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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꿈을 꿨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꿈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래, 이건 꿈이다. 자각몽. 의식한 채로 꾸는 꿈. 그러니까 꿈이긴 하지만 이건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오롯이 내 의지였다.
리엔시에. 나는 죽기 직전에서야 깨달았다. 삶의 마지막에 와서야 알았다. 내가 너를 통해 그리던 감정은 애정도, 증오도 아닌. 그저 순진한 사랑이었다고.
*
- 성녀의 권위도 땅으로 추락했어. 저런 품위 없는 사생아가 성녀라니...
- 추락한지는 오래지. 라헤니오 가문에서 사생아 여아만 성녀로 보내기 시작한 건 오래된 일이잖아?
- 그런가. 이미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성녀가 ‘추락한 성녀’였던 건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 너 때문에 다음 대의 성녀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네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이제 성녀의 죽음만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해줄 수가 없다고.
마흔여덟 번째의 성녀가, 마흔일곱 번째의 성녀가. 그리고 그 이전의 모든 성녀가 내게 그리 말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너 때문에. 네가 사랑이라는 죄업을 저질러서. 성녀는 사랑하면 안 되는 존재야. 알고 있었잖아.
─아, 그렇지. 성녀는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그건 가장 근본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람들의 죄를 제 죽음으로써 사하여주는 이는 한 사람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모든 사람을 공평하고 자애롭게 사랑하고 보듬어주는 존재로서. 그렇게 신의 자녀로서 모든 죄를 대신 안고 죽어야 한다고.
죽은 성녀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지만 다음 대의 성녀가 나타남으로써 구원은 계속된다. 그건 로나르힘의 교리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믿음이었다.
세라엘은 리엔시에를 사랑했다. 물론 처음에는 증오심과 질투로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어린아이다운 장난기도 있었다. 하나 한순간의 불장난으로 치부하기에 너는 너무 아름다웠고, 빛났고, 성스러운 존재였다. 너는 마치 성전에서 모든 이들을 구했던 그 최초의 성녀처럼 나를 위에서 굽어보았다.
이 성녀인 나를. 너는 성녀가 아닌데도, 마흔아홉 번째 성녀인 나를 네가 그렇게 바라보았다. 너는 네 자비로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 사랑에 취했다.
밤하늘 아래 별이 추락했다.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 시공간을 초월한 것 같은 풍경 속에서 나는 죽음을 직감했다. 신의 대리인이 내게 가까이 와 있었다. 머릿속에서 교리 시간에 배운 내용이 떠다녔다.
‘신의 대리인께서 성녀를 하늘로 올려보내고, 뭇사람들은 그로 인해 죄를 사함받는다...’
어느새 네가 내 앞에 있었다. 너는 그렇게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고,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네 뒤에서 비치는 달빛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너를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네가 내게 고백한다. 이번 생의 너는 나를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사랑해요!’
‘...’
‘성녀님도 저를 사랑하시죠? 알고 있어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걸.’
네 손에는 금색 가위가 들려 있었다. 잘 선 날이 달빛에 반사되어 위험천만한 은색으로 반짝였다. 눈앞에 놓인 먹잇감을 위협하듯 가위가 입을 다물었다 열며 짤깍였다.
나는 이제 반복되는 생의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너는 여전히 너였다. 아니, 이번에는 감정이 지나친 나머지 이전에 알던 네가 아니기도 했다. 내가 사랑했던 소녀는 어디 가고 화려하게 아름다운 괴물이 짧은 밀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내게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왔다.
‘성녀님! 성녀님.’
‘...’
‘왜 도망가시는 거예요? 저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날카로운 가위가 위협적으로 다시 짤깍였다. 맞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매번 너로 인해 삶을 마감했다. 그래도 그것에 만족하는 삶이었다. 다시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행복이었다.
매 삶 너로 인해 마지막을 맞이하고 다시 돌아가 너를 만났다. 그리고 사랑했다. 그런 삶 순간순간, 때때로 너는 내가 사랑했던 이의 껍질을 쓴 괴물이었다.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추악하게 일그러진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어떤 그림자.
그럼에도 나는 다시 제대로 된 너를 만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네 손에 눈을 감았고 때로는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해 다시 눈을 떴다. 그럼 내가 사랑했던 소녀가 ‘리엔시에’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마흔아홉 번째 성녀, 그리고 마지막 성녀 세라엘은 최초의 성녀를 사랑했다. 세라엘 이후 쉰 번째 성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성녀가 추락사한 이후 두 번째 성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난한 성전이 이어지는 동안 어린 소녀를 제물로 삼아 구원을 찾던 종교는 멸망한다.
사실 그건 종교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대중의 믿음이 모여 키운 하나의 현상이 종교의 틀을 뒤집어썼을 뿐. 사람들은 구원받기를 원했고, 그 희생양이 약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섭리였다.
세라엘은 믿고 있었다. 내가 사랑이라는 죄업을 저지른 첫 번째이자 마지막 성녀가 되면 더 이상 죄 없는 자들의 희생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제 죽음으로써 무언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간 전대 성녀들의 숱한 죽음은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나는 달라. 성흔을 가지고 있는 ‘진짜’ 성녀니까.
사실 회귀는 성녀인 세라엘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 아닌, 최초의 성녀인 리엔시에의 능력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지만. 어쨌든 시간은 되돌아갔다. 그리고 세라엘은 믿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죽음을 맞이한 성녀는 내가 마지막일 거라고.
그랬다. 역대 모든 성녀는 신의 대리인에 의해 죽거나 살해당했다. 그들은 모두 성녀를 증오하거나 사랑한 이들이었다. 짧은 인생을 반복하면서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건 누군가의 희생으로 쌓아 올린 탑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사실. 나는 무너질 사랑을 하고 있었다.
‘성녀님?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시죠? 저는 이제 시작인데.’
그래, 이제 시작이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이 지난한 반복을 끝내고 더 이상 신도 성녀도 없는 세상에서 너와 재회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염원을 담아 너를 향해 웃었다.
──차가운 금속이 내 가슴을 꿰뚫었다. 동시에 나는 믿었다. 내가 사랑한 것이 ‘리엔시에’라는 어느 외톨이 소녀여서 다행이라고. 그녀와 먼저 친구가 되자고 말해서 다행이었다고. 리엔시에의 첫 번째 친구가 될 수 있어서 기뻤다고.
이제 지난한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세계는 나아갈 것이다. 더 이상의 반복은 없다. 이게 마지막이다. 비천한 성녀의 육신이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다. 피 묻은 가위가 바닥에 쇳소리를 내며 내동댕이쳐졌다. 날 끝이 향했던 곳은 붉게 펄떡이는 심장 한가운데였고, 흉기를 쥔 이의 표정은 달빛 아래 역광으로 감춰졌다. 그 누구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
어떤 세계선. 세계는 반복을 멈추고 정상 궤도를 되찾았다. 이제는 마흔아홉 번째 성녀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딱 하나, 수복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최초의 성녀였던 것이 눈물을 흘렸다. 왜 너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제야 생각이 났다. 내게 첫 번째 친구가 되어주겠다던 너를 기억했다. 리엔시에는 제 손으로 사랑하는 이를 묻었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자학임에도.
세라엘. 그러니까... 너를 다시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이제는 너무 많이 말해서 낡아빠진 말이지만, 그래도 몇 번이고 다시 말할 거야.
사랑해. 정말로.
너무 늦게 깨달았다.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비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뺨이 뜨거웠다. 비로소 남은 건 감정에 매몰된 비루한 여성 하나였다.
다시 손을 잡고 싶어. 계속 같이 있고 싶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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