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실바람
“있지, 반드시 창대하고 숭고한 사상을 가진 자들만이 이 세상을 구하는 건 아냐.”
청년의 눈이 과거를 더듬었다. 그 또한 제가 이런 거창한 말을 쉽게 풀어하는 재주나, 유려한 미사여구를 붙여 비유하는 재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솔직함의 재주마저 없지 않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겠다. 꾸미어 내밀 수 없다면, 있는 그대로 내밀면 되는 법. 그가 목소리 낮추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프라툼 아분단티아의 마을 하나가 모조리 사그라들었을 때,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 중에서는 우리 마을의 토마스 촌장님도, 조이 아주머니도, 우리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있었어.”
“그런 사람들은 영웅이 되지 못하는 걸까? 아니잖아.”
그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 한때 숨 쉬어 존재했던 사람들이 모조리 스러진 일을 입에 담는다. 참극이었다. 한낱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비극이요, 그야말로 재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는, 영웅이 되지 못하는 걸까?”
“아니잖아!”
타인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자를 영웅이라 부른다면, 농기구와 붕대를 들고 까맣게 물들어 버린 이웃마을 앞에서 애도하던 이들은 분명 영웅이었다. 결국 그들이 살린 이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그랬다. 알레이 에버그린은 이 이야기를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그들이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마을을 지키는 방벽과 문을 둘러 세웠으며, 이후에는 어떻게 세계수의 답을 오매불망 기다렸는지. 그 마을에서 난 어린 목동이 세계수의 부름에 응답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세계수의 부름에 응답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겠노라고, 수줍게 적어낸 편지의 답장으로 받은 것은 토끼풀로 봉투를 묶은 쪽지였다. 그 안에는 할머니의 필체로 청년의 결정을 존중한다 적혀 있었다. 그 누구보다 어머니 대지에 도움되기를 갈망하였으나 결국 이루지 못한 꿈이 묻어나오는 간결한 문장.
그것을 기억하므로, 기꺼이 마음의 소중함을 역설하는 어린 용기사가 뺨을 붉히며 웃었다. 빛깔 다른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뒤흔들려 섞인다.
“그러니까, 나는 그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지키고자 하는 마음. 구하고자 하는 마음.”
“그런 마음만으로도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어. 우리가 보여주면 되잖아!”
자그마한 웃음소리. 응, 시간은 길다. 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도, 소박하고도 강인한 마음을 가진 두 청년이 서로를 알아갈 시간도.
알레이 에버그린은 다시금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구릉과 강변을 낀 아크사버그 마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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