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만남 (1)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코니엘 루 뷔에르 쏠레오 라흐벤시아. 현 황제 뤼비아나의 7번째 손녀이자 마지막 황태자라 불리는 로드릭의 두 자녀 중 둘째.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몸이 무척 약했다. 그로 인해 침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자연스레 책과 친해지게 되었다.
여덟 살,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녀는 동화책보다는 긴 흐름의 소설책을 좀 더 선호했다. 일찍 글을 뗀 덕에 독서의 범위가 넓어지고 질이 높아진 황손녀에 대해 칭찬하는 자들이 그녀 주변에 다다했다.
코니엘은 옛 신화와 종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고대의 황금기라 불리는 신화시대에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종족이라 불리는 인외의 지성체들도 함께 이 땅에 살았다고 한다.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외모를 지닌 그 존재들은 긴 수명을 가졌고 뛰어난 마법적 능력을 갖췄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에 만족해 발전하지 않는 종족이었고, 결국 점차 사멸해갔다. 하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서, 이 대륙 끝에 존재하는 머나먼 어느 제국에는 아직도 이종족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건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 정작 라흐벤시아에는 이종족은 커녕 혼혈조차도 거의 없는 상황. 괜히 이 나라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나라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코니엘이 특히 주의 깊게 읽었던 부분은 바로 여기였다. 하프나 쿼터 같은 혼혈은 거의 없는 수준에 가깝지만, 귀선유전이라 불리는 혼혈들이 라흐벤시아에도 다소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귀선유전. 귀선유전이란 먼 조상 중 이종족이 존재해, 그 후손에게 무작위로 이종족의 특성이 발현한 경우와 그러한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귀선유전의 특징으로는 여느 인간과는 다른 특이한 외모, 평균 이상의 마법적 재능, 불로 현상, 짧은 수명 등이 있다.
그리고 코니엘은 제 주변에 그런 이가 한 명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바로 제 약혼자의 누나이자 오빠의 약혼녀인 리엔시에였다.
‘첫 만남부터 괴물이라고 말해버렸으니... 분명 미움을 샀겠지.’
그때의 일은 아직까지도 후회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다시 만난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귀선유전인 리엔시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황제에 의해 오빠인 라히안과 태중 약혼 관계로 이어졌던 사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귀선유전으로 태어나고서부터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되었다고 들었다.
혼혈을 황손자의 약혼녀로 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신하들의 탄원들이 매일 같이 빗발쳤다. 처음에는 코니엘 자신도 그런가 보다 했었지만, 책을 읽을수록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금 다른 외모를 가진 것을 제외하면 인간과 똑같을 뿐, 귀선유전 또한 저희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이종족이라고 하면 조금 멀게 느껴지지만…혼혈도 인간의 피가 섞인 존재들일지인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차별을 하는 걸까? 물론 자신도 처음에 무의식적으로 다름을 인식하고 후회할 만한 말을 내뱉어 버렸지만.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라히안과 리엔시에의 약혼 관계는 얼마 안 가 깨어질 것 같았다. 리엔시에의 외모가 ‘평범’했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일이 흘러갔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에 부정한 것은 없다. 부정한 것이 존재한다면, 신께서 그것을 내버려 두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없으며, 차별받아도 되는 사람이란 다시 존재하지 않는다. 코니엘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침 오늘은 그날의 일 이후 처음으로 유레이토 공작가를 방문하는 날이다. 어머니께 떼를 써서 약혼자인 레니발렌 공자와 놀고 싶다고 청했다. 어머니는 못 이기시는 척 허락해주셨고, 라히안도 마침 같이 가겠다고 해서 둘이서 공작저로 향했다.
공작저는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휘황찬란한 곳이었다. 건축물에 저렇게 어두운색과 단조로운 문양을 썼는데도 어쩜 이리 우아하고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걸까? 코니엘은 두 번째로 오는 곳이니만큼 더 꼼꼼하게 저택을 살피며 사용인을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오자마자 후원으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라히안이 그러자고 했기 때문이다.
라히안은 지난번 첫 방문 때에도 그러더니, 유레이토 공작저에 오면은 후원부터 찾았다. 남들이 본다면 응접실이 아닌 웬 후원이냐고 하겠지만, 코니엘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후원에는 공작가 전용 예배당이 있었고, 그 예배당에 상주하고 있는 소녀가 한 명 있기 때문이다.
바로 리엔시에였다. 희고 노란 장미가 만발한 공작저의 후원이 금색 물결을 시계 속으로 쏟아냈다. 코니엘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레니발렌 공자가 풀밭에 앉아 들꽃을 꺾으며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리엔시에는 어디에 있지? 오라비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두리번거리다 곧장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코니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먼저 레니발렌에게로 다가갔다.
“공자, 안녕하세요. 또 만나네요.”
“아, 안녕, 안녕하세요. 코니엘님.”
“코니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첫 만남 때 얘기했잖아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럼 저도 그냥 렌이라고 불러주세요.”
레니발렌이 멋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코니엘은 레니발렌의 옆에 쭈구려 앉으며 방문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슬쩍 말을 흘렸다.
“그런데, 공자의 누님께서는 어디에 계실까요? 공작부인의 말씀으로는 후원에 공자와 같이 있을 거라 해서 이쪽으로 바로 온 건데.”
“...누나는...”
레니발렌이 말을 흐리며 잠시 침묵했다. 표정이 어두웠다. 그때, 예배당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리엔시에였다. 리엔시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오더니 잰걸음으로 후원을 잽싸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리엔! 잠깐!”
그리고 그 뒤를 당황한 얼굴의 라히안이 뒤쫓아가는 것이 아닌가.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둘은 곧 후원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멍하게 그 장면을 지켜보던 코니엘과 레니발렌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고는 잠시 침묵했다.
“...무슨 일일까요...?”
“모르겠네요... 일단 따라가 봐요. 렌, 어서요.”
궁둥이에 붙은 풀을 털어낸 레니발렌과 풍성한 치맛자락을 갈무리한 코니엘이 곧 사라진 두 인영에 대한 추적에 나서기 시작했다.
*
“리엔! 기다려.”
“...”
명령조인 말투와는 다르게 애달픈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라히안에 못 이긴 듯, 리엔시에가 갑자기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리엔시에가 휙, 뒤를 돌자 달려오던 라히안이 급히 멈췄다. 다행히 서로 부딪히는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라히안님뿐이세요.”
“아니, 그게. ...그렇군.”
“저는 더 이상 볼일이 없어요. 왜 자꾸 따라오시는 거예요?”
“내가 아까 한 말. 내 의도는 네가 생각한 그게 아니었다고 다시 말하고 싶어서.”
“.......”
의도라. 리엔시에는 방금 전 예배당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나는 네가 싫지 않다.’
‘...’
‘다른 이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어. 혼약이 깨질 일은 없을 거다. 나는... 네 유별남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유별나다고요. ...네, 라히안님의 생각, 잘 알겠습니다.’
그가 자신을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도 알고 있었고, 그런 사람이야 천지에 널렸으니 이제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왠 훼방꾼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대뜸 저런 말을 위로랍시고 하는 것이 아닌가.
──위로. 리엔시에는 오늘, 아버지께 약혼 관계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황궁에서 퇴근하시자마자 와서 알려주신 소식이니 황손자 또한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 라히안은 자신을 위로하겠답시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신경 써 주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라히안 또한 자신을 규칙에서 벗어난 존재로 취급하고 있었으니까.
리엔시에는 자기자신이 싫었다.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모가 끔찍했다. 그러니까 나를 편하게 미워하도록 놔두라고. 괜히 이해한다는 식으로 아량을 베푸는 건 그만두라고. 아, 사실은 그냥 원하지도 않는 이 약혼 관계가 무산되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른다. 기껏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황손자의 약혼녀가 되어야 한다니. 그것만큼 아쉬운 게 또 어디 있을까.
리엔시에는 스스로 그렇게 납득하기로 했다. 그녀는 그냥 라히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식으로 저렇게 행동하면서 사실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에 두고 말하는 것도 별로였다.
“네, 라히안님의 뜻은 알겠어요. 그러니 이만 돌아가주세요.”
“리엔.”
“오늘은 이만 쉬고 싶어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라히안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지. 다음에 또 오겠다.”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소년. 그런 그를 리엔시에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저도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풀숲에 숨어서 몰래 보고 있었던 두 명의 소년 소녀가 있었다. 레니발렌과 코니엘이었다.
‘...어쩌죠?’
‘끝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네요.’
‘그럼 전 리엔시에 영애에게 가 볼게요. 렌은 라히안을 따라가세요.’
‘...라히안님께서 저를 그리 반가워 하시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요. 아, 영애가 공작저 밖으로 나가네요? 어디로 가는 걸까... 이만 먼저 가볼게요. 렌, 이따 또 봐요!’
풀숲이 들썩거리더니 풍성한 적금발의 소녀 한 명이 폭, 하고 튀어나왔다. 머리에 붙은 풀잎과 잔가지들을 떼어낸 그녀는 붉은 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곧장 후문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흑발의 소년의 머리가 풀 더미에서 솟아났다. 레니발렌은 머리와 옷가지를 정돈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풀숲에서 빠져나와 라히안이 사라진 쪽으로 뛰어갔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진 남녀의 뒤를 각자의 동생들이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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