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과 현

책임으로 일상을 연주하다.

활과 현이 마찰하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이 공간안에 바이올린과 저만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러다 활을 내리면 그제서야 박수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와 잘 세팅된 머리가 조금 흐트러지는 것도, 저를 강하게 비추는 조명과 경외에 찬 사람들의 시선들도 좋았다. 바이올린을 잡고 연주할 땐 무아지경으로 그 소리로 빠져드는 것 또한 제게 쾌감을 주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동안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 들려 허세부릴 필요도 없고, 힘들게 알바를 전전하지 않아도 됐으며, 죽도록 노력하지 않아도 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않을 단 하나의 수단이 되어주었다.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잡으면서 동아리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노력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활을 움직였다. 그러면 그 순간만큼은 마법과 같이….

“호섭아, 바이올린을 전문적으로 해보는건 어떠니?”

그러나 이제는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실패와 기회에는 비용이 들었다. 고등학생이라는 늦은 나이에 잡기 시작한 악기로 성공을 바라본다는 것은 실패라는 비용을 필요로한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바이올린을 선택한다면 치루게 될 값은 제가 소중해 마지않는 일상이 될 것임을 알았다.

학원은 커녕 치킨한마리 사주기도 부담스러워하는 부모가 지긋지긋하면서도, 부족한 형편과는 관계없이 저를 향한 애정을 알고 놓지못했다. 겨울 날 몸 부르르 떨면서도 나눠먹는 아이스크림을, 여름날 선풍기 바람에 배가 차가워지면 조용히 쓰다듬어 주던 손의 온도를, 떨어진 낙엽이 굴러가는 소리에도 함께 웃었던 일상을 제 손으로 버릴 용기가 저에겐 없었다. 제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며 할 수있다고 이야기 해주는 이들에게는 역설적으로, 그 모습으로 자신은 바이올린을 포기할 각오를 했다. 당신들이 제게 빛나는 일상이 될 수록 저는 그 일상을 놓지 못할 것이었다. 저를 놀리는 목소리, 어깨에 걸쳐지는 팔의 무게, 다정한 시선 따위를 떠올린다. 그런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아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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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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