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쉴서월] 로판1
*자컾 로판에유 글입니다! 여러 편에 걸쳐 나올 예정입니다. 로판 설정을 많이 잊어먹어 어색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로판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 "영애"는 "레이디"로 바꾸어 적었습니다. 재밌게 읽어 주세요!
제국은 가장 많은 승전기념일을 가진 나라였다. 역사 속엔 무수히 많은 혈전과 승리가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몇을 추려서 휴일로 정했음에도 두 손으로 전부 꼽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몇 승전기념일은 단순히 공휴일로 치부되며 대수롭지 않게 흘러갔고, 애국심이나 앙심이 특별히 깊은 제국민이 아니고서야 그 많은 날짜의 의미를 모두 외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4월의 승전은 그 결이 달랐다. 한때 비옥한 토양과 얼지 않는 항구와 지하의 귀금속을 품고 있던, 이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지된 한 국가를 복속시킨 날짜였다. 제국민들의 축제가 일주일간 진행되었고, 황궁에선 동이 틀 때까지 연회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홀의 입구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황제 폐하의 제1기사단입니다!"
마법이 육중한 문을 간단히 열어젖혔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금관악기의 울림이 터져 나왔다. 금사로 수놓은 새카만 제복, 제1기사단을 상징하는 브로치. 이 제국에서 제1기사단을 대표할 수 있는 단 두 사람이 홀에 입장했다. 홀이 술렁였다.
메건 로이스. 나이가 지긋한 노장이었으며, 연배와 어울리지 않는 거구의 기사였다. 긴 세월을 산 사람이 주위에 두르고 있는 특유의 고요한 공기가 그에게서도 느껴졌으나, 한편 눈빛에는 수없이 많은 전투를 거쳐 온 기사의 단단한 기세가 번뜩였다. 귀족들은 그의 얼굴을 익히 알았다. 다만 그 옆의 부기사단장이 의문을 야기했다.
"로이스 가의 메건 님이군. 옆은 누구지?"
"소식이 느리군. 최근 부임한 부기사단장 서월 아닌가."
"성이 없지 않나? 가문도 없는 자가 어떻게 우리 제국의 1기사단에?"
"지난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지. 왜, 타국의 흑마법사가 국경에서 날뛰었던 그때."
"그것보다도 전 부단장 제이 카터가 전사한 게 크지. 황녀 전하도 쇠하신 지금 같은 시기에 이런 혼란이…."
"쉿, 그런 말은…."
마냥 곱지 않은 시선이 비밀스레 오갔다. 한편 서월은 무리에 관심을 두는 대신 구두의 뒤축을 들어 살펴보며 딴청을 피웠다. 오늘 같은 기념일에는 제국민들에게 국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신문이나 영상구가 아닌 실물로 기사들을 볼 수 있도록 대로를 따라 행렬을 진행했다. 윤이 나는 검은 단화는 싸울 때와는 다르게 깨끗이 관리한 티가 역력했으나, 제국민들이 가는 길에 아끼지 않고 뿌렸던 생화가 검게 시들어 밑창에 붙어 있었다.
"행실을 바르게 하도록, 부단장."
"네~ 알겠습니다."
메건 로이스가 집중하지 않는 서월을 지적했고, 들은 쪽은 선선히 수긍했다. 애초 의복이 단정치 못하게 된다거나 하는 보여지는 부분은 서월에겐 아무래도 관심이 없었다. 사실 귀족들을 바라보며 상대하거나 상대하지 않을 사람들을 고르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때 우연히 의식한 게 구두였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메건 로이스는 자리를 떠나 귀족들에게 향했으며 서월도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므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반면 서월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측도 있었다. 이번 주의 연회에 모이는 건 정계와 엮인 귀족 뿐만은 아니었으므로. 많은 귀족들이 모이는 날을 틈타 짝을 찾으려는 혼기가 찬 남녀 역시 그 수가 적지 않았다. 총천연색의 프릴과 레이스와 리본이 사각대는 곳을 바라보면, 젊은 여자들이 입가에 부채를 대고 팔락이며 분주한 물새처럼 속닥거리고 있었다. 목소리와 입 모양을 숨기는 덴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기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경을 한 몸에 받는 이들이다. 하물며 부기사단장이니 그 권력이 나쁘지 않다는 계산도 있었고... 그렇지만 사실 그뿐이었다면 이토록 많은 시선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레이디들은 가능했다면 오페라글래스를 꺼내기라도 했을 것처럼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훤칠한 키와 백자를 닮은 피부. 목을 살짝 덮어 굽이치는 머리칼은 밤하늘과 같은 오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같은 색의 날개는 또 어떠한가? 그리고 입매에 걸린 유려한 미소도…. 형식적인 표정이란 걸 알아보지 못할 만큼 감정을 감지하는 데 투박하지 않았으나, 그런 부류의 산뜻한 가식은 제국에서 흠이 되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때 특별히 용감한 한 레이디가 부풀어 있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막 자리를 옮기려는 것처럼 몸을 돌렸던 서월이 멈춰 섰다.
"서월, 절 아나요?"
말을 꺼낸 이는 서월의 가지런한 속눈썹이 깜빡이는 걸 보았다. 이윽고 그림처럼 웃는 모습도.
"글쎄요? 저희, 초면인 것 같네요? 성함을…."
"모르신다면, 여기 손수건을 받아주세요. 제가 직접 이름을 수놓았거든요."
서월의 말이 끝나기 전, 레이디가 그의 손목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검은 장갑을 낀 것이 뒤늦게 눈에 띄었다. 손가락에 닿는 손목이….
'왜 차갑지?'
…평범한 사람보다 서늘했다.
탁, 잡은 손을 내치는 손길이 냉정했다. 서월에게 다가왔던 레이디는 당황하여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색할 정도의 침묵까지 가기 전, 서월이 그 손에 손수건을 도로 쥐여주었다.
"고마워요. 그렇지만 다음 기회에…."
레이디는 눈을 깜빡이다, 뒷말을 제대로 듣고 기억할 정신도 없이 황급히 돌아갔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서월 역시 자리를 떠났다. 누군가 그의 표정을 눈에 담기 전. 불행일까, 혹은 다행일까? 답해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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