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쉴서월] 로판2
서월을 뒤로 하고 도망친 레이디는 미아 샬린느. 깃털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혓바닥을 질근 씹었다.
샬린느 백작가. 현재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제국이 건국될 즈음부터 수도에 뿌리를 두고 있던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삼녀 미아는 제국 사교계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었다. 가문의 후광을 업은 것도 있었으나 타고 난 외모를 필요할 때 쓸 줄 알았기에 그랬다. 도톰한 입술과 동그란 눈동자, 인형처럼 가는 손가락과 자그마한 발. 사람들은 미아 샬린느를 귀애했다. 아슬아슬하게 법도를 넘나들며 당돌하게 구는 것도 나이에 맞는 명랑함이라 참작해 줄 만큼.
미아 샬린느를 원하는 이는 많았다…. 본인도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당장만 하여도 미아 샬린느는 멀리에 앉은 화공이 자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혹 대중들에게 제 실책이 여과 없이 드러날까 귀족들이 경계하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사교 행사에서는 영상구 사용을 지양하였는데, 우회적으로 무도회 현장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화가들이었다. 가장 화려한 승전기념일의 가장 화려한 연회, 그것도 황궁에서 주최하는 행사. 화가가 없는 것이 이상했다. 보통 유명하고 아름다운 인사들의 초상화의 수요가 더 높았기에 화가들은 물감을 낭비하는 대신 인기가 많은 사람을 골라서 그렸다. 그러나 미아는 탁, 큰 손짓으로 부채를 접어 왼뺨을 건드렸다. 화가는 거절의 의사를 읽고 물러났지만 미아는 날카로워진 신경을 통 갈무리하지 못했다.
미아는 제 인형 같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온통 헤집지 않기 위해 버티기에도 버거웠다. 하늘하늘한 레이스 장갑이 혹 찢어질까 주먹조차 쥐지 못하고, 부풀어 있는 드레스 자락에 손을 파묻은 채로. 온 사방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화가도,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은근한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는 신사도, 입가를 가리고 웃는 레이디도, 전부 다!
‘왜 나를 거부해?’
화살은 서월에게 돌아갔다. 조금 거리를 좁혔기로서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매몰차게 손을 털어내다니. 주변의 관심을 곧 명성으로 삼는 사교계의 레이디에게 이런 타격을 주다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출신이 불명이고, 부기사단장이 된 게 최근이라 입지도 굳히지 못한 기사가 자신을 함부로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이면의 지저분한 계산은 이미 잊은 뒤였다.
“레이디 샬린느….”
“…아, 여러분!”
또래의 레이디들이 살금살금 다가왔다. 미아 샬린느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이에 기분이 나아진 미아는 표정을 부드럽게 하며 사뿐사뿐 그들과 합류했다. 그래, 잊는 것이 편했다. 타인의 허물-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라 내친 것을 그런 단어로 부를 수 있다면-을 덮어주는 게 좋다는 너그러운 의도는 아니었다. 미아는 그저 한 가지를 두려워했다.
‘손목이… 차가웠지.’
팔뚝의 솜털이 오소소 서는 기분이었다. 검은 장갑이 채 가리지 못한 손목에 손가락이 스쳤을 때 느껴졌던 서늘한 피부…. 살아 있는 사람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체온을.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레이디 샬린느.”
“레이디의 드레스도 예뻐요. 꼭 나비 같네요!”
사교계의 대화는 매번 비슷한 말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틀에 박힌 일상성이 도리어 안정감을 불러왔다. 그래, 어디서 왔을지도 모를 기사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가 중요한가? 나는 여전히 사교계에서 귀한 사람이고, 연회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걸…. 남들보다 차가운 피부는, 뭐. 징그럽긴 했지만 신경 쓸 건 따로 있지. 미아 샬린느가 속으로 되뇌며 생글생글 웃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후, 연회가 파한 뒤. 미아는 조금 전의 일이 어느 모임에서도 언급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큰 화제거리가 되어 줄 희생양이 필요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여자가 샬린느와 친구들의 방향으로 걸어왔다. 흑색에 가까운 남색 드레스 밑단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보석 가루. 은빛 허리띠를 높이 채우고 같은 색의 나뭇잎 모양 핀을 고정한 모습. 단발로 자른 머리카락이 연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샬린느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사교계의 다른 여자들에 비해 큰 보폭으로 걷는 것과 주위의 모든 것이 낯선 듯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는 것, 비록 아름다운 옷이었지만 풍성한 프릴과 리본을 즐겨 다는 수도의 스타일과는 다르다는 사실 전부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입을 떼기 전. 샬린느가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머… 허밍버드. 이런 자리에서 뵙네요? 그곳에선 짐승 피를 마시고 그 가죽을 입는다고 전해 들어 걱정했는데, 격식 있는 옷이 불편하진 않으신지.”
샬린느는 악의적인 즐거움을 품고 답변을 기다렸다. 상대, 에쉴 허밍버드의 연녹색 눈동자가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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