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 왕국의 공주는 아버지를 선

일처다부제 왕국의 공주-8

어른들은 종종 이상한 소리를 한다

웹소설 by 도락가
12
1
0

"그... 싸우면 무서워요. 큰 아저씨, 저 이제 나갈 참이었어요. 이만 갈게요. 광대 아저씨도 같이 가요."

"그래, 애 앞에서 그러는 거 아니지, 훌라그."

광대왕은 이겼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큰왕의 안색은 대비되듯이 더더욱 붉으락푸르락했다.

"잠깐."

그는 내 손을 붙잡고 자리를 서둘러 뜨려는 광대왕을 막아 세웠다.

"어디를 가는데"

"어..."

"내 방에 가서 우유 마시고 동화책도 읽고 할 건데, 그지? 아이는 내가 타준 우유 좋아하거든."

좋아하긴 무슨. 그리고 꿀 탄 우유라면 첫날 한번 마시고 다시는 먹은 적 없다. 이 인간, 그새 찻숟가락을 어디 뒀는지 완전히 잊어버렸거든. 나중에 내가 천장 선풍기 위에 놓여 있는 걸 발견했는데, 일부러 말 안 해주고 있다. 대체 어떻게 숟가락이 천장 선풍기 위에 있는 걸까.

"동화책이라면 여기 훨씬 더 많다. 아주 유익한 것들로."

"와아, 잘됐네. 너 많이 읽으면 되겠다. 아이 동화책은 내가 읽어줄 거거든. 내가 읽어주는 게 제일이라며, 그지?"

두 왕은 이제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든다.

***

내가 여기서 뭘 하고있는 거지.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는 두 왕과 뒷뜰 소풍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 왕들은 정말 할 일이 없나?

"아이, 이거 입어봐!"

"센스라고는 없군. 누가 보아도 이것이 낫다."

두 어른은 소풍에 앞서 내 옷부터 고르고 있다. 

이제서야 알게되었는데, 열어본 적 없던 내 방 침대 옆의 커다란 문은 바로 옷장이었다. 아침마다 누군가 가져다주던 옷이 여기서 나오는 거였구나.

이걸 옷장이라고 해야 하나 의아하긴 하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인데, 옷 방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이런 옷장이라면 갇히더라도 꽤 넉넉할 것 같아 안심이었다.

"이 옷들이 다 제 거라고요? 누가 준비한 건가요?"

"내가 철저한 준비와-"

"대부분은 천둥왕이. 항상 딸을 갖고 싶어 했거든, 걔는. 네가 있는 걸 알기도 전부터 준비해온 거야.

"준비한 건 나다."

"뭉크밧이 사달라고 말해서 결제만 한 거잖아."

다 큰 어른의 투닥거림이 멈출 줄을 몰랐다.

"이거 입어봐. 여기에 망토 걸치면 멋있겠다."

"이쪽의 옷이 더 질이 좋다."

광대가 내민 것은 밑단에 작은 방울들이 달랑거리는 요란한 옷. 반짝이는 자수가 박힌 꼴이 광대왕 본인 옷과 꼭 닮았다.

큰왕이 고른 것은 커다란 천을 요령 좋게 접어서 걸치는 옷이었는데, 색은 같지만 질감만 조금 다른 실로 무늬가 짜여있어 빛이 비출 때마다 문득 문득 잔꽃 그림이 보였다.

"예쁘지, 나랑 맞춤복이다."

"그걸 입고 바깥 놀이를 어떻게 하나."

"방울이 달려있잖아! 이걸 입고 뛰어다니면 재밌을 거야. 네 거야말로 멋대로 움직이면 다 흐트러지게 생겼네."

광대왕은 옷을 쥔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짤랑짤랑짤랑 소리를 내면서 물었다.

"너는 어때, 아이?"

그제서야 내 의견을 물어보는 구나.

"저도 잘..."

여기서 한 명의 편을 들고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까부터 시야 한 쪽에 떠오르던 글씨를 다시금 주목했다.

[큰왕, 친밀도 (1/100). 신뢰도 (9/100).]

[광대왕, 친밀도 (21/100). 신뢰도 (10/100).]

큰왕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광대왕의 머리 위에도 비슷한 주석이 보이고 있었다. 아니,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었으나 만약 광대왕에게조차 바보 취급을 당한다면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수치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일단 숫자가 적은 큰왕의 편을 들어둘까.

"회색이 좋아요."

"안목이 훌륭하군, 역시. 네 딸은 아닌가 보구나."

"어째서? 이게 더 예쁘잖아. 색도 더 많고 무늬도 더 많아! 공주님 옷답지 않아?"

"센스 없는 아저씨가 최선을 다해서 고른 공주님 옷 같아요."

"아저씨 아니야."

큰왕은 어울리지 않게 기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9'였던 숫자는 '11'으로 바뀌어 있었다.

***

"-그래서 큰왕 아저씨 도와주러 간 거야? 장하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안 도와줘도 돼, 이 아저씨 자기 서재에 누구 들어오면 발악을 하거든. 나보고 한 번 더 기어 들어오면 눈구멍에 책갈피를 꽂아버린다고 했었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아, 했었군. 음, 나는 내 물건이 흐트러지는 걸 싫어하거든."

짧은 침묵 후, 큰왕은 아주 대단한 결심을 한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뭐...언질만 주거라. 괜히 숨어들다가 다치지 말고."

"점수 따려고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싸물거라."

"감당할 수 있겠어? 내가 입 다물면 네가 대화 이어나갈 수 있어? 응? 나 진짜 입 다문다? 침묵 속에서 둘이 산책 잘 해볼래?"

"...점수 따려고 발악을 하는 건 네놈도 마찬가지겠지."

"응, 나 완전 발악 중이야, 왜? 뭐? 나 아이한테 완전 잘 보이고 싶어서 완전 열심히 아부하고 있는데? 왜? 세상에, 너는 아이한테 잘 보일 노력도 안하고 있었어? 너무하다. 그치, 아이야?"

큰왕은 말로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님을 새삼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우쭐해진 표정의 광대는 더더욱 시끄럽게 재잘거리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이야깃거리로 삼기 시작했다.

날씨, 계절꽃, 건물들, 심지어는 모래먼지까지. 안뜰을 가로지르는 호수를 지나갈 때 즘에는 당연히 호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해서 생긴 게 저쪽의 호수야. 지금은 건기라 저런 꼴이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꽤나 예쁘지. 안쪽에는 가재가 사는데 냄새는 나지만 튀기면..."

"저 어린아이는 뭐에요?"

"어린 아이?"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뜰을 산책하는 손님은 우리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터 어린 아이와 양산을 든 젊은 여자가 나란히 호수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아... 챠가타이네."

"네 동생이다."

"동생이요?"

이쪽을 눈치챈 건지, 양산을 든 여자가 고개를 돌려 인사를 올렸다. 어린 아이 역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밝게 웃으며 뛰어왔다.

올리브빛 피부색에 조금 쳐진 눈. 천둥왕과 꼭 닮은 아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다. 산책 중인가?"

"호수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것 같길래 살펴보고 있었어요. 올해는 비가 늦어서 큰 일이네요. 큰왕 님이야말로 무슨 일이세요?"

"서재 조사가 막 끝나서. 조금 산책을 하고 있었다."

챠가타이는 아주 귀여운 아이였다. 천둥왕을 닮아 코가 곧고 높았지만 끝은 어린아이 답게 둥글고, 마찬가지로 천둥왕을 닮아 커다란 성량도 목소리가 고우니까 그저 또랑또랑하게만 들린다.

나는 어린이들에 대해서라면 조금 안다. 여섯 살 무렵부터 고향집 집주인 부부네 아기들의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책을 읽어주고는 했으니까.

그 때 보았던 아이들과 비교하면 챠가타이에게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왜 아직도 세살배기처럼 말하지?'

챠가타이가 내뱉은 문장은 사실 '크낭님이아말루 무승 일이새요?'에 가까웠다. 단순히 혀가 짧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크-발음은 잘만 하면서 오히려 단순모음이나 니은 받침은 심하게 뭉게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린다.

"아이, 전에 내 방에서 잠깐 얘기한 적 있지? 너 동생 있다고. 얘가 걔야, 바위왕 형님네 애 챠챠. 여덟 살이니까 너보다 두 살 어리지."

"안녕하세요."

꼬마아이는 안넝하데여, 하고 발음했다.

동생이라고! 나는 반가워 껑충 뛸 것만 같았다. 혈육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동생인 줄은 몰랐는데. 동생이라. 내가 먹이고 씻기고 재워줘야 하는 주인집 아기가 아니라 정말 내 동생이란 말이지.

기쁨과 동시에 더더욱 아이의 이상한 발음이 걱정되었다. 여덟 살이라니. 다섯 살을 넘었는데도 저런 발음이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느껴졌다. 나중에 상처 받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얘기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큰왕 님, 아바... 아빠가 그랬어요, 서재에서 뭐 찾은 거 있으면 전해 달라고."

"이렇다 할 찾은 것은 없다. 뭐, 일단 저녁 먹기 전에 한 번 들린다고 전해 주거라."

"천둥왕이 불러요?"

내가 대화에 끼어들자마자 잠시 적막이 흘렀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말수가 적던 광대왕은 꼬맹이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아니, 아니야! 천둥왕이 아니라 바위왕이 부른 거야. 저 애는 바위왕 애라니깐."

"아, 진짜요? 천둥왕을 꼭 닮았-"

반지로 가득찬 커다란 손이 입을 턱 하니 막았다.

"응, 응. 바위왕의 아이야. 그렇지?"

"...네에, 우리 아빠는 저어쪽 궁에 살아요."

그런 거구나.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 했다.

엄마가 하나에 아빠가 여럿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긴, 그냥 가정도 아니고 왕궁에서 한 번 '정해진 아빠'를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겠지. 아무리 자라면서 '진짜 아빠'가 누군지 깨달아 버려도.

새삼스럽게 내 앞에 놓여진 선택지를 얼마나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지 실감했다.

'난 엄마를 꼭 빼닮아서 다행이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저기, 큰왕 님, 아빠가 이틀 전부터 찾고 계셨어요. 괜찮으시면 바로 만나주시지 않겠어요?"

"만나주시지 않겠다."

"그치만..."

"나는 지금 아이와 시간을-"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덩치 큰 남자의 인성을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이 아저씨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싶었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부탁하고 있는데 먼저 도와주겠다고 말하지는 못할 망정.

"아니, 나는 지금 너와..."

"애가 도와달라잖아요."

"그래, 애가 도와달라잖아, 쓰레기야."

큰왕은 잠시 뭐라고 외칠 듯이 아랫입술을 꾸욱 다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다. 대신 너희 둘도 바로 들어가도록."

"네."

"싫은데."

"아니면 나중에 나에게만 따로 시간을 내어 주거라. 너와는 더 토의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

큰왕은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의 작은 동생과 함께 사라졌다. 귀여운 동생은 떠나기 전에 나를 소심하게 껴안더니 고마어요, 하고 속삭였다. 

챠가타이는 키가 조금 작아서 팔이 내 허리 위에 닿는 정도였는데, 조그맣고 뜨거운 몸이 마치 작은 강아지 같았다. 이게 바로 손아래동생이라는 거구나.

나는 뿌듯하게 떠나는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어, 아이야. 저거 네 거 아니야?"

감흥에 젖어있으려는 나를 광대왕이 불러 세웠다.

"네?"

"저거. 떨어졌다."

부름을 듣고 뒤돌아본 곳에는 천주머니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내 수첩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앗. 언제..."

끈이 그새 풀린 것일까? 나는 허리춤을 반사적으로 더듬었다. 그러나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던 부드러운 가죽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서 풀린 걸까,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어라... 어..." 

고작 몇 시간 전에 받은 일생 최초의 선물은 어이 없이 사라져 있었다.

전편 보기: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