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연인
손가락 끝으로 집무실의 책상을 부드럽게 쓸어보았다. 나무의 투박한 질감이 살아있으면서도 손에 나무 가시 따위가 박히지 않도록 약을 덧칠한 장인의 작품은 아주 오랫동안 이 방의 중앙을 지켜온 만큼 사용감이 가득하고 군데군데 마모된 자국이 보였다. 어릴 적부터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나지만, 그래도 요 몇 년 간은 좋은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있어서인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새겨넣은 금빛 장식도, 트리폴리움이라는 황가의 성씨가 새겨진 앞면도, 수없이 열고닫아 이제는 살짝 덜컹거리지만 아직 쓸만한 서랍들도 전부 눈을 감고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들은 하나같이 내 필체로 쓰여진 글이 있었고, 나만의 규칙대로 정리해 두었기에 오랜 시간을 쓰지 않고도 원하는 것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었다.
새로 들인 의자는 낡았던 이전의 것보다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금으로 된 테두리 대신 책상과 같은 종류의 목재를 이용했고, 중앙의 다이아몬드를 제외하면 보석도 딱히 쓰지 않았다. 화려한 겉보다는 실용성에 치중해 척 보기에 황제의 의자라기엔 초라해 보였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리리엔이 손수 골라 선물해 준 의자였으니까. 쓸 데 없이 화려하기만 한 것들을 싫어하는 내 성격을 잘 알았고, 내가 집무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리리엔이 내가 가장 좋아하리라 생각한 방향으로 만들라 지시하여 보내준 의자였다. 그러니 이 의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내가 황제로서 이 집무실을 사용했다는 흔적이 될 터였다.
천천히 집무실을 둘러보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께서 아끼시던 촛대가 눈에 들어온 것이 그 까닭이었다. 웬만한 사람 키 정도로 높은 촛대는 그 형태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멍하니 손으로 두꺼운 가운데 기둥을 쓸어내렸다. 매끈하고 차가운 기분 좋은 감각이 손끝에 잠시 머물렀다가 손을 떼는 순간 사라졌다. 이 촛대는 어머니께서 들여놓으신 물건이었다. 공간이 조금 휑해 보인다며 책상의 옆에 둘 큰 장식품을 구하려 고민하시다가 기왕이면 쓸모도 있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언니와 함께 의논해 고르신 것이었다. 그런 만큼 그리 오래되지 않아 촛대는 아직도 새것 같았다. 시종들이 주기적으로 닦고 청소하여 대부분의 시간에는 먼지 한 톨 쌓여있지 않았고, 약한 불이 붙어있는 초들로부터 촛농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 집무실은, 이 방은… 내가 지난 2년동안 황제로서 차지해 온 공간이었다. 이제 나는 내가 황녀일 시절 쓰던 방보다도 지금 이 방을 더 잘 알았고, 내가 이 방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단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황위에 오르기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지금의 황제는 나고 최근에 국정을 다스려온 것도 나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내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억지로 침입해 주인이 있는 자리를 차지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원래 황제가 될 운명이 아니었으니까. 리산드라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황위는 내 자리인 적이 없었다. 감히 탐내어서는 안 되는 지위였으면 모를까. 하지만 리산드라의 무모하고 대담한 짓 때문에 황위는 내가 가져야만 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언니가 황제가 되는 꿈을 꿨다. 날 때부터 황좌의 주인, 만인의 지도자로 태어난 언니가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축복받으며 대관식을 치르는 꿈을. 서류를 처리할 때 막힘이 없고, 사람을 모으는 법을 잘 알고 있으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한 셈이 뛰어난 언니는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제 2황녀이자, 황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내려놓은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의무를 다했다. 황녀님이라는 말보다는 장군님이라는 호칭으로 더 자주 불렸고, 지도자의 의무를 짊어질 필요 없이 검 한 자루와 말 한 필만을 대동한 채 병사들과 함께했다. 그 달콤한 꿈은 내가 수없이 상상해온 것들의 결집이기에 묘한 설득력이 깃들어 마치 현실과 같고, 오히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가 거짓이라 믿게 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 잠에서 깨고 익숙한 침실의 천장을 볼 때면 깊고 어두운 절망감이 나를 감쌀 뿐이었다. 그 절망에 휩싸일 때면 내가 너무 나약하게 느껴져 한참을 무기력하게 누워있곤 했다. 나이가 스물이 넘고 대관식을 치른 지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 한 내가 어찌나 한심하던지.
“폐하, 엘레노어 공작 각하와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집무실로 안내해라.”
시종장의 목소리에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씁쓸하게 답했다. 오늘, 내가 가진 모든 후회와 자격지심을 끊어내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으니까.
바이에른 공작저에 다녀온 이후 한참을 아델하이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달빛 없는 밤에도 빛나던 아델하이트의 얼굴과 내게 기대던 마른 몸이 자꾸만 생각나 밤잠을 설치는 일도 많았고, 그의 목소리와 몸짓이, 그가 가진 작은 습관 하나까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계속 떠올랐다. 교활한 사람. 내가 이렇게 될 거라 짐작하고 계략을 짠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생각해보자면 애초에 그날, 그 시간에 암살자가 단신으로 바이에른 가를 습격했던 것부터 이상했다. 왜 하필 내가 바이에른 공작저에 향하던 시간에 맞추어 짠 듯이 암살자가 도착했을까? 내가 볼 수밖에 없게 내가 오는 것을 알고 배치한 게 아니라면 지나친 우연의 일치였다. 단신으로 온 것도 수상쩍었다. 아무리 아델하이트가 무예에서는 약세를 보이며 기마술조차 어설픈 아가씨라지만 바이에른 가의 사병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데. 내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뿐이었지, 웬만한 기사들도 단신으로 침입할 엄두는 내지 못 할 것이었다. 나조차도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텐데 무슨 수로, 무슨 자신감으로? 게다가 대체 이 시점에 아델하이트가 죽기를 바라는 자가 누가 있냐는 말이다. 어차피 끈 떨어진 연 신세인 아델하이트를 굳이 죽여야 할 이유도 없을 텐데. 아무리 공녀 시절 쌓아둔 인연들은 있다지만 오랜 기간 죽은 사람으로 지내왔고 의회에서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라는 이미지를 구축한 아델하이트는 개인의 지지 기반이 부족했을 터였다. 게다가 공작가 내부를 정상화시켜야 해 사교 활동도 거의 하지 못 했으니 오죽할까. 귀족파 인선들은 그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 놔 두었을 것이고, 황제파 세력들은 바이에른 공작가를 공중분해시키기보다는 아델하이트의 지위를 삼키는 쪽이 이득이었을 것이다. 중도파는 더더욱 아델하이트를 건드릴 이유가 없으니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도 이게 자작극이 아니란 말인가?
한 번 의심이 시작되자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아델하이트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과 새로이 의심되는 정황들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리산드라의 계획은 황후를 통해 황제를 통제하는 것. 리리엔이 내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 여기까지는 진실이었다. 리리엔은 그게 자신이라 여겼지만, 내가 본 바로는 아니었다. 리리엔은 연막. 내게 오히려 반감을 끌어내 아델하이트에게 의지하게 만드려는 계획의 일부였다. 리리엔 쪽이 성공해도 리산드라에게 상관은 없었겠지만, 진짜는 아델하이트였을 것이다. 일부러 그를 살려두고 모종의 계약을 하여 내 옆에 첩자로 붙여놓기 위해. 그러면서도 들키지 않고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 보내주었겠지. 하지만 아델하이트는 실패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사랑에 목매는 감정적인 사람으로 보였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대놓고 추밀원 해체에 반대한 것이 그 요인이었다. 내가 그의 말을 따르고 그를 신뢰하기를 원했다면 더 조심했어야 했을 텐데, 이미 내 마음을 얻었다는 오만에 빠져 너무 이르게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멀리하기 시작하고 리리엔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리산드라도 내가 리리엔을 택했다 판단했는지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것을 그만두고 바이에른 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탓에 아델하이트는 애매한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지.
‘폐하께서 구하러 와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머리는 헝클어져 엉망진창에 호흡이 망가져 숨소리가 거칠었는데도 행복과 안도가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하던 아델하이트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몸에 꼭 맞는 크기의 흰 침의는 얇은 소재인 터라 속이 비쳐보이는 것만 같아 황급히 시선을 돌렸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상식적으로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그리 허술하게 입었을 리가 없잖나.
그 순간에는 그 말이 마냥 달콤하고 애틋하게만 느껴졌다. 여느 사랑 이야기에서 연인을 구해주는 기사처럼 내가 딱 알맞은 타이밍에 등장해 그에게 구원을 선사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걸 어찌 알았겠는가. 황궁에 감시자를 보내어 내가 궁에서 나선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겠지. 솜씨좋은 각본가이자 연출가인 아델하이트는 내가 도착할 타이밍에 맞추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만들었을 터다. 아직 내가 그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리산드라에게 이용 가치라도 증명받고 싶었나? 이제 와서? 리리엔과의 결혼에 훼방이라도 놓아보려던 건가?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이를 악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상담이랍시고 찾아간 내가 멍청했다. 생각해 보면 살아남기 위해 제 어머니의 원수와도 손을 잡은 녀석이 아니었나? 죄책감이니 뭐니 하며 털어놓았어 봤자 답은 뻔했을 테다. 제 경험을 투영해서 참으라 하거나… 아니, 아니지. 녀석은 나와 리리엔이 결혼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니 내 불편함을 미끼 삼아 리리엔과의 계약을 취소하게 유도했을 터다. 리산드라의 지원까지는 얻지 못하더라도 나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나조차도 내가 그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어떻게 알고. 어떻게…
아. 머리가 아팠다. 너무 생각이 많아져서일까, 아니면 단순 스트레스일까.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창가에 기댔다. 날씨는 맑았지만 밝은 태양이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예전부터 사람의 감정을 읽고 이용하는 데에는 소름끼칠 정도의 재능이 있었지. 그래서 그를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것인데, 왜 잊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그의 좋은 면만 보고 싶었던 걸까. 첫사랑이 대수라고. 무슨 대수라고…
하하. 쓴웃음이 터져나왔다. 무슨 대수긴.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차피 정략혼으로 힘있는 가문이나 다른 나라에 가게 될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아델하이트는 그 생각이 사라지자마자 내 일상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내가 억지로 애정을 붙들지 않아도, 사랑으로 발전하도록 놔두어도 괜찮았던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접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다. 그 증거로 나는 아직도 아델하이트 생각뿐이지 않나. 리산드라와 리리엔이 황궁에 왔는데도. 심지어 내가 마련한 자리인데도. 그들을 어떻게 맞이할지 따위에 대한 생각 하나 없이 그날의 일만 떠올리고 있잖나.
“한심한 새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욕설을 입에 담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그 욕설이 나를 향한 것은 더더욱 오랜만이었다. 황태자라는 자리를 얻은 이후로는 최소한의 기품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언행을 조심하려 노력했으니까. 방금 같은 말도 듣는 사람이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마음을 다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짧은 심호흡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고, 쓸어넘겨 헝클어진 머리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리산드라의 앞에서까지 망가진 모습을 내보여 약점을 보여줄 필요는 없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그래, 엘레노어 공. 오랜만이네.”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알리스테어 폐하!”
“나야말로 공녀를 볼 수 있어 좋은걸.”
때마침 리산드라와 리리엔이 도착했고, 나는 미소지은 낯으로 그들을 반겼다. 리리엔이 홀로 왔다면 표정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리산드라가 함께 온 이상 연기는 필수였다. 리산드라가 우리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에. 다정한 연인의 모습을 보여야만 리산드라가 이 사랑놀음이 진심이라 여기고 의심하지 않을 터였다.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것만에 집중하며 리리엔의 작은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리리엔은 익숙하다는 듯 밝게 웃으며 리산드라의 눈치라도 보는 양 그를 흘끗거렸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정말로 즐거워 피식 웃어버렸다. 리리엔은 이제 예전처럼 과하게 소녀같음을 강조하며 꺄르르거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오래된 연인의 익숙한 다정함을 목도하였다는 듯 리리엔은 들뜬 얼굴을 연기하기는 했으나, 사소한 태도들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듯이, 나는 입은 옷도 사람을 바꿀 수 있다 믿었다. 리리엔에게 발목까지 내려오는 드레스 대신 깔끔한 바지가 포함된 정복을 선물해준 것도 그 이유였다. 그쪽이 더 취향이었다는 것까지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리리엔이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그런 인형같은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기를 소망했다. 물론 황후가 된 이후에 서서히 연기를 그만두게 했어도 되었을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니까, 리리엔이 황후라는 자리에 걸맞는 위엄을 찾아간다 하여 이상하다 여길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국혼은 민감한 일이었고, 당장은 약혼 이상의 무언가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내게 처음 옷 선물을 받고 ‘어머니가 원하시는 모습과 다른 이미지라 어떻게 굴어야 할 지 모르겠다’며 난감해하는 리리엔의 말에 걱정 말라며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생각할 때 그 옷에 걸맞은 태도를 취하라고. 사람들은 시각적인 요소에 많은 영향을 받으니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정 곤란하면 그쪽이 내 취향이라 들었다며 둘러대라는 작은 농담까지 던지고 나서야 리리엔은 납득한 듯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리리엔이 천천히 고쳐나간 습관들이 명확하게 보일 정도였다.
리리엔은 여전히 엘레노어 가의 사랑스러운 막내딸이었지만, 마냥 순진하고 천진한 어린아이와 같은 이미지를 구축하던 예전과는 다르게 사교계에서 철이 들었다느니, 황후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느니 하는 평을 듣고 있었다. 괜히 말끝을 흐리거나 상대의 시선을 피하는, 쑥쓰러워하는 아이 같은 모습을 거의 지우고 제 의견을 피력할 줄 아는 당당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내가 선물해준 것이 아니더라도 가문에서 따로 디자이너를 불러 원하는 형태의 옷을 지어 입는다 하니, 내게는 희소식이었다. 나는 지금의 리리엔이 훨씬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의견을 말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고, 항상 당당하면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가득하여 여전히 사교계의 중심으로 불리는 리리엔은 내가 항상 동경하고 좋아해오던 요소들을 전부 갖추고 있었다. 내 언니가 가지고 있던 모습. 그리고…
아차. 이러면 안 되는데. 무의식적으로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매력인 사람.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을 항상 독차지하는 사람.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아델하이트에 대한 생각을 않기가 더 어려웠다. 분명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 더 이상 미련 갖지 않기로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무의식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어디 편찮으신가요? 안색이…”
“아, 잠을 설쳐서. 별 것 아니니 걱정 마라.”
곁에서 보기에도 태가 났던 걸까. 리리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리산드라가 눈치챘을 테니 빨리 표정을 갈무리하라는 신호였겠지. 너무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내게 주의를 전하려 한 것이었을 터였다.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누가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말로 답하고는, 리산드라에게 시선을 돌려 화제를 전환했다.
“의자에 앉게, 엘레노어 공. 이야기를 시작해야지.”
“예, 폐하. 그렇게 하지요.”
나는 본래 리리엔과 만날 때 리산드라까지는 잘 부르지 않았다. 멋대로 따라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되도록이면 리리엔에게도 최소한의 시종들만 대동하고 올 것을 부탁했으며 리산드라가 따라올 때면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연인끼리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길 원한다는 명분은 이를 위한 방패막이로 사용하기 좋았으며, 리산드라도 최근에는 리리엔이 황궁을 방문할 때 굳이 함께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나와 리리엔의 약혼식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모인 상황이었으니까. 처음에 나는 그저 간소하게 할 생각이었기에 차기 황후로서의 입지도 다질 겸 리리엔에게 직접 준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 물었지만, 그는 간단한 티파티 외에는 준비해본 경험이 없는 자신이 총괄한다면 처음에 약속했던 삼 개월이라는 시간을 지키지 못 할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짧은 논의 끝에 우리는 리산드라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편명한 선택일 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리리엔은 모두가 엘레노어 공작가와 황실의 결합을 알 수 있도록 최대한 화려하고 성대한 약혼식을 원했는데, 이는 제국에서도 십 년에 한 번이나 있을 법한 규모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우리가 준비하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연회장도 좋지만, 황궁 앞 정원을 사용하도록 하지. 귀족이 아닌 자들도 볼 수 있도록 말이야.”
“장소는 어떻게 꾸밀 생각이신지요?”
“황실의 푸른 기로 장식해야겠지… 아, 그리고 붉은 꽃을 심어두라 할까. 마침 리리엔이 좋아하는 꽃은 여름에 만개하기 시작하니까 시기가 적당하군.”
대부분의 대화는 리산드라와 나누게 되었다. 아직 리리엔은 제 어머니의 의견을 거스르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반면 리산드라는 약혼식에 바라는 것이 많은 듯 보였기 때문에. 상대가 내 원수였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차라리 속이 편한 자리였다.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의견의 조율도 빨랐고, 세부적인 디테일을 신경쓰기 귀찮아하는 나 대신 리산드라는 전부 계획해 둔 것이 있다는 듯이 원하는 바를 읊었다. 대부분의 의견은 엘레노어 공작부인으로 하여금 축사를 읊게 하고 싶다던지, 귀족들에게 드레스 코드를 지정해 통일된 느낌을 주게 하자던지 정도의, 해도 상관없고 빼도 차질이 없을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할 일은 그 의견을 듣고 승낙할지 거절할지를 택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기에,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개입하는 것은 전체적인 분위기, 장소, 시간대 등 큰 틀을 잡을 때 뿐이었다. 황궁에 내걸릴 깃발에 새겨질 황실의 문장에 은으로 된 실만을 사용하여 단순화시킬지, 아니면 화려하게 보이도록 보석과 다양한 색으로 된 실을 이용해 꾸밀지 하는 것 따위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 큰 틀을 잡을 때를 제외하면 내가 큰 의견을 내는 때는 단 한 순간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그날 입으실 의상 말인데요. 제 쪽에서 준비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최근 저희 아이가 폐하께 옷 선물을 자주 받았다 들어서…”
처음부터, 리산드라와 리리엔이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나는 귀로는 리산드라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눈은 줄곧 리리엔을 향하게 했다. 리리엔은 직접적으로 리산드라의 말을 거절할 용기가 없다 했으니 혹여라도 리리엔이 불편해하는 상황이 온다면 내가 상황을 정리해주기 위함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리산드라가 직접 의상을 준비하겠다 한 순간, 잠깐이지만 리리엔이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리리엔의 옆에 앉은 리산드라는 줄곧 내게 시선을 고정했으니 보지 못 했겠지만, 그들의 맞은편에 앉은 내게는 조금만 집중하면 쉽게 보일 정도였다. 그 모습에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딸이라서, 어릴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리리엔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가?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리산드라가 직접 정한다면 결과는 뻔했다. 리리엔은 내가 애써 벗겨준 불편한 드레스와 굽이 높은 구두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겠지. 리산드라의 시선에서 이 약혼식은 나와 리리엔의 사랑을 증명하는 행사보다는 엘레노어 공작가와 황실의 결합을 보이는 날에 더 가까울 테니까. 행사에서도 엘레노어 가문의 영향력을 잔뜩 넣고 싶어할 터였다.
“그건 허락하기 힘들겠는데. 전에도 말했지만, 공작이 고르는 옷들 중에는 영 내 취향인 것이 없어서. 내 여자의 옷은 직접 골라주고 싶군.”
몇 시간동안 논의를 지속하며 줄곧 무덤덤한 척 감정을 죽이고 리산드라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취급하는 양 연기해와서일까. 드물게 리산드라에게 호의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심만이 가득한 말을 내뱉어도 되는 순간이 오자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투가 섞이고 말았다. 하필 눈까지 맞추며 이야기했으니, 더욱 도발로 느껴졌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깐 굳은 리산드라의 표정에 아차 싶어 정정할까도 고민했지만, 그리 내키지 않아 이만 말을 줄이고 리리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고맙다는 듯 편안하게 미소짓는 표정에 나도 마음이 편안해져 피식, 하고 작게 웃었을 때였다.
“제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드린 청인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정 그러시다면 작은 부탁이라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황실의 행사이니 폐하의 의복에도, 그리고 리리엔의 옷에도 푸른색이 들어가겠지요. 헌데, 주가 되는 색은 흰색으로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라, 이건 예상 밖인데. 리리엔에게는 드레스를 입혀달라든지, 엘레노어 가의 상징인 자주색을 내 옷에 사용해 달라든지 하는 요구일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리산드라는 그 짧은 말을 끝으로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댔다. 들어주지 못 할 만큼 어려운 요구도 아니고, 들어줘서 손해를 볼 것도 없었다. 리리엔도 안색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오히려 더 미심쩍게 느껴지는 것은. 리산드라처럼 교활한 자가 그저 흰색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라 믿기는 어려웠다.
“이유를… 듣고 싶다.”
잠깐의 고민 끝에 느릿하게 말했다. 명분만이어도 좋았다. 리산드라가 얼토당토않은 사유를 명분으로 꺼내놓으면 속으로는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 미루어 추측해 볼 수 있는 증거가 될 터였으니까. 또한 그럴듯한 이유를 댄다면, 그리고 황실 차원에서 그런 이유를 들어도 괜찮을 듯 하다면 흰 옷을 입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머뭇거린다면 내게 말할 수 없는 이유냐며 캐물을 핑계가 되기도 하겠지. 어찌 되어도 손해볼 것이 없었다.
아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집무실에서는 제법 먼 곳에서 나는 것으로 추정되는 구둣발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찰나였지만 완전한 정적이었다. 그리고 리산드라는 바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약혼식 이후 저희 아이를 황궁에서 살게 하겠다 말씀하셨죠.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 황후와도 같은 대접을 해 주신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공식적인 직함과 권력만 황후의 것이 아닐 뿐, 제국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한 황후에 가까운 대접을 해 줄 것이다.”
그래야 자네가 마음을 놓지 않겠는가. 그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리산드라는 아직 내가 그의 건강상태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터였다. 하지만 그리 말한다면 의심하겠지. 어쩌면 약혼식 후에도 결혼식을 기다리며 가주 자리를 놓지 않으려 할지도 몰랐다. 그런 위험은 절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따라나오려던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리산드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 보여주려 합니다. 황후의 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아. 이건 확실히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흰색 옷은 결혼식에서만 입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식을 치르는 부부는 모두 흰 옷을 입는 것이 제국의 관례였으니까. 약혼식에서까지 그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전략이 될 터였다. 예비 황후에 불과한 리리엔이 황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도 있을 것이고, 만인에게 내가 이렇게까지 리리엔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전략으로도 준수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아시겠지만 저희 리리가… 참 운이 좋은 편이잖습니까. 제국 어디에도 이보다 좋은 혼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어미 된 마음으로 조금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약혼과 결혼의 무게는 다르니까요.”
그리고 리산드라 본인에게도 도움이 될 터였다. 그만큼 엘레노어 가문의 입지가 확실해지면, 리리엔이 황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을 품지 못 할 정도로 강하게 못박는다면 이른 은퇴를 고려할 수 있겠지. 리산드라도 사람이었다. 제 몸이, 건강이 중요하지 않을 리 없었다.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이유에 나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 한 부분이었는데 뜻밖에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믿으면서. 그 생각에 너무 깊게 빠진 탓에 문앞까지 다가온 인기척을 미처 눈치채지 못 했다. 문이 열리는 그 순간까지도.
“그리고, 혹시나… 아직까지는 폐하께서 미혼이시라며 희망을 품을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는 장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리산드라는 알았을까. 알고 말한 것이었을까. 조금 전 침묵이 흐를 때 들었던 구둣발 소리가 우리가 있는 집무실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었을 시종들조차 무시하고 문을 열 것이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이라는 것을. 알고도, 계획적으로 입 밖으로 낸 것일까. 아델하이트의 입장에서는 나와 리리엔이 약혼식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혀 축복할 일이 아닐 테니까. 오히려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할 테니까. 계획적으로 암살을 당할 뻔한 척 연출까지 해가며 내 마음을 확인하고 붙잡아두려던 시도가 어그러졌는데 어디 속이 편하겠는가. 알고도 말한 것이라면 리산드라는 정말, 정말이지 잔인한 사람이었다. 들었다는 티를 내도, 그렇지 않아도 비참하겠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우리 세 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충격받은 표정의 아델하이트와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아델하이트의 표정에 놀랐지만, 동시에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문을 열고도 들어오지는 않는 아델하이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델하이트처럼 귀족의 습관이 몸에 밴 듯 행동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시종을 두고 제 손으로 문을 열었을 리가 없는데. 그리고 허락조차 받지 않고 황제의 집무실 문을 함부로 열었을 리도 없는데. 내 상식 밖의 일에 그저 헛것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만이 들었다. 대체 왜? 아델하이트가? 이 시간에?
“폐하를… 뵙습니다.”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쥐어짜내듯 내게 인사하는 아델하이트의 모습은 어쩐지 초췌해 보였다. 그가 세운 전략이 빗나간 것이 그 이유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음에도 내가 통제하지 못 한 마음 한구석에서 걱정이 밀려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내가 남 걱정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다고. 더욱이 그것이 내 마음을 돌리려 무엇이든 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신경을 쓰지 말아야 했다. 어쩌면 저 파리한 모습조차도 한 편의 연극일지도 몰랐다. 내 동정이라도 사기 위한 수작일지도.
“…그래, 바이에른 공. 여기는 어쩐 일이지? 나는 부른 기억이 없는데.”
어쩐 일이냐는 나의 질문에 한 발짝을 떼며 느릿하게 입을 열던 아델하이트는 이어지는 내 말에 움찔하며 더 이상 전진하지 못 했다. 거짓말이라도 하려 했나? 그 모습에 기가 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이건… 이건 내가 좋아했던 그의 모습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당당한 태도와 화려한 언변으로 판을 주도하더라도 마지막은 항상 정론으로 돌파하던 사람이라서. 그래서 마음을 주었던 것인데. 장신구도 귀걸이뿐인 데다 옷도 평소보다 구겨진 흔적이 많은 것이 제대로 단장도 못 하고 나올 만큼 급했나 싶어 처량하게 느껴지다가도 지금은 그런 감정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뇌이며 그를 계속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려 애썼다.
“아… 그저, 놀라운 소식을 들어 확인차 달려온 것인데 손님이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손님이 있는 줄은 몰랐다는 말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아델하이트는 리산드라를 발견하자마자 입가에 미소를 띄며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했으니까. 리리엔만 있는 줄 알았거나, 내가 혼자인 줄 알았겠지. 얼굴도 보기 싫은 리산드라를 부른 것이 호재였을 줄이야. 이런 상황을 두고 이이제이라 하던가?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리산드라의 존재만으로도 아델하이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었을 줄이야. 하기야, 껄끄럽겠지. 어머니의 원수라는 사실을 억지로 참아가며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그 밑으로 들어갔을 텐데… 결국 다시 배신당했으니까. 내가 리리엔을 택한 이상 리산드라에게는 아델하이트가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
“약혼식을 준비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언질도 없으셨잖습니까. 설마 진실일까 하여 이리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제게는 말해주실 줄 알았는데… 서운합니다.”
아델하이트가 이렇게까지 빠르게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나. 아무리 연기에 능한 아델하이트더라도 이 정도의 위기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미리 이야기를 해 주었다면 뭘 하려고 했을까. 훼방이라도 놓으려고? 아니면 이번에는 진짜로 자객을 고용해 리리엔을 암살하려고?
“내가 왜 자네에게 이 사실을 언급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바이에른 가는 황실의 오랜 벗이잖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폐하.”
“오랜 벗이라…”
아, 기가 찼다. 서운하다고? 고작 이런 걸로? 그랬다면, 이런 말을 할 거라면 나를 배신하지 말았어야지. 계속 내 편으로 남아있었어야지. 나를 그리도 비참하게 만들고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항상 뻔뻔하게 연기하는 데에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염치도 없는 사람일 줄이야. 이제 와 역사를 들먹이면 내가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나?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아델하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팔만 뻗어도 닿을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분명 멀리까지 내다보고 둔 최선의 수라고 생각한 것이 최악의 수가 되는 경험을. 내게 그 수는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이라는 사람 자체였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복수가 될 터였다.
“바이에른 공. 내게 말했었지. 내가 자네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언젠가 내 소원을 한 번 들어주겠다고.”
“…예.”
내가 할 말을 눈치챈 걸까. 아델하이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갔다. 하지만 그따위 것을 신경쓸 여유는 내게 없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리리엔과의 약혼식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는 것 단 하나였기에.
“지금 사용하도록 하지, 그 권리를.”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쓸 데가 없었다. 무언가에 대한 진실을 고백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그게 정말 진실인지 내가 판단할 방법이 없었고, 무엇보다 나는 아델하이트에게 딱히 듣고 싶은 말도, 그에게 들을 해명도 없었다. 그저 그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 그것을 소원으로 빌 수도 없었다. 현실적으로 가능이나 하던가? 아델하이트가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야기해야 할 텐데.
오히려 지금이 적기였다. 소소한 권리를 챙기되 증인이 있는 자리에서 진행해 아델하이트가 말을 바꾸지 못 하도록 막고, 그의 심기라도 건드려 작은 복수라도 하는 것이. 그도 그런 것이, 나는 아주 사적인 일에 이 소원권을 사용할 생각이었으니까.
“내 약혼에도, 결혼에도 왈가왈부하지 말게. 내가 황좌에 앉은 이상 이는 단순한 사생활이 아닌 제국의 중대사라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이를 의논하는 상대가 자네일 필요는 없어. 알고 있잖나?”
부러 그에게 상처가 될 말을 골랐다. 그가, 제국의 대공이라 불리우는 자가, 아델하이트 바이에른이… 받아서도 안 되고, 받을 거라 생각지도 못 했을 대우를 선사해주고 싶었다. 유치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경악이 담긴 그의 표정을 보아 이는 성공한 것임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아델하이트가 표정관리에 실패하는 날이 오다니. 그 얼굴을 보자 저열한 만족감이 퍼졌다. 아무리 나를 배신하고 이용하려던 사람이라 하지만, 남에게 고의적으로 상처를 주고도 이리 즐거운 것을 보아 나는 선인이 되기에는 그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애초에 그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것을.
“그러니 곱게 돌아가도록 하게나. 나는 내 애인과… 내 장모 될 사람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야.”
수치심일까? 아니면 분함? 아델하이트가 잘게 몸을 떨더니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따르지 않겠다 하면 병사들을 불러 돌려보낼 예정인데. 그런 생각으로 그를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한때는 두려워하기도 했고, 동경하기도 했으며 끝내 내게로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낸 사람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델하이트도 곧 태도를 확실하게 했다.
“폐하와 예비 황후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심에 방해가 된 점 사과드립니다.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 감정적인 태도들은 전부 가면이기라도 했다는 것 마냥, 아델하이트는 트집을 잡을래야 잡을 수 없을 만큼 예의바른 태도로 정석적인 인사를 내게 건넸다. 목소리에는 떨림이 멎었고, 몸짓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품있고 우아했다. 내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자 아델하이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집무실을 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잠깐 눈에 담은 나는 문득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싶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분명 리산드라와 리리엔이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오후의 태양빛이 얼마나 강했는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지금이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길 시기인데도 벌써 노을이라니. 어찌나 정할 것이 많았으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에 작게 한숨이 쉬어졌다. 이럴 줄 알았다면 리리엔과 규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금 작게 정할 것을 그랬나.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지. 미처 정하지 못 한 사안들은 다음에 이야기할 시간을 잡아 알려주겠네.”
리산드라와 리리엔, 두 사람을 돌아보여 말했다. 내가 몸을 일으킬 때부터 아무 말도 않고 조용하기에 나를 시험했나 싶었는데,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하는 리산드라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아델하이트를 이기지 못 하리라 생각했나? 방금까지만 해도 리산드라가 있어준 덕에 아델하이트를 더 확실히 몰아붙일 수 있었기에 진심으로 선처해 주려는 마음까지 살짝 들었는데, 그 생각조차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뛰어난 화술로 상황을 뒤집는 것이 아델하이트의 특기이기는 했으나, 저런 표정까지 짓자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애써 참았다. 좋은 날이잖나.
그렇게 나는, 그 날의 만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믿으며 황궁 정문까지 리리엔을 배웅했다.
그 이후로 아델하이트가 나를 철저히 피하리라는 미래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채.
“입에는 맞나?”
“네, 덕분에요.”
내가 건넨 짧은 질문에 리리엔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로 가볍게 답했다. 다른 이가 그렇게 굴었다면 무례하다 생각했겠지만, 이 순간 함께 식사하고 있는 상대는 리리엔이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는 쪽에 가까웠다.
약혼식을 거행할 날을 잡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한 후로 리리엔은 영지로 돌아간 리산드라와 다르게 줄곧 수도에서 지냈다. 아직은 식을 치르지 않아 황후의 방을 내어줄 수가 없어 엘레노어 가의 별장에서 지내야 했지만, 그래도 매일 황궁에서 저녁식사를 들었다. 이건 간단한 보여주기식 퍼포먼스였다. 적어도 첫 목적은 그랬다. 과거 반란으로 맺어진 악연마저 무시하고 약혼식을 거행할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커플이 그 정도의 행보는 보여줘야 할 테니까. 처음에는 제국에 요란하게 소문을 퍼뜨릴 필요가 있어 리리엔이 영지에서 수도까지 오는 방식을 택했지만, 지금은 어차피 우리가 약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암암리에 퍼져 굳이 리리엔이 먼 거리를 오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리리엔은 별장에서 지내게 된 첫날, 자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사랑스러운 딸을 연기해온 나머지 리산드라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 안에서는 아무리 사람들을 편히 대하려 애써도 관성적인 애교와 미소가 튀어나온다 내게 씁쓸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오히려 수도에는 리산드라가 없으니 숨통이 트인다며 내가 무어라 위로할 말을 찾기도 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여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레노어 공작가로 향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이해하게 되었다. 수도에서 지내는 리리엔은 이전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 덕에 나는 모르고 있던 리리엔의 숨겨진 부분을 발견하기도 했고, 안다고 생각했던 점이 사실은 연기였다는 것을 깨닫는 등 이전과는 다른 리리엔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제 좀 편한가 보네. 아예 단답도 하고.”
“아… 뭐, 네. 그렇죠.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냐.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쁘지 않은데.”
아차 싶었는지 나를 살짝 힐끔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리리엔의 모습에 피식, 하고 작은 웃음을 뱉었다. 리산드라 없이 겪어본 바로는, 리리엔은 자신이 지금껏 연기해왔던 인물과는 정반대라 말해도 어폐가 아닐 정도로 두터운 가면을 쓰던 자였다.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리리엔은 하루를 책을 읽으며 보내곤 했는데, 그때 집중을 방해하기만 해도 쉽게 짜증을 부릴 정도로 예민했다. 원래의 성격은 차갑고 시니컬한지라 다가가기 어려운 기색을 펼쳤고, 말을 걸어도 단답으로 응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리리엔의 성향은 단둘이 있을 때 가장 강했고 다른 보는 눈이 있으면 어느 정도는 조심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리리엔에 대한 호감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럴 이유가 있기나 하겠는가? 내가 리리엔을 아낀 이유는 언니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어서였는데, 냉랭한 성격 속에서도 나는 친한 사람이라 생각하는지 나름 살뜰히 생기는 것이 무엇보다 언니를 떠오르게 했다. 또 이전까지는 서류를 보게 한 적이 없으니 몰랐던 내정 능력은 또 어떠한가. 내가 몇 시간이 걸려 겨우 처리해냈을 양의 서류를 리리엔은 쉽다는 듯이 그 일 할도 되지 않는 시간에 마무리했고, 평생 눈치를 봐온 습관이 있어서인지 하인들을 보면 그가 내 편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런 리리엔이 저리 솔직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만큼 이 자리가 편해서이겠지. 제 행동을 어딘가에 일러바칠 사람도, 지켜보고 있을 사람도 없다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리 행동할 터였다. 신뢰받는 기분은 꽤 만족스럽구나. 그리 생각하며 웃었다.
“식후 차를 가져오게.”
식사 후 차를 마셔 마무리하는 리리엔의 습관 탓에 시작했지만, 이제는 내게도 습관이 된 일이었다. 식후 차를 마시는 것. 보통 민트 계열이었지만, 정확한 찻잎은 매일 리리엔이 골라 가져오고 있었다. 우리가 식사하는 중 시종들이 차를 내려 가져오면 이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자리를 파했다.
시종이 주전자에 담긴 차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처음에는 내 잔을, 그리고 리리엔의 잔을 순차적으로 채우자 그는 내게 짧게 목례하고 자리를 떴다.
“뭐 하나? 마시지 않고.”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었을까. 멍하니 시종의 얼굴을 바라보는 리리엔의 모습이 의아했지만 가끔 리리엔은 생각에 잠겨 내 말조차 듣지 못 할 때가 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먼저 잔을 들었다. 이런 날도 많아질 터였으니까. 곧 내 약혼자가 되어 이곳에서 살아갈 리리엔은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자유를 얻을 테고, 오늘 같은 날은 끝없이 이어질 터였다. 간섭을 원하지 않고 자유를 바라는 리리엔이니까 굳이 같이 마시자며 챙겨주는 걸 더 부담스러워하겠지. 부부라는 게 그렇듯 서로 맞춰가는 수밖에.
“알리스테어, 잠시만…!”
그리고 리리엔이 다급히 만류하기도 전에 한 모금을 마신 나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곧 마무리하여 완성본으로 수정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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