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망 해부 - 여성, 사람이 아닌 (1)
기독교적 이원론과 여성 이미지
어려운 얘기를 할 쿨타임이 찼다. 그러니 간만에 어려운 얘기를 해보자. 이번 시리즈에서는 여성 주인공을 사용하는 장르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는 아주 바람직한 방향을 보이고는 있지만, 초기다 보니 여성 주인공을 다루는 데에 있어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부분을 끌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아서 피해가기 쉽도록 얘기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저번에 말하는 걸 까먹었는데(안다. 대충 살고 있다.) 유료로 걸어놓은 부분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론적 부분이나 테크닉을 다루고 있다. 굳이 유료로 걸은 이유는 혹여라도 내가 글을 쓰며 예시로 제시할 방법만 쓸까봐 싶어 걸어둔 거다. 수익금으로 밥 한 끼도 못 사먹을 정도니 아주 적합한 방법이었다. 작가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채택하든, 어떤 기법을 채택하든 그건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신의 머리로 한 번 더 생각해 주관으로 굳혀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대중이 알아야 좋다고 판단하고 있는 부분은 앞으로도 무료로 공개하긴 할 거다. 도움이 되었다면 댓글이나 소액 후원으로나마 응원해주길 바란다. 사실 이런 이슈들은 동조하는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작가들도 괜한 겁을 먹지 않으니 댓글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100명이 읽으면 1명이 댓글을 달까 말까한 게 현실인 만큼, 이런 시리즈 하나 쓰려면 다시 읽어야 하는 한두 권이 아니니 카페인이라도 충전해달란 뜻이다.
그럼 시작해보자.
유난히 익명질문함에 자주 들어오는 질문이 있다. 독자들은 로판의 이미지가 대변하는 선망- 즉 과도한 이성애중심주의, 아름다움, 마른 몸에 집착하며 신자유주의적, 신계급주의적이고 온정적 가부장적인 구도와 극도의 무기력함을 느끼면서도 정상성을 확보하려는 모습까지 나오는 등의 갖은 보수성을 띄는데도 왜 그게 먹힐까, 사실 독자들은 그런 보수성을 사랑하는 거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정말로 꾸준히 들어온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연히 철학, 개중에서도 당연히 페미니즘, 문화, 소비심리학, 경제적 배경 등을 대충이나마 알아야 한다. 이 이슈에 관심 있으면 요 책 저 책 읽으라고 분명 사족을 달아놨는데 안 읽는 건 이제 잘 알겠다...... 냅다 철학으로 가서 16세기 인식론에서부터 시작하면 도망칠 거 뻔히 아니까 일단 가능한 한 이해하기 쉽게 단순화 시켜 한 번 다뤄두겠다. 진지하게 알고 싶다면 사족에서 소개하는 책들을 읽자. 세상 날로 먹기 어려운 거 알만도 하구만 자꾸 날로 먹으려 들면 요놈요놈 떼끼떼끼다.
사실 지난 번 시리즈인 <로맨스판타지 속 로맨스 서사와 페미니즘>만 꼼꼼히 읽어도 문화 속 여성의 이미지가 주류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저항과 순응을 반복하는 걸 눈치챘을 게다. 기억 안 나면 다시 꼼꼼히 읽어보자. 저항의 예시로 처음 나온 여성 이미지가 서프러제트고, 그 서프러제트기도 하였던 신여성들의 이미지를 있는 힘껏 미화시켜 만든 게 깁슨 걸이고, 깁슨 걸에서 다시 여성들은 플래퍼를 만들어냈지만 전쟁과 함께 여성 이미지의 속성이 그 수신자의 젠더에 맞춰 한 번 더 젠더화 되어 핀업 걸과 리벳공 로지로 나뉘었다. 전쟁 끝나며 핀업 걸이 살아남고 리벳공 로지는 묻히고, 그 핀업 걸에서 현대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고정되고 난 이후로 미디어의 페미니즘 혐오 조장으로 인해 여성은 그 섹슈얼리티만이 계속해서 반복 재생되어왔다. 물론 미국 문화사를 들여다보면 유색인종 이미지 쪽의 변화가 크긴 한데 어쨌든 섹슈얼리티가 갖춰진 완벽한 몸으로 고정되어버린 이후 30년간 여성 이미지에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얘기도 분명히 해줬다. 문화적으로 너무 노출되어 자랐기 때문에 문제를 못 느낄 수 있고, 미디어는 이 이미지에 갖은 선망을 갖다 붙여서 팔아제끼는데다가 우리는 미디어의 영향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나?
그럼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체 왜 이 가상의 이미지들을 좋아하는가. 이것도 이미 짚어줬다. 우리 모두는 보다 주목받고 성공했다고 쳐주는 상위의 계층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고, 사랑 받고 싶어한다. 그러니 그게 다이어트가 됐든 성형수술이 됐든 자신의 몸에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방식에도 기꺼이 돈을 쓰며 주류 이미지를 자신의 속성으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개성이 이미지로 드러나는 시대가 아니고 이미지를 개성으로 드러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건 좀 나중에 얘기하자.
덤으로 우리 사회는 나르시시즘을 부추기고 있지 않던가. 물론 어떤 의미로 뉴미디어 시대로 접어들면서 아주 약간이라도 나르시시즘을 가지지 않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당연히 나라고 논외는 아니다. 그러니 이 부분을 반드시 인정하고 생각해봐야 한다.
여성 이미지에 늘러붙어있는 어떤 낡음에 대해 얘기하려면 기독교적 이원론에서 시작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니체도 서구 중심적 사고를 비판했구만 왜 서구 기독교 문화로 돌아가는 건데?' 좋은 지적이다. 근데 어떡하냐. 현대 문화가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서구 사회에서 통용되던 여성 이미지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고 하긴 어렵다. 일단 동양에서 전반적으로 통용되던, 이야기로 남아있는 여성상을 생각 해보자. 신화 말고 민담이나 소설로 말이다. 경국지색으로 주로 표현되는 요녀, 남자가 뭐라 하든 고분고분한 현모양처, 정절을 지켰다는 열녀, 자해행위를 해가면서도 효를 다한 효녀. 이게 다다. 잘 봐야 하는 건 동양 쪽에선 어머니상에 대단한 모성신화가 덜한 부분 정도지 이 여성상들을 해부해보면 결국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남성을 유혹하는 악'이고 나머지는 가부장제에 종속되어 순종적이며, 가문 내의 남성을 위하는데 온 몸을 다 바치는 '집 안의 천사'다. 대체 뭐가 대단히 다른가. 그리고 이 기독교적 이원론은 16세기 인식론 이후로 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남성은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명제로 더 도드라지게 된다.
이게 자세히 파고들면 무슨 소리냐. 기독교적 사고에서 육체는 동물적이란 소리다. 인간 본성의 육욕적인 면이라서 그렇게 순수, 정절, 금욕을 강조해댄 거고 데카르트 같은 양반들이 올바른 철학적 방법을 통해 육체의 인식론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을 거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단 얘기다.
이 '남성은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이란 도식은 오늘날에도 익숙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지적했듯 "육체의 고유한 모든 속성이 여성에게 덧씌워진다." 고로 이 도식에서 남성은 순수한 이데아이며 절대적인 정신이 된다. 그럼 당연히 여성 이미지는 '남성을 유혹하는 악'이 된다.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면 아담과 이브다. 이브 말고도 데릴라, 살로메, 유디트가 있다. 이 이름들만 봐도 서구 문화에 기독교가 얼마나 골수 깊게 박혀있는지 이제 좀 감이 오지 않는가.
저런 '남성을 유혹하는 악'이 아니면 성모 마리아, 즉 성녀로 대표되는 '집 안의 천사'잖은가. 기독교적 이원론이 지겹다 지겹다 타령하게 되는 이유가 이제 납득 갈 것이다. 이런 소리가 아직도 나올만큼 현대문화에도 이원론은 구현되어 있다.
그러다 페미니즘의 등장과 함께 이원론에서 나온 고정된 이미지에 변형이 생긴다. 자, 서프러제트와 깁슨걸로 다시 돌아가 보자.
TTS프로그램 사용자를 위해 설명을 덧붙이며 진행하겠다. 더 보스턴 데일리 글로브(The Boston Daily Globe)의 1912년 호에 묘사된 서프러제트를 보자. 오른쪽이 당연히 서프러제트고 왼쪽은 참정권론자(suffragists)- 즉, 서프러제트만큼 능동적이지 않은, 깁슨 걸이다.
어디까지나 수동적이어야하는 여성이 여전히 수동적으로 '참정권 주셔요'할 때는 고분고분하다며 그래도 예쁘고 매력적으로 그리는데 '참정권 내놔'하며 능동적으로 굴면 그 즉시 이미지에 남성성이 덧씌워진다. 완고하게 다물린 턱, 매섭게 꺾이는 눈썹, 부리부리한 눈과 부러진 전적이라도 있는 듯 휘어진 코, 젊음과 아름다움은 저항하는 순간 여성에게선 박탈된다.
참고 삼아 몇 개 더 붙이겠다.
서프러제트의 기원과 발전(Origin and Development of a Suffragette)란 참정권 반대 만화를 보자. 전형적인 인식이 고대로 보이지 않는가? 여성은 어릴 때는 지켜줘야 하는 순수하고 귀여운 존재고, 젊을 때는 매혹적이라서 짜증나는 존재고, 자기 주장을 하면 늙어서 매력이 떨어지니 미쳐버린 위협적인 대상이다. 한 손에 도끼를 들려준 모양새를 잘 봐라.
1910년 영국에서 나온 우리는 투표를 원합니다(We Want the Vote) 포스터는 그 미소지니함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 혹은 괴물에 가깝게 그려놨다.
찰스 다나 깁슨이 그린 해변의 깁슨 걸스(Gibson Girls at the beach)를 보자.
풍성하고 윤기나는 머리카락, 풍만한 몸매에 잘록한 허리임에도 우아하고 섬세한 스타일로 '음탕한 악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재밌는 건 정작 깁슨걸은 손 끝으로 남성을 부리는 모습으로 자주 그려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깁슨은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한 남자들이 어디든 쫓아다니고 어떤 욕망이든 충족시켜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단 소리다.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본 기분이 들지 않는가.
그런데 이 이미지가 남녀노소 모두에게 잘 팔렸다는 점이 중요하다. 깁슨걸의 이미지를 보고 여성들에게 주입된 선망이 뭘까? 아름다우면 뭐든 자기 뜻대로 된다는 망상 아니겠는가. 동양에서도 이 선망은 역사가 길다. 경국지색이란 말에 관련된 일화들을 생각해보자. 나라 국고 탈탈 털어먹은 왕이 한 두 놈이던가. 웃긴 건 정신 못 차리고 국고 냠냠 말아먹은 건 왕인데 통제는 여성에게 가해졌다. 계집이 감히 사치하지 말라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이렇다. 남성의 욕망에는 책임이 없다. 여성의 욕망을 남성의 욕망에 종속시키고,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지만 여성이 사회적 또는 개인적으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다른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문화에도 책임이 없다.
그렇게 문화에 있어 여성은 시뮬라크르 그 자체가 된다. 현실의 여성이 뭘 원하는지, 뭘 하는지는 전혀 상관 없고 이미지만이 중요해지고 우리는 그런 문화 안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위해 신체적/정신적 고통도 기꺼이 참아야 한다고, 그게 여성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세뇌 당하며 자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60년대 래디컬 페미니즘의 등장 이후로 제 3 물결 페미니즘에서 억압자/피억압자 모델이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따라 안 맞는 걸 알고 철학자 미셸 푸코와 친해지게 된 얘기는 다음 글에서 하겠다.
사족 1.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은 역사 속에서 여성을 다루었는가에 대한 고찰하고 있어 여성은 정상적인 성을 갖는 남성에 대한 반대급부인 비주류의 성으로 정의됨을 잘 보여주지만 아무래도 이게 초기 페미니즘이다 보니 어느 정도는 걸러 보아야 한다.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게 많이 정리되었으니 역사적으로 이러저러했단 걸 알기 위해 읽는 거지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지금 시대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이원론으로 시작했지만 지금 시대에 남성/여성으로 나눠서 보는 이원론은 맞지 않다. 이해하기 쉬우라고 편의상 여성/남성으로 부르다 보니 조금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듯 하여 덧붙인다. 보통 대중의 반응을 내가 거론할 때 보면 어지간하면 사람들이나 대중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눈치채주길 바란다. 젠더차로 확 갈릴 때나 남성 표현을 쓰려고 머리에 힘주고 있다. 알아달라고...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