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판타지에도 세분화가 필요하다
그간 로맨스판타지라는 장르의 기원과 그 구분이 폭력인 이유에 대해 계속 얘기해왔으니 오늘은 그 맥락 위에서 이어진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현재 상황과 세분화 필요성에 관한 얘기를 할 차례가 됐다 싶다.
판타지 웹소설을 볼 때 우리는 몇 개의 큼직한 키워드로 볼 작품을 고른다. 회귀/빙의/환생 같은 코드를 말하는 게 아니다. 헌터물 / 아카데미물 / 정통 판타지물 뭐 이런 키워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세분화가 슬슬 로판에도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로판은 한때 순정만화가 그러했듯 한 장르명 안에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장르가 혼재되어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를 완전히 탈피하다 못해 가모장제 사회를 그리는 작품에서부터 클래식과 클리셰 어드메의 로맨스로만 구성된 작품도 있고 중간 지점이나 아예 바깥도 존재한다. 이게 크게 로맨스판타지라는 한 덩어리로만 분류되다보니 독자들은 각자가 다른 정의의 로맨스판타지를 추구한다.
문제는 추구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작가에게 요구하는 댓글을 붙인다는 점이다. 그런 분들에게 일일이 여기서 이러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해봤자 잘 이해하고 넘어갈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어쨌거나 편의성을 갖춰야 사람은 빠른 소비를 한다. 이 빠른 소비, 작가의 주머니에 꽂히는 돈이 작가의 생계를 유지하게 만드니 나쁜 이야기만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구분할 기준은 아주 간단하다.
로맨스판타지 내에서 다시 장르를 세분화한다면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여주판 / 여주 서사물 / 빅토리안 판타지 로맨스 ]
여주판은 말 그대로 '판타지'의 성격이 강하다. 로맨스판타지라는 장르가 시작도 되기 전부터 있었던 여성 주인공이 활약하는 판타지를 계승한 작품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력을 따져봤을 때 제일 클래식하고 원류기 때문에 세분화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거지 냉정히 현재 로판에서 차지하고 있는 파이만으로 봤을 때는 이쪽이 제일 적다.
개인적으로는 참 슬픈 일이지만 마냥 나쁜 얘기도 아니다. 리디에 여주 헌터물이 들어온지 1년이 지나자 카카페에도 여주 헌터물이 들어왔다. 이 기류는 전지적 독자시점의 히트 이후 예견되어있긴 하나 바람직한 기류임은 틀림 없다. 좀 더 솔직하게 여성의 욕망과 성공을 대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건 분명하니.
또한 판타지의 성격이 강하다 해서 작품에서 로맨스를 굳ㅡ이 배제할 필요는 없다. 톨킨의 작품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나 룬의 아이들, 마시는 새 시리즈, 전지적 독자시점을 이어서 쭉 생각해보자. 이 작품들은 모험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험물은 연애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즉, 작품의 구성에 있어서 연애를 할 필요성이 없다 한들 오케이인 거다. 물론 연애가 나오면 다들 좋아하긴 하는데 유독 로판을 읽다보면 자주 목격하게 되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작품 초반에 '남주 언제 나옴??' '빨리 연애해' 같이 본인의 희망사항으로 작가에게 빠른 연애 진도를 원하는 코멘터리들을 모험물이 굳이 듣고 있어줄 이유가 없다.
이런 코멘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과대표성을 짚어주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사실 작가에게도 판타지 파트를 잘 먹고 있는 독자층에게 깊게 쑤시는 스트레스를 주는 코멘터리가 줄을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선무당일지 모르겠지만 헌터물이 이쪽을 완전히 계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인다.
빅토리안 판타지 로맨스는 분류명에서 예상했다시피, 빅토리안st(실질적으로는 재정 러시아에 가깝지만 가리키는 시대는 어차피 같으므로)한 배경에 가지고 있는 판타지 설정을 기반으로 로맨스 서사가 주를 이루는 작품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왕정제 안의 황녀나 성녀, 북부 대공, 그 시기의 드레스, 살롱 등등으로 구성된 그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 안에서 잘난 남자 끼고 부유하게 살면서 연애하는 서사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카카오페이지에서 런칭하는 작품 대다수가 이쪽에 포함된다고 보면 더 쉽다. 시한부물, 후회몰이라거나 꽁냥물, 착각계 등등 큰 맥락에서 로코로 분류할 수 있는 쪽 말이다. 사실 로코라는 말로 충분하지 않나 싶긴 한데 어쨌거나 로판 안에 들어와있는 하나의 기류를 기존 용어로 정리하는 것도 폭력인가 싶어 고른 말이다.
굳이 빅토리안이 배경이 아닌 분들은 어쩌냐고 묻는다면... 앞 부분의 빅토리안을 적당히 가공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 비잔틴 판타지 로맨스라던가. 제일 메이져는 아무래도 빅토리안이다보니 그런 모험을 하는 분들이 좀 드물긴 한데 있긴 있고... 모쪼록 힘내시길 바란다. 변형시키는 건 개인의 자유지 않은가.
여주 서사물의 구분도 이해하기 쉽다. 여성 주인공이 보일 서사가 모험물의 성격은 비교적 낮으나 서사가 연애에'만' 치중되지 않은 쪽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여주 서사물이 로판 장르의 대부분을 품을 수 있는 말이긴 하나 세분화의 편리성을 위해 일단 쓰는 것이지 다른 분류들이 여주 서사물이 아니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여성 주인공의 서사인 만큼 육아물이나 복수물, 궁중암투물, 영지경영물 등등 초반엔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전개여도 후반의 서사를 짤 때 자유도가 높은 쪽을 전부 아우를 수 있다. 작가의 개성이 엿보이는 특별한 세계관이어도 좋고 기존의 빅토리안 판타지스러운 배경이여도 구분 없이 포함할 수도 있거니와 로맨스가 필요해 의해 서사의 일부로 들어가있지만 빅토리안 판타지 로맨스와 달리 연애 진도가 조금 천천히 나갈 수도 있고 시작부터일 수도 있는 쪽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연애모험세계관 자유도여주판△O높음여주 서사물△△보통빅토리안 판타지 로맨스O△낮음
O는 필수 / △는 필수가 아님을 뜻한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물을 것이다. 이정도로 헐렁하게 분류하면 너무 구별하기 어렵지 않겠냐고. 내가 이 분류를 쓰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는 쪽은 작가를 향해 있다. 어차피 작품의 의도는 작가가 만드는 것이고, 제일 잘 판단할 수 있는 쪽도 작가다. 자신의 작품이 모험물에 가까우면 여주판, 연애물에 가깝고 그 외의 서사가 없다면 빅토리안 판타지 로맨스, 연애도 모험도 한다 싶으면 여주 서사물인 거다.
세계관의 자유도에 관해 저런 분류를 붙인 것도 모험물이 가지는 특성을 따른 것일 뿐이다. 모험물이 로맨스 서사를 절대 배제하는 게 아닐 뿐 더러, 자신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세계관이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면 기존에 있었던 서사라 한들 그 세계관에 맞춘 대대적인 변형이 필수적이니 모험물로 분류해도 좋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런 세분화를 기꺼워하지 않을 분도 있을 줄로 안다. 하지만 한번쯤은 고려해주시길 바란다. 이미 웹소설계는 몇 가지 키워드로 작품에 기대하는 바를 정하고 들어오는 독자가 대부분이다. 2019년 쯤이었던가, 여주판이라는 말에 굉장한 페미니즘적 의의를 찾고 다른 작품들을 폄하하는 걸 일각의 사람들이 스포츠처럼 즐기는 일이 있었는데 그 논란을 지켜보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여주판이라는 단어를 오염시켰다고 느꼈다. 판타지는, 모험물은 연애를 구태여 배제시키지 않는다. 그저 선택사항일 뿐이고 연애의 끝이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을 뿐이지. 아시다시피 남의 망한 사랑 얘기도 매우 재밌다.
그저 연애에 있어 좀 더 자유도 높은 쪽이 여주판이라 했을 때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세분화가 되길 바란다. 굳이 비평도 아니고 일개 제안일 뿐이니 모쪼록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