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수상한 옆집 여자 2화
* 이 소설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등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 없습니다.
빛나는 다미에게 떠밀리듯 부동산으로 향했다. 스프링클러에 젖었던 옷은 땡볕이 내리쬐는 언덕길을 내려가면서 감쪽같이 말랐고 머리가 좀 푸석푸석해져 있는 것 말고는 언덕길을 오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동산에 들어가자 할머니는 계약하러 왔다는 빛나의 말에 반색하며 바로 계약서를 들고 왔다. 그러니까 원룸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부동산에서 월세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생기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집은 봐야 한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탓이었다. 다 박살 났지만 다미의 집과 비슷하겠거니 애써 생각한 게 다였다.
다미는 알아서 한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빛나가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까지도 부동산 할머니에게 원룸에서 일어났던 참상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도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
결국 빛나는 계약금까지 이체하고 부동산을 나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집을 안 보고 덜컥 계약을 해 버린 두 번째 사례가 되고 만 것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집이니 물난리가 일어날 일은 없어 보였지만 그보다 옆집에 웬 이상한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예쁘긴 하지만.
“언덕길~ 사무치는 고개 너무너무 힘들어~ 다리가- 아프네~”
다미는 노래까지 부르면서 빛나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얼마 전에 유행했던 트로트 멜로디에 맘대로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 같았다. 빛나는 가사가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숨이 차서 그럴 수 없었다. 이 미친 경사로를 오르면서 노래를 부를 여력이 있다니.
“아, 맞아. 몇 살이야?”
“스물, 네 살이요, 후우...”
하나도 안 힘들어 보이는 다미가 얄미워졌지만 빛나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오, 대학은 졸업 했어?”
“네.”
“으흠, 내가 언니니까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네……”
빛나는 어디서부터인가 다미에게 휘둘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렁뚱땅 계약서에 사인했을 때부터인가, 어쩌면 이미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다미는 얼굴이 예쁘고 키가 크고 몸매가 훌륭하다는 것 말고는 친해지고 싶은 부분이 없었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성격 같은 거 아닐까. 혼란스러운 자신에게 막무가내로 구는 다미는 어차피 사는 세계도 다를 것 같았다.
“일 해?”
“아뇨…”
빛나는 가뜩이나 언덕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때아닌 호구조사에 일일이 대답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빛나는 새삼 소심하디 소심한 자신의 성격에 자괴감을 느꼈다.
“언니는요?”
빛나는 숨을 고르며 다미에게 물었다. 그녀가 대답하는 동안은 말을 안 해도 되겠지.
“나? 나도 백수야. 하얀 손. 알지? 여자는 백조라고 하나?”
”아... 하하..."
빛나는 다미가 손짓으로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푸드덕거리며 말하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지역에서 제일 싼 집에 살고 있으니 돈 많은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돈도 없는 주제에 원룸에 부비트랩이라니 대체 뭐 하는 사람이람?
“언니 원룸은, 왜 그렇게, 후, 된 거예요? 저 때문, 아니죠?”
빛나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진상이나 알자고 생각하고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다미는 날갯짓하던 손을 멈추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 없었다.
“함정처럼, 이상한 선도 있었고, 칼로 막 위협하는 것도, 혹시…?”
빛나는 다미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중얼중얼 홀로 떠들었다. 혼자 중얼거리다 보니 점점 결론을 좁혀나갈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외딴곳에서 홀로 은거하는 간첩이라든가.
이 세상 어디에 평범한 사람이 집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목에 칼부터 겨눈단 말인가. 아무리 컨셉 놀이 매니아라도 처음 본 사람한테 그렇게까지는 안 할 것 같았다. 멀쩡하던 집을 난장판 만들어 놓는 건 더더욱.
“응? 아냐, 아냐. 난 그냥 첩보물 덕후 같은 거라 집에다 꾸며봤을 뿐이거든. 하하!”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빛나는 다미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하자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대답했다. 설마 찔려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빛나는 문득 다미가 정말 간첩이라면 신고해서 포상금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잘은 몰라도 몇 억은 된다고 언젠가 들었는데 그 돈이면 하루에 2000장은 접어야 하는 쇼핑백 접기 손 부업도 할 필요가 없었다. 단팥빵도 종류별로 사 먹을 수 있고 말이다.
하지만 다미가 확실하게 간첩인지 아닌지 확인한 뒤 신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증거가 없으면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
빛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간첩 신고는 111! 간첩 신고는 111!
“아아, 뭐,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첩보물 좋아하거든요! 이렇게 된 거 우리 잘 지내요. 음, 언니 집은 한번 싹 정리 해야 할 텐데…”
빛나는 은근슬쩍 난장판이 된 원룸을 들먹였다. 정말로 백수라면 저 난장판이 된 원룸을 고칠 돈이 빠듯할 것 같아서였다.
“응, 그렇지. 아는 사람 불러서 고치게 하면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래요?”
“응. 아까 휴대폰으로 문자 넣어놨거든. 일주일 정도면 원상복구 될 거야.”
빛나는 막힘 없이 술술 대답하는 다미를 의심의 눈초리로 흘겼다. 빛나는 이제 차오르는 숨보다 그녀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아주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으니 힘들 것도 없었고.
“돈은요? 그 정도 난장판이면 수리할 때 돈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돈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무상으로 해 줘… 하하…”
다미는 빛나의 물음에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대답했다. 빛나는 그녀를 점점 더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누가 그런 난장판을 무상으로 고쳐준단 말인가. 부모님이 인테리어 업자라도 돼?
빛나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돈 많은 백수라면 이런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제일 싼 원룸에 살고 있을 리 없었다. 모든 것이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오, 드디어 다 왔네.”
다미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언덕길 앞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좀 멀어 보이지만 빛나도 눈앞에 원룸 건물이 보이자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것이다. 또 내려가고 싶지 않아.
“이삿짐은 언제 와?”
“그런 거 부를 돈 없어요. 몸만 달랑 들고 다니는 인생인걸요. 직접 가서 싸 와야죠. 원래 바로 계약할 생각도 아니었는데...”
빛나는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건물 안 그늘로 피신하며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이삿짐을 들고 다녀야 하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우와, 신기하네. 가전 같은 거 안 써?”
“있긴 한데… 대부분은 빌트인이고 이삿짐센터나 용달 부르는 것보다 그냥 놔두고 오는 게 더 싸게 먹힐 걸요. 끽해봐야 전자렌지 정도니까요. 뭐… 옷이랑 다른 짐들은 챙겨 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갔다 와야 해요.”
잠깐, 이 언덕을 짐 들고 또 올라와야 한다는 건데? 순간 빛나는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전 월세의 보증금을 받아 잔금까지 내고 필요한 걸 좀 사면 며칠 밥 먹을 돈이나 겨우 남을 지경이니 택시도 사치였다.
“흐응, 그렇구나. 집들이 같은 건 안 해?“
“원룸인데 뭘 그런 걸 해요.“
“그럼 이제 네 집에 더 찾아올 사람은 없다는 뜻이네?”
“……”
빛나는 뜨끔한 표정으로 다미를 올려다봤다. 다미는 생글생글 웃고만 있어서 말속에 담긴 뜻을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었다. 역시 간첩인가. 아무도 모르게 날 죽일 셈인가…!
“뭐 해? 들어가야지? 안 더워?”
빛나는 다미가 102호 현관문 앞에 서서 재촉하자 떨떠름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부동산에서 받아온 열쇠 없이도 문은 가볍게 열렸다. 전자 도어락이 아닌 건 아쉬웠지만 빌트인 가구도 있다고 들었는 데다 빈 집이니 미리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다. 무엇보다 월세가 워낙 싸니 자물쇠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이래저래 따지는 것도 양심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열쇠가 존재하는 이유는 불법 침입자들이 집에 들락날락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용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의미 없는 금속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제 여긴 빛나의 집인데도 먼저 성큼 들어가 버리는 외부인, 다미 때문이다.
빛나는 뻔뻔한 그녀를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그녀를 따라 집에 들어가 원룸 내부를 살폈다. 원룸은 예상대로 넓지 않았고 이미 옆집에서 난리를 겪으며 얼핏 본 것과 비슷해서 내부가 새롭지 않았다.
냉장고와 가스렌지같은 필수가전 말곤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어서 조금 썰렁했다. 오래돼 보이는 벽지에 소파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고. 그래도 만족스러운 건, 낡아 보여도 벽걸이 에어컨과 침대가 있다는 점이었다. 침대는 한 명만 누워도 꽉 찰 것 같은 작은 침대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아~ 눕고 싶다.”
“씨, 씻고 누워요! 아까 다 젖었었잖아요, 땀도 흘렸고!”
빛나는 다미가 침대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누울 기세라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빛나는 나름 위생 관념에 예민했던 편이라 다미가 스프링클러의 물을 맞고 햇빛 내리쬐는 언덕을 오르느라 땀도 흘렸을 텐데 감히 베개를 베고 누우려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방치된 시트보다 다미 머리가 더 지저분할 것이었다!
“아아… 씻고 누우라고? 그거,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긴 하지만 괜찮네.”
다미는 빛나의 몸을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훑다가 슬며시 욕실로 들어섰다. 빛나는 그녀의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가 욕실로 모습을 감추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빛나는 그녀를 집에 들인 게 과연 잘한 것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신고 포상금은 커녕 이러다 정말 간첩한테 목숨을 잃고 어디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되는 거 아닐까.
빛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접고 원룸을 꼼꼼히 살폈다. 먼지가 약간 있는 걸 제외하면 다행히 크게 손상된 부분도 없었고 망가진 것도 없어 보였다. 문제가 있다면 짐을 옮겨놓기 전까지 생필품들이 좀 필요할 것 같다는 거였다. 휴지나 수건 같은 것 말이다. 아, 어떻게 하지…?
빛나는 다미가 욕실 안에서 샤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고민에 잠겼다. 당장 어디 가서 휴지를 사서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를 놔둔 채 말이다.
빛나는 다미가 씻고 나올 때까지 가까운 가게가 없는지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하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언덕길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슈퍼나 편의점은 없었다. 망할 입지!
“저기, 수건 좀 줄래?”
빛나는 다미가 손만 욕실 문밖으로 내밀고 말하자 물끄러미 그녀의 새하얀 팔뚝을 바라봤다. 욕실 안에 있는 그녀는 알몸이 분명했다. 문짝이 투명했다면 꽤 볼만했을지도. 아니, 무슨 생각을!
“방금 같이 사인하고 왔잖아요. 수건이 어딨어요? 어휴…”
빛나가 어이없다는 듯 대꾸하자 이내 문밖으로 다미의 젖은 머리카락과 얼굴이 불쑥 등장했다.
“그럼 내 집에 가서 가지고 와주면 안 돼? 욕실 안에 수건 남아 있을 거거든.”
“아, 그래요…? 알았어요.”
빛나는 느릿하게 일어나 옆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문은 열려 있는 것 같으니 그냥 들고 오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여자가 집 문도 안 잠그고 다니다니 너무 허술한 거 아냐? 그러니까 그 사달이 나지.
빛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다미는 살짝 열린 욕실 문틈 사이로 빛나의 뒷모습을 보며 씨익 웃고 있었지만.
옆집에 들어선 빛나는 다미가 말했던 대로 욕실 안까진 난장판이 펼쳐지진 않은 것을 확인했다. 빛나는 욕실 안을 뒤적거리다 온전한 상태의 수건을 전부 들고나올 수 있었다. 그래봤자 몇 장 안됐지만 당분간은 쓸만해 보였다. 아차, 휴지랑... 오, 생리대. 득템!
빛나는 욕실에서 필요할 것 같은 물품은 알뜰하게 전부 챙겨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빛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욕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다미는 빛나가 돌아오길 기다렸던 듯 열린 욕실 문틈 사이로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빨리 줘.”
“자요.”
빛나는 다미의 재촉에 수건 한 장을 잡아 건넸다. 다미는 잽싸게 수건을 받아들곤 욕실 문을 닫았다.
빛나는 욕실 문 앞에 있는 신발장 위에 수건과 휴지, 그리고 그녀의 칫솔과 양치할 때 사용하는 컵 같은 걸 대충 정리해 올려 놨다. 그리고 침대 옆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다미가 나오길 기다렸다.
“휴...”
별일 한 것도 아닌데 빛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역대급으로 운동을 많이 해서도 있지만 다미라는 변수를 만나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어차피 심각한 하자가 없었으면 돈 때문에라도 이 집을 계약했을 것 같긴 하지만 조금은 뜸을 들이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계약까지 한방에 끝마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지, 내일은 이삿짐 싸서 오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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