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쫓겨난 성녀는 개종하기로 했습니다 10화

추락한 성녀 10

*본 작품은 어한오 팀의 오리지널 창작 작품입니다. 무단 도용 및 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본 작품은 포스타입, 글리프에서 동시 연재 중에 있습니다.


추락한 성녀 10


루블, 보쓰, 히즈

***

“헬레니온 님은 아우레티카 출신이지만 현재 아녹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에 계십니다.”

수장 바로 밑의 책임자라는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그레이스는 판단했다. 아마 이 정도만 말해줘도 아마데아는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것이다.

“너희들의 적국 출신임에도 출세에 한계가 없다는 뜻인가. 어떻게 가능한 거지?”

“출세라······.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같다고도 할 수 없겠군요. 우선 말씀드린 대로 아녹스는 신분제가 없습니다.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방금 그대는 헬레니온이 엄청난 권력자라는 투로 말했어. 이게 신분이 아니면 뭐란 말이지?”

“이곳에도 권력자는 존재합니다. 다만 그 기준이 타고난 신분, 즉 혈통이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릅니다. 능력 있는 자라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그들의 장으로 따르지요.”

아마데아는 그레이스의 대답을 듣고 아우레티카의 몇몇 대귀족을 떠올렸다. 

신분제가 있는 아우레티카에는 귀족보다 더 높은 귀족인 대귀족이 존재한다.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혈통이 끊기지 않고 얼마나 순수성을 오래 유지했는가에 따라서 그들을 높여불렀다.

그런 이들에게 이곳의 규율은 아마 구역질이 나는 것일 테지. 아마데아의 앞에서도 고개 숙일 줄 몰랐던 그 머저리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떠올리며 아마데아는 피식 웃었다.

“온종일 차만 마시고 있을 수는 없지. 그레이스, 예정된 교습을 해주게.”

말 돌리기로 시작된 질문이었지만, 이만하면 좋은 마무리였다고 생각하며 아마데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스의 교습은 지루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여겨 거부하지는 않는 그녀였다.

“보스. 절 일 한가운데에서 질식하게 만들어놓고 혼자 외출입니까?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헬레니온은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불평해 대는 아트레우스를 힐끗 보고는 의자에 앉아 서류부터 펼쳤다. 

“이젠 무시합니까? 와, 나 참. 내가 혼자 수습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우레티카의 소란이 너무 빠르게 잡혔다. 이는 정상적이지 않다. 분명 배후가 있을 터. 아직은 잡힌 구간이 없지만 사람 입을 막더라도 한계가 있을 테니 더 파보는 수밖에.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말없이 사라지셔서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냔 말입니다! 잠깐. 설마 같은 곳에 가셨던 겁니까? 지난 외출과 이번 외출이 같은 곳이에요?”

사람으로 얻는 정보가 부족하다면 돈을 따라가 보자. 경제 흐름은 언제나 진솔한 법이다.

“보스, 설마 숨겨둔 애인이라도 생기셨습니까? 그래서 일도 내팽개치고 외출하는 겁니까?”

일단 상인 쪽을······. 아우레티카에 침투시켜 둔 정보원의 이름을 헤아리며 고민했다. 누가 제격일까.

“설마 그 예로케리입니까?”

그제야 아트레우스가 원하던 대로 헬레니온이 반응했다. 헬레니온은 아트레우스를 제대로 마주 보았다. 무시해 보려 노력했지만, 이 자식은 시비 거는 것에 천부적인 재능이라도 있는 건지. 가끔은 그 재능이 유용할 때도 있지만 보스인 자신에게만은 써주지 않았으면 한다.

헬레니온은 경고의 의미를 담아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트레우스는 흠칫 놀라며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말한 대로 내가 외유 중인 동안 일 처리를 잘 해뒀다. 잘했어.”

“아니 뭐. 비서로서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말조심은 해야겠군.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겐 발설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물러가라.”

헬레니온은 이 정도로 해뒀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그러나 물러가라고 했음에도 여전히 아트레우스는 그의 시야 외곽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보스. 정말 ‘그것’을 보호하고 계십니까?”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에 진중함이 묻어났다. 때문에 헬레니온은 더는 무시하지 못하고 아트레우스를 마주했다.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 거냐.”

“그렇게 경계하지 마십쇼. 저는 보스가 보호하기로 했다면 그에 따를 겁니다. 하지만 그 보호가 단순한 유용성 때문인지 아님 다른 목적인지가 걱정되어서 말이죠.”

“············.”

헬레니온이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바로 쳐내지 못한 것은 이번 방문 때의 황홀한 찰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잠깐의 눈 맞춤이 아직까지 각인되어 떠오르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레이스가 했던 염려도 기억났다. 왜 이리 자신 주변엔 잔소리쟁이들이 많은 건지. 물론 그를 생각해 주는 건 기쁘지만 약간 걸리적거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잠깐의 침묵을 오해한 아트레우스는 그 악마(성녀)를 향해 살의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내 감추어버렸다. 말했듯이 아트레우스는 보스의 말에 따를 거니까.

“······보스. 그동안 그 악, 아니 ‘그것’을 보러 다녀오신 거지요?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갈 것이고.”

“아마도.”

“하지만 한동안은 몸을 빼기 힘들 텐데요. 아우레티카 내부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헬레니온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수긍했다. 그녀에게 근시일 내에 방문하겠다고 해놓고 바로 약속을 깨게 생겼다.

“그러니 전할 말이 있으면 제가 가겠습니다.”

놀라운 제안이었다. 제안한 이가 꺼낼 법한 제안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저 정도의 위치면 여차하는 일이 생겼을 때 몸을 뺄 수 있습니다. 꼬리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요. 보스가 사라지는 것보다 평소 일에 불만이 많던 비서가 잠시 사라지는 것이 의심도 덜 삽니다.”

헬레니온은 고민하다가 그녀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여론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한번 시도해 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에게 흠집이 나서는 안된다. 들여다보는 거야 허락하지만 건드리는 것은 불허한다.”

“그 진귀한 물건을 제가 건드릴까 봐서요? 걱정 놓으십쇼.”

알아서 남의 눈을 의식해 아마데아를 마치 물건처럼 비유하는 정도의 기지면 괜찮을 듯 하다. 다만 걸리는 점이라면.

‘굳이 물건처럼 돌려말한 것이 아우레티카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면. 둘이 만나게 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내 그레이스를 생각하고는 아트레우스에게 별장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깐깐한 노스승은 절대 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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