.

지금은 이런 '직종의 특수성에 따라 여성의 외모를 봐서 고용/해고한다'는 명제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솔직하게 얘기해보자. 모델이나 연예인 같은 미디어와 관련된 특수 직종 말고 일반적인 직종에 있어서 예쁘면 취직할 가능성이 쪼오끔 높아진다고 '추정된다'는 점 말고 뭐 시급이나 연봉을 더 쳐주는가, 승진을 빨리 하는가, 특별히 직장동료로 존중을 받는가. 

그간 여러 차례 강조해왔듯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깁슨걸, 핀업걸 등을 거치며 이미 상업화 되어가고 있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여성은 아름다워야 했다. 70년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이 '아름다움의 이상형', 가슴만 커다란 금발 백인 여성이라는 이미지에 감히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진짜 그랬다. 6~7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내놓았던 포스터만 훑어보더라도 상징과 기호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여성 이미지만큼은 죄다 날씬하고, 예쁘고, 젊은 여성만이 존재했다. 진짜로, 없다. 다양한 체형도, 평범한 외모도, 늙는 것도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인식 안에서 이 시기의 여성들이 느꼈을 공포를 생각해보자. 성혁명으로 일궈낸 것만큼 그들의 어머니 세대는 틀렸으니 롤모델로 삼으면 안 되는 존재고, 자신들은 그나마 성공한 세대인데 당장 뭐가 대단히 변한 건지 뭘 어떻게 앞으로 해나가면 될지 아직 잘 모르겠고, 성해방이 성공했다고는 하는데 고용주는 여전히 늙은 남성이다. 실패했다간 어머니처럼 집에 다시 박혀있어야 한다는 공포가 과연 없었을까? 그런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이 남성의 세계에 자신도 충분히 '끼여있어도 되는 존재'라고 어필 하길 원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해서 여성들은, '엄마' 같아 보이면 안 된다. 나이가 들어 보여선 아무튼 안 된다. 엄마와 똑같아 보이는 건 실패했다는 소리가 될 수 있으니까. 

남성과 완전히 똑같아서도 안 된다. 여성 해방이 성공했으니 이전에 그러했듯 더는 '남성보다 못한 성'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이 '새로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성공했다는 증거를 바라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이미지로 빚어내고 싶어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만 막상 그래서 당시에 '먹혔던' 여성 이미지를 오늘날 돌아보면 대중문화의 힘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건 당연히 미디어다. 하지만 TV, 영화, 광고 말고도 나오미 울프가 지적했던 대로 여성지까지 감안해야 한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옛날엔 SNS는 물론 인터넷도 없었다. 그러니 인쇄매체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개중에서도 여성을 타게팅으로 한 잡지가 여성들에게 영향을 크게 주고 있었다. 대충... 빅토리안쯤부터 그랬다. 아니 정말로, 이건 중요한 부분이다. 물건 팔아먹으려면 광고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여성들이 하는 가사에 장 보기도 포함되어있는데 여성들이 봐서 매력적이어야지 더 많이 팔고, 매력적이어야지 더 많은 사람들이 광고를 볼 것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여성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도 그렇지만 잡지도 초기엔 여성이 위주였다. 애초 <에스콰이어>가 탄생했던 건 여성이 여성지를 읽고 있으면 남성이 은근슬쩍 여성과 같이 읽는 걸 보고 남성을 위한 잡지가 나오면 성공할 거라 생각해서 만들었다는 말도 있는데 뭐... 아무튼. 옛날에는 여성지가 가장 거대한 광고판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가정에 보급되기 전까지는 여성의 문화에 있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자. 이미 몇 번이나 해준 얘기지만 인쇄매체는 탄생한 즉시 상품성을 요구 받아왔다. 즉 빅토리아 시대의 잡지들은 어떤 의미에선 지금과 똑같이 이중적인 여성들의 대중문화를 보여준다. 현실이 거지 같으니 사회비판적인 글이 실리기도 했지만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상을 위한 물건들을 사라는 광고가 실리곤 했다. 가끔 가다 식민지에서 사탕수수를 채취하기 위해 원주민을 착취하고 있으니 사탕무에서 추출한 설탕을 사라는 광고 같은 것도 실리긴 했지만 오늘날에도 너무나 익숙한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아름다운 여성'이 되고 싶다면 이 물건을 사세요! 류의 광고는 이미 이 시기부터 있었다. 영화는 상류층에의 선망으로 가득 빚어져 있었으니 중산층 이하 계급들 사이에선 당연히 여성지가 더 영향력이 컸고, 어쨌든 이런 경향이 한동안 쭈욱 내려온다.

그러다 60년대 들어 제2물결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강력해지자, 여성지들은 독자와 광고주의 요구에 맞춰 앞의 둘을 버리고 '아름다운 여성'을 광고하는 데 치중한다. 여성지만 그런 건 아니다. 언론은 더 심각했다. 저널리즘이 제시한 커리어우먼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늙은 남성 옆에서 예쁘고 어린 여성이 보조적인 역할로 뉴스를 제공하는 모습을 말이다. 이게 당시에 언론사들이 새로이 제시한 여성 이미지다.

남성은 적당히 점잖아 보이기만 하면 된다. 조금 비만체형이라도 괜찮고, 주름진 얼굴도 괜찮고,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아도 '뉴스 진행을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내는 앵커'로 존재할 수 있다. 반면 여성은 '젊고, 아름다워' 보여야만 한다. 주름진 얼굴의 중년 이상의 여성 아나운서가 화면에 나오는 일이 얼마나 드문가. 가뭄에 콩 나듯 나온다 해도 화장 안 하면 예의 없단 취급이나 받는다. 안경 쓰는 것도 금기시 되고, 끽해야 아나운서지 뉴스를 진행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앵커는 오늘날에도 극도로 적다. 예의 차린다고 정장 입는 건 그렇다 쳐도 그 정장은 몸에 딱 달라붙어 몸매를 강조하며 딱 그만큼 마른 체형이 아니면 화면에서 보기 싫다고 남성과 달리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압력 안에서, 70년대서부터 '아름답고 (성혁명이 성공했으니 더는 순결한 필요가 없는) 섹시한 여성'이 주류 여성 이미지로 올라가버리는데... 이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은 이후로 괄호 안의 부분만 약간의 변주만 거칠 뿐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다. 핀업걸이 대변하는 모든 걸 그대로 갖춘 채로 말이다.

사족 1. 보다 확실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싶다면 페미니즘은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 나오미 울프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요 세 권부터 차례대로 읽되, 대중문화에 있어서 앤젤라 맥로비의 책을 빼놓을 수 없지만 번역본이 없으니 전에도 추천한 수전 더글라스의 <배드 걸 굿 걸>, 멀리사 에임스와 세라 버콘의 <대중문화는 어떻게 여성을 만들어내는가>를, 사회학에선 에바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 마찬가지로 번역된 책이 없지만 로잘린드 길의 <젠더와 미디어> 정도는 읽어 보길 권한다.

사족 2. 예전에 폭스 뉴스의 업보 얘길 슬쩍 꺼냈는데 남성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걸 이용해 먹는 건 이놈들이 제일이다. 지금은 익숙한 중년 남성 변호사나 교수들 불러다가 지들 전공이 아닌 분야의 이야기까지 별 내용도 없구만 주구장창 떠드는 그 포맷을 만들어낸 게 바로 폭스 뉴스다. 한국의 미디어는 요 포맷에 대한 아아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고대로 들고 와서 써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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