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성녀들

5화. 발데마인에서 (1)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리엔시에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사랑은 어찌나 대단한지, 이미 발데마인 교내에까지 허다하게 퍼졌을 정도였다.

“저것 좀 봐. 또 여기서 성녀님 소식이 실린 호외 더미를 들춰 보고 있어.”

“유레이토 영애, 지난번에는 대신전에 몰래 침입했다가 신관들한테 쫓겨났대.”

“어머나, 유력가의 자제가 무슨 그런 망측한 짓을.”

“공작님께서는 저런 걸 아시려나 몰라.”

학교 도서관.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어느 오후. 입학식이 얼마 전이었건만 오늘은 학교 창립일. 그로 인해 수업이 없어 학생들이 재량껏 쉴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리엔시에는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는 학생들의 속닥임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 종이 더미를 뒤졌다. 바스락.

지금 읽고 있는 건 이번 주의 가십거리들이 실린 호외였다. 이 학교 도서관은 매일 발행되는 호외나 신문들을 가져다 놓았다. 그래서 굳이 시내에까지 나가 사 올 필요가 없어 편했다. 이번 호에는 마흔아홉 번째 성녀의 출생의 비밀을 낱낱이 밝힌다는 명목으로 온갖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문들을 모아 놓은 이야깃거리가 실려있었다. 그러나 리엔시에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탐독했다.

역시 첫 만남 때보다 많이 성장했다… 그 낡은 오두막에서 만났던 어린아이는 어디 가고 조금 성장한 모습의 청소년이 삽화로 그려져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내용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바람에 리엔시에는 종이 더미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리엔시에 영애.”

“...네?”

이름을 부른 목소리의 주인은 낯이 익은 붉은 머리의 소녀였다. 그녀가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멀뚱히 앉아있는 리엔시에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거. 아까 강의실에서 떨어트렸어요.”

“...아.”

그녀가 내민 것은 하얀 손수건이었다. 레니발렌이 자신의 생일날 선물로 주었던. 딱히 중요히 여기지 않아서 대충 지니고 다녔었는데 어느 날 없어졌더랬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굳이 제게 잃어버린 물건을 가져다줄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다. 리엔시에는 웃으며 자신에게 건네진 손수건을 받아서 들었다.

“감사해요. 그러니까... 음.”

“...내 이름, 또 잊어버린 거예요?”

아까보다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에 언짢은 것이 눈에 선했다. 사실은 이름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성으로 불러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으음. 콜린... 영애 맞죠?”

“베레니체예요. 가문의 성 말고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리엔시에 영애. 다음번에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재미없을 줄 알아요.”

“...”

오해였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붉은 머리칼이 흩어졌다. 한낮의 별빛이었다. 리엔시에는 그 빛을 눈으로 좇으며 저 별빛이 성녀님 머리 위에도 뿌려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보다 더 값진 것을 원하겠지.

리엔시에는 세라엘이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이 속물적인 것에 한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세라엘은 독특한 것을,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을, 귀한 것을 좋아했다.

‘...그러니 나는 세라엘의 마음에 꼭 드는 존재일 거야. 나 같은 괴물은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니까.’

멀어지는 베레니체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어느새 해가 조금 기울었다.

*

- 오늘은 신전에 안 왔네, 그 혼혈.

- 더러운 혼혈.

- 공작의 후계자라던데?

- 그럼 그 애가 다음 대 유레이토 공작이 된다는 말이야? 세상에나. 공작도 너무하지.

- 자기가 괜찮다고 남들도 괜찮은 게 아닌데 말이야.

- 그 애가 사회에서 받을 시선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가주로 점찍다니. 너무해.

- 괴물은 세상에 나오면 안 돼.

- 맞아. 이종족은 저기 저 먼 제국에나 가라고 해. 그곳에서는 환영받을지도 모르잖아? 키득.

“...시끄러워.”

세라엘은 무릎 위에 누여서 읽고 있던 무거운 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떠들던 것을 멈추고 포르르 저 먼 하늘 위로 날아가 버렸다. 수다스러운 정령들이었다. 그 부리를 잘라버리고 싶을 만치 말이 많았다.

날이 좋았다. 그러나 성녀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오늘은 그 애가 대신전에 찾아오지 않았다. 늘 어떻게든 정문을 통과해 잠입해서 자신을 보러 오는 소녀였는데, 오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새 정령들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웃음밖에 없었다.

뭐가 문제였지. 지난번에 수녀들에게 스토커가 생긴 것 같다고 에둘러서 얘기했던 게 화근이었나. 아니면… 생각에 잠긴 채로 신전 뒤뜰에 내려앉은 오후의 햇살을 만끽했다.

서운함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괘씸했다. 날 사랑한다면서 진심이 아니었나 보지? 세라엘은 독특한 색의 눈동자와 동공을, 뾰족한 귀와 밀 빛 머리카락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가 응당 가져야 할 존재였다.

성녀가 된 이후로 가지지 못한 것은 없었다. 천대받는 사생아라는 눈총을 받아도 그들은 제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신전의 수녀와 신관 중에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자도, 하찮게 여기는 자도, 성녀로서의 예의만 갖추는 자도 있었다.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가졌던 모두 이번 대의 성녀에게 나름 헌신적이었다.

리엔시에 솔린 유레이토. 유레이토 차기 공작이 될 후계자. 그것에 대해 참 말이 많다 들었다. 귀선유전으로 이종족의 외모를 타고난 것이 바로 문제였다. 사실 따져보자면 어느 가문이든 조상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이종족이 하나둘쯤은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 옛날 고대 황금기에는 이종족이 흔했으므로.

그러니까, 리엔시에라는 아이는 그냥 운이 없었던 것이다. 운이 없어서 남다른 외모를 타고 나야 했다. 괴물로 불리는 소녀가 공작가의 직계란다. 특이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리엔시에를 처음 만났던 어린 날의 순간, 세라엘은 직감했다. 아,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것이었구나. 내게는 그런 순간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괴물을 사랑했다. 아니, 리엔시에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 그러나 성녀는 사랑해서는 안 되었다. 성녀가 사랑하는 것은 금기였다. 그러므로 세라엘은 죄인이었다. 금기를 저지른 신의 자녀.

사실 세라엘은 성녀치고는 무도한 짓을 많이 벌여오기는 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전에서 친 사고들 하며 신관에게 부린 패악들, 신전을 몰래 빠져나갔던 일, 사리사욕을 탐해 재화를 모았던 행위, 성녀라는 지위를 이용해 대중의 환심을 사려 했던 여러 행동까지.

성녀란 고결하게 그 자리만을 지키며 뭇사람들의 종교 상징이 되는 존재였다. 세라엘이 벌인 일들은 성녀가 감히 행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세라엘은 신을 증오했다. 자신을 사생아로 태어나게 한 신을 저주했다. 그러나 동시에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냥, 그런 것이었다. 공작가의 장녀로 태어나 편한 인생을 살아왔을 리엔시에를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종국에는 사랑해버린 것과 같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 세라엘은 욕심이 많았고, 자신의 태생을 미워했으며, 동시에 사람들의 존경을 독점하고 싶었다.

- 괴물이다!

- 괴물 발견! 저 혼혈, 결국 오늘도 왔네.

- 가여운 아이. 수녀에게 들켜서 혼나고 있어.

- 공작가의 영애를 어떻게 함부로 혼내? 또 주의만 주고 돌려보내겠지.

어느새 다시 다가온 새들이 머리맡에서 시끄럽게 지저귀었다. 세라엘은 책을 벤치에 올려두고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은 꼭 그 애의 얼굴을 봐야겠다. 이제 곧 중도 입학하게 될 테니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멀리서라도 잠깐이나마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한 괴물의 얼굴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왜 늦었는지, 이유도 알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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