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 해부 - 플래퍼, 그리고 중산층의 등장 (2)

원래는 푸코의 이론에서 파생된 젠더 페미니즘 얘기부터 하려 했는데 줄창 철학 얘기만 했다간 도망칠 것 같아 일단 가볍게 시간선 따라 가며 20년대의 플래퍼부터 얘기하고 지면이 된다면 50, 60년대 문화적 특성까지 다루겠다. 누군가는 아마 미국의 대중문화가 왜 중요하냐 싶을 거다. 근데 현대 대중문화는 그 기원이 대체로 미국이고 가뭄에 콩나듯 미국발이 아니어도 미국 영향을 어마어마하게 받았거나 하니까 미국 얘기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포기하자.

애초에, 한국 전쟁 종전이 1953년이다. 한국 사회가 일본 사회 비슷하게 따라간다고들 하지만 그 일본 사회도 미국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원류를 따지면 저 쪽이다. 게다가 어떻게든 일본식으로 바꾸고 보는 일본에 비해 한국은 그런 경향이 덜하기도 하고, 어느 기점부터 미국물 먹고 온 양반들이 엘리트 카르텔을 형성하면서부터 이전에도 말했듯 미국 바로 다음으로 신자유주의에 미쳐 돌아가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니 오리지널은 어떤지 알아두는 게 좋단 소리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플래퍼부터 짚어보자. 

플래퍼는 깁슨걸을 보며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들이 '저항 의식을 드러낸' 최초의 여성상이다. 

깁슨걸의 계급성은 뚜렷하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던 만큼 기본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일 수밖에 없지만 플래퍼는 그보다는 계급성이 약간 흐리다. 물론 플래퍼 안에서도 부모가 부자라고 부모의 돈으로 탱자탱자 노는 여성도 있지만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여성의 노동이 금기시 되지 않으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노는 생활이 가능은 했단 얘기다. 그러고 놀다가 예쁘면 비싼 선물도 받고, 운 좋으면 부자가 되거나 부자랑 결혼도 하고, 재수 없으면 남자한테 살해도 당하는 건데(그 시대라고 데이트 폭력 살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없으리라 믿는다.)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몇 가지 문화적 특징이 이때 부각된다.

첫 번째로, 마른 몸에 대한 선망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여성의 허리를 꽉 옥죄던 종류의 코르셋이 버려졌다. 플래퍼는 재즈와 연관이 깊은 만큼 춤을 추는데 거추장스러우면 다 버렸다. 이 말인 즉, 깁슨걸까지 함께 해오던 여성의 병약함은 지루한 게 됐단 소리다. 담배를 피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시며 새벽 내내 노는 문화에서 병약함과 정숙함은 당연히 지루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지 않겠는가.

둘, 춤추는 게 중요하니 플래퍼들의 힐은 그렇게 높지는 않았고 치마 길이가 짧아지며 가벼워지고, 또 팔다리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팔다리의 털을 밀기 시작했고 다리는 성애를 느끼는 부위가 된다.

셋, 남성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직선이 플래퍼 룩으로 여성 패션에 들어오면서 가슴을 납작하게 동여매는 코르셋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특이한 점인데 보통 여성의 인권 신장이 핫해지는 시기가 오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시각적으로 배제하고 싶어하는 욕망도 드러난다. 60년대 제2물결 페미니즘 시기에도 여성의 가슴을 납작하게 누르는 모습이 잠시 등장하는데 제3물결 즈음부터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넷, 플래퍼는 전적으로 젊은이들의 문화였다. 여성들이 주도한 문화이자 동시에 지금도 너무 익숙한 여성 문화 내의 소비주의의 시작이 플래퍼이기도 하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의 말을 빌려 "몸은 강력한 상징의 형식이며, 기본 관례, 위계 질서, 문화의 형이상학적 실행이 새겨져 있는 표면"이다. 역으로 관례, 위계 질서, 문화가 구체적인 몸의 언어를 통해 강화되기도 한다. 그 좋은 일례가 플래퍼이지 않은가. 이렇듯 몸은 문화에 대한 은유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하면 신체로 인해 규범이 강화되는지 아닌지 신체에 전복성을 보여줄 방법이 존재하는 건지 가끔씩 혼란스러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란 소리다.

이렇듯 기존의 사회문화에 질려서 새로운 여성 이미지를 만들어낸 플래퍼였지만 플래퍼의 몰락은 심플하게 얘기해서 대공황과 전쟁의 콜라보다. 돈 많은 것들은 대공황이 와도 그리 작살나지 않았지만 대공황이 터지고 실업과 인플레 문제가 만연해지자 평범한 계층의 여성들은 일자리를 박탈당했고 그렇게 다시 여성은 가정으로 쫓겨났다.

30년대 문화를 살펴보면 상황이 안 좋아지니 사람들은 현실도피로 영화를 많이 봤다는 얘길 해줬는데, 경제와 계층적 얘기를 해주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중산층의 문화'라고 부를 만한 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대중에게 비춰지는 문화의 원류는 상류층의 문화다. 

옷은 때와 장소에 따라 반드시 구별해 입어야 하고(요즘은 이걸 두고 TPO 뭐시깽이라고 하던데... 대체 어디서 유래한 표현인지 모르것다.) 태도에 얼마나 매너가 배여있는지가 그 자체로 계급성을 드러내는 것이었기에 어떤 의미로는 계급이 바로 시각적으로 보이곤 했다. 

이런 흐름은 30년대를 내내 지배한다. 당연히 남성도 마찬가지다. 농담처럼 미국 남성들이 제일 깔끔하게 입고 다닐 때가 모름지기 30년대라고 하는 이유가 그냥... 형편이 좀 되면 상류층이 입는 대로 따라 입어 버릇하니 태가 안 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남성 또한 태도에 매너가 얼마나 배여있는지가 계급성을 드러내는 건 마찬가지였다. 뭐 이 부분은 지금도 약간은 남아있다. 좀 그럴듯한 상황이면 '남자가 에스코트 해줘야지'가 미국 문화 안에서 얼마나 반복재생되는지 세어보면 놀랄 거다.

트위터에서도 떠들었는데 미국인들은 자신의 짧은 역사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기기도 하다. 30년대 중반에 프랑스에 바캉스 제도가 생기며 프랑스 남부 도시들이 휴양지로 핫해지면서 스포츠 웨어와 햇볕에 탄 피부가 사치의 증거가 되니 이 영향이 즉시 미국에도 들어오는 걸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내내 미국 문화에 이후로도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에밀리, 파리에 가다> 같은 드라마가 나오고 이게 인기가 괜찮은 걸 생각해보자. 패션과 낭만하면 아직도 파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라 한들 서구에 대한 선망이 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얘기긴 하지만 어쨌든 쟤들도 그런 면이 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여성들의 노동이 다시 중시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프로파간다의 필요성이 부각되며 수신자의 젠더에 맞춰 남성에게는 핀업 걸이, 여성에게는 리벳공 로지가 수신되는데 전쟁이 끝나자 마자 리벳공 로지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 의해 버려진다. 

40년대부터가 미국의 호황기임을 짚어줬는데, 이 부분을 더 깊게 파고들면 이렇다. 드디어 '중산층'이 매력적인 계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물론 중산층 자체는 도시가 형성되면서부터 생겨나긴 시작했지만 대중문화 자체가 20세기의 산물이었던만큼 대중문화 안에서 상류층이 아닌 다른 계층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자체는 대중문화가 탄생하고도 더 시간이 필요했단 소리다.

중산층에 대한 구분 자체는 나라마다 약간씩 다르다. 기본적으로 사회학 용어이기 때문에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재산의 소유 정도가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의 중간에 놓인 계급. 중소 상공업자, 소지주, 봉급생활자 따위가 이에 속한다'고 하지만... 교육부 산하 조직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집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말하는 '경제적 수준이나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되면서 스스로 중산층 의식이 있는 사회 집단을 가리키는 사회학 용어' 쪽이 지금 하려는 얘기엔 좀 더 적합한 정의다.

미국 사회와 문화에서 중산층의 등장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미국 사회는 상상 이상으로 극단적이다. 미국 역사의 초기를 들여다 보면 카네기, 록펠러, 모건 등 독점기업가로 유명한 양반들이 있는데 이 양반들의 노조 탄압과 독과점 등 상상 이상의 미친 짓들을 벌이며 돈을 벌어들인 덕분에 대공황 때 쓴맛을 제대로 본 미국은 금융규제를 만들고 드디어 소득 분배에 신경 쓰기 시작한다. 소로스 펀드의 의장 조지 소로스는 이러한 금융규제를 유조선에 비유한다. 유조선이 워낙 크다 보니 운송 중인 기름이 움직여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구역을 나눠 설계해야 하듯 금융시장엔 늘 불안요소가 잠재하기에 금융 규제가 있어야 거대한 금융시장이 자멸하지 않는 안전장치가 된다는 거다. 이 금융규제가 80년대 레이건 정부 때부터 야금야금 사라지기 시작한다. 클린턴 정부, 부시 정부 때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이 어떻게 망해버리는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어쨌든 그렇게 50년대 들어서 최상위 1% 고소득층이 전체 국민소득의 10% 수준만 차지하는 정도로로 줄어들며(예전엔 전체 국민소득의 25%였다. 상위 10%도 아니고 최상위 1%다.) 중산층이 많아지는 다이아몬드 형 소득분포가 되었는데 이게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명확하다.

대중문화의 주체가 상류층에서 중산층으로 옮겨졌다. 더 정확히는 모든 게 상류층 흉내 내기였던 문화가 필요에 의해서 그 주체를 중산층으로 옮겼다. 물론 전쟁 특수가 영향을 주긴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문화와 관련된 산업이 실질적으로 거의 중단되면서 전쟁의 비참함에서 도망칠 선망의 대상은 자국 문화가 아니라 미국이 되었고, 미국의 문화 산업 속 프로파간다는 말해 입 아플 정도다. 이 부분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요즘 들어 마블 영화더러 PC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누가 들으면 마블이 뭐 대단히 진보적이었다고 착각하겠다. 시대가 변했으니 마지못해 그렇게 내는 거지 이데올로기로 따지면 견고하기 짝이 없는 미국 우파 냄새가 풀풀 진동을 하는구만 다양성 조금 챙긴 걸로 좌파라고 착각해선 곤란하다. 

전쟁이 끝나서 남성들이 돌아왔음에도 일자리는 넘쳐나니 완전고용에 근접했으며 소득 재분배가 사회 계급 사이의 간격을 크게 줄여 놓으니 사람들의 소득이 엇비슷해졌고, 이는 소비 수준도 비슷해졌다는 소리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기업 입장에선 물건 팔아먹기 좋은 시기라 광고를 엄청나게 해대니 미디어의 영향을 확인하기 좋은 때란 소리다.

문화적 규범은 기독교적 가치관 외에는 실질적으로 공백이나 다름 없고, 중산층의 소득이 직종 상관 없이 모두 넉넉해지니 기업에서 이거 사고 저거 사라고 엄청 부추겨대도 뭐 하나 걱정할 게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미디어에서 비춰주는 미국의 중산층 이미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았다. 평일이면 일하고 돌아온 가장에게 맛난 저녁에 칵테일 한 잔까지 말아주며 방긋방긋 웃어주는 아름다운 하우스 와이프가 특히 말이다. 

미국 사회의 동질화는 굉장했다. 가시적인 계급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가 어느 순간 대중의 소비력을 기대하며 중산층 자체가 새로운 선망의 계급이 되었고 소비는 찬사 받을 행위 그 자체였다. 재계든 정계든 소비지상주의가 자본주의의 미덕이며 욕망은 좋은 것이라 부추겼다. 게다가 50년대부터 가정에 TV가 보급되다 보니 기업들은 미친 것처럼 '행복한 백인 가정'의 이미지를 광고로 보여줬고, 이런 미디어의 이미지 공세에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았는지는 <로맨스판타지 속 로맨스 서사와 페미니즘> 2편에서 하우스와이프로 설명해줬으니 이정도로 하고 넘어가겠다. 

40~70년를 미국에선 소비자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70년대에서 왜 멈추느냐, 오일 쇼크 때문이다.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면 소비가 줄어드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로 다음 글에서는 60년대 이후를 다루겠다. 

사족 1. 미국 역사는 짧은 만큼 극단적이라 재밌다. 무엇보다 얘네 역사를 공부하면 자본주의에 대한 공부도 된다. 특히나 금융 관련해서 궁금하다면 리처드 실라의 <금리의 역사>를 읽자. 경제란 주제가 재미있기가 힘들긴 하지만 나름 재밌게 쓴 책이고 경제학에서 교재로도 가끔 쓰인다. 무엇보다... 돈 모으고 싶어하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당연한 일인데 금리의 개념을 이해 못 하면 불가능하니 요거 한 권이라도 읽어두자. 미국 문화에 대해 다룬 책은 너무 많으니 음... 관심사가 겹치는 부분부터 찾아서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영화를 좋아하면 미국 영화사로 접근하는 것도 좋고 미디어의 영향력을 보고 싶다면 광고사도 좋은 선택이다.

사족 2. 새삼 아쉬운 점이라면 그 <백래시>를 쓴 수전 팔루디가 911 테러로 촉발된 미국인들의 '젠더화된' 심리적 반응을 고찰한 <테러 드림 : 포스트 9·11 미국의 신화와 여성혐오(The Terror Dream: Myth and Misogyny in an Insecure America)>는 번역본이 없다. 오늘도 책 내달란 소리가 하고 싶었다.

사족 3. 철학! 하면 겁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철학 자체는 '깊이 생각해보는 학문'이다. 어원 자체가 그렇다. 그러니 너무 어려워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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