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수상한 옆집 여자 1화
* 이 소설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등은 실존하는 것과 일체 관계 없습니다.
“으아… 이게 몇 호야 대체…”
빛나는 숨을 헐떡이며 손에 쥔 쪽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원룸 주소가 적혀 있는 쪽지였다. 부동산 할머니가 손수 휘갈긴 화려한 필기체로 적어 주고는 문이 열려 있으니 가서 보고 오라고 한 것이었다.
빛나는 원래 살던 집의 주인이 월세를 올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더 싼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싸게 나온 집들을 알아보다가 눈에 띄게 저렴한 금액의 매물을 발견해 부동산에 찾아갔다. 하지만 부동산에 매물을 보여주자마자 공인중개사 할머니는 편하게 혼자 가서 천천히 보고 오라며 주소가 적힌 쪽지만 쥐여 주고 등을 떠밀었다. 친절한 듯 매정한 태도에 빛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시킨 대로 주소지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나는 숨이 턱 끝까지 몰리기 시작했고 그제야 할머니가 혼자 보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이 무식하게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원룸을 언덕 꼭대기에 지어 놓는 건지 여기다 짓자고 한 사람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싼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빛나는 새삼 그 말을 곱씹었다. 하지만 여기만큼 저렴한 곳도 없고 지갑 사정은 여의치 않았기에, 공공연한 교훈을 안고서 어쩔 수 없이 헥헥거리며 올라갔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집도 안 보고 계약부터 덜컥 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의 하자는 타협해 줄 생각이지만 집을 계약하기 전에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보는 건 이전에 집을 보지도 않고 계약했다가 장마철에 물난리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최소한 어떤 하자가 있는지 알고서 각오하고 계약하는 것과는 다르니까.
“흐아… 흐아…”
뜨거운 한여름 땡볕에 땀이 줄줄 흘렀지만 마침내 주소가 적힌 곳에 도착해 건물을 이리저리 살폈다. 빛나는 쓰고 있는 안경이 땀에 흘러내리려는 것을 고쳐 쓰고 손부채질을 했다. 3층짜리 건물인데 외관은 비교적 멀쩡한 것이 아무래도 월세가 터무니 없이 싼 건 입지 조건 때문인 것 같았다. 바로 지금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것 때문에!
“허억… 허억…”
빛나는 뒤돌아서 지금까지 올라온 언덕길을 바라봤다. 분명 언덕길 초입에 부동산이 있었는데 지금 부동산 건물은 손톱보다 작게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골목길만 나 있을 뿐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간단하게 외출할 때조차 매번 이 그늘 하나 없는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면 농담이 아니라 중간에 열사병으로 쓰러져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여름은 괜찮은 편일지도 몰랐다. 겨울에 눈이 쌓이고 길이 얼기라도 한다면...
빛나는 조금 오싹해졌지만 눈 덮인 언덕을 포댓자루를 타고 내려가는 상상을 하며 입고 있던 반팔 후드 집업의 지퍼를 조금 내려서 열기를 배출했다. 이제야 좀 살만하네, 진작 이럴걸.
빛나는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 들어서자마자 다시금 쪽지를 살피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글씨를 보니 1층인 건 확실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2층 이상이었다면 죽어버리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101호인지 102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 숫자가 날아가다 못해 어디론가 맥없이 흘러 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빛나는 굳게 닫힌 1층의 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둘 중 한 집에 누군가 살고 있다면 문은 잠겨 있을 테니 안 잠긴 쪽이 할머니가 살펴보라고 했던 집일 거다.
빛나는 자신의 추론 능력에 감탄하며 101호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평소보다 과감한 걸음걸이로 101호 현관에 서서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어, 열리네? 여긴가?
처음부터 정답을 맞힌 것 같은 기분에 싱글벙글한 얼굴로 빛나는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응…? 거미줄인가?”
빛나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머리카락이라도 걸린 느낌에 발목에 걸린 투명한 실선을 내려봤다. 마치 영화에서나 봤던 것 같은 부비트랩 같은 투명한 실선이 툭하고 끊겼다.
펑! 퍼펑!
빛나는 갑작스러운 폭음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몸을 웅크리고 집 안을 살폈다. 집 안의 온갖 물건들이 터지며 파편을 뿌리고 있었다. 벽걸이 텔레비전이 쪼개지고 협탁이 쓰러졌으며 유리로 된 테이블이 터져서 유리 조각들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비산했다.
설상가상으로 거실 한 켠에 놓인 넓은 서랍장에서 시커먼 연기가 서랍 내부에서부터 기이한 모습으로 흘러나오더니 곧 불이 붙어 화르륵 타올랐다.
“이, 이게 뭐, 뭔 일이야…!”
빛나는 갑자기 일어난 재난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월세 매물을 보러 온 것인데 어째서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이 송두리째 터져나가고 불길에 시커먼 연기까지 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지금 일어난 일이 자신의 탓으로 몰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할머니가 같이 오지 않은 게 설마 뭔가를 뒤집어씌우려고...?
빛나의 음모론이 머릿속에서 가지를 뻗어나가려는 찰나, 천장에 있던 화재 경보 센서에 연기가 닿자 스프링클러가 돌았다.
차가운 물이 머리를 적시자 빛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겠어! 이런 사태를 내가 한 짓으로 오해 받을 순 없어, 저게 지맘대로 터진 거라고!
빛나는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리 문고리를 돌려도 현관문이 밖에서 잠기기라도 한 것처럼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들어올 때만 해도 쉽게 열렸는데?!
“이, 이익…!”
빛나가 젖 먹던 힘까지 써서 현관 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이내 문을 쾅쾅 두드려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소용은 없었다. 한낮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을 텐데.
빛나는 난장판이 펼쳐진 집 안에 홀로 갇히자 오만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혹여나 인신매매 납치는 아닐까 하는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기물파손죄를 뒤집어쓰는 게 낫지, 난 그냥 집을 보러 온 것뿐인데…!
“헉…!”
빛나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하며 휴대폰을 집어 들려는 순간, 갑자기 목에서 서늘한 느낌이 들어 숨을 들이켰다.
“어디 소속이지?”
빛나는 등 뒤로 미려한 목소리가 들리자 침을 꿀꺽 삼켰다. 빛나의 뒤를 막아선 그녀의 목소리엔 호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고 목에 닿아오는 서늘함은 아무리 봐도 칼 같은 쇠 종류에서나 느껴질 법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빛나는 뭔가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부, 부동산 할머니가 보냈는데요…”
빛나는 최대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불쌍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하면 목에서 느껴지는 이 날카로운 것이 당장이라도 안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부동산… 할머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빛나에게서 물러섰다. 빛나는 자신의 목에서 느꼈던 서늘함이 사라지고 몸의 구속도 풀렸다는 걸 느끼고 조금 안도했다.
“천천히 뒤로 돌아. 손은 위로 올리고.”
빛나는 그녀의 말에 여전히 나오고 있는 스프링클러의 차가운 물을 머리로 맞으며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안경에 물방울이 튀어 세상이 뿌옇게 보이고 있었다. 빛나는 뿌연 안경 너머로 긴 생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여자를 마주했다.
“……”
여자의 키가 꽤 커서 빛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하지만 반짝 눈이 마주치자 지레 겁을 먹고 시선을 내렸다가 그녀의 옷차림이 너무 가벼워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빛나는 결국 그녀의 미간을 쳐다보기로 했다.
빛나는 여자의 얼굴을 살피자마자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뜻 봤을 때도 느꼈지만 엄청 예뻤다. 비록 물에 젖어버린 안경알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긴 어려웠지만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진짜, 연예인인가 싶을 정도로 예쁘다는 걸 말이다. 우와!
빛나는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든 말든 빤히 그녀의 얼굴을 뜯어 봤다. 태어나서 직접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서 열심히 눈동자에 그 모습을 담았다.
빛나가 여자의 얼굴을 뇌에 새기는 동안 그녀는 꽤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빛나를 대했을 때 서슬 퍼렇다 못해 칼에 찔릴 것 같은 예리함은 어디로 가고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좋아… 이름이 뭐야?”
여자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녀는 스프링클러 때문에 온 몸이 젖어서 옷 위로 피부가 전부 비쳐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슴에 튀어나온 그것까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같은 여자 끼리라고 생각해서인지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김세빛나…예요.”
“응? 이름이 네 글자야?”
빛나는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젠 이름을 말했을 때 그녀 같은 반응은 익숙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창의력이 없어!
“그래요.”
빛나는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치기엔 그녀는 방금 전까지 자신을 위협하던 사람이었으므로 아직 눈치가 보였다.
여자는 쓴웃음을 짓더니 파괴된 집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빛나도 그녀를 따라 같이 시선을 집 안으로 돌리자 어느새 스프링클러는 멈춰있고 불이 났던 것도 꺼져 희미하게 흰 연기만 내고 있었다. 남아 있는 건 온통 물바다가 되어버린 바닥과 산산조각난 유리 조각들 그리고 시커멓게 그을린 벽지와 성한 곳이 없는 가구 같은 것들이었다. 원룸이다 보니 난장판이 된 모습도 한눈에 보였다. 청소가 아니라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서 공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못 쓰게 된 가구는 둘째치고 그래야 그나마 누워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알겠다. 위협해서 미안해. 갑자기 내 집에 들어와서 그랬던 거니까 좀 봐주라, 알았지?”
그녀가 별로 안 미안한 목소리로 말하자 빛나는 안경을 벗어 반쯤 젖어버린 옷으로 안경알을 쓱쓱 닦아냈다가 다시 썼다. 그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물기 때문에 습기가 차서 뿌옇긴 했지만 조금 더 깨끗해진 세상에서 본 그녀는... 역시 엄청나게 예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알이 띠용 하고 튀어나올 정도로. 잘 못 본 게 아니었다!
“아, 네… 봐 드릴게요.”
빛나는 홀린 것처럼 그녀의 말에 멍청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미안하다고 하는데 안 받겠다고 할 인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있다면 시력이 아주 나쁜 사람이겠지!
“그나저나… 어쩌지, 집이 이 모양이 돼 버려서… 흐음. 아, 내 이름은 면다미야.”
여자는 빛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원룸을 살피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이름을 말했다.
“면담이요? 이름 특이하네요, 외자예요?”
빛나는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말 무심코 반사적으로 물었던 것이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면, 다, 미이이. 세 글자야.”
“아, 아아… 그, 그래요…”
다미의 말에 빛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이 특이하네, 면씨도 있나?
“아무튼,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거야?”
다미가 슬며시 무릎을 살짝 굽히며 빛나와 시선을 맞추고 물었다. 빛나는 코 앞에서 다미의 얼굴을 마주하자 뺨을 시뻘겋게 붉혔다. 이런 이 세상 인간이 아닌 얼굴을 코 앞에서 마주치면 누구라도 이럴걸! 내가 이상한 게 아니야!
“여, 옆집… 이사하려고 계약 하기 전에 보려고… 온 건데요. 실수로 잘못 들어온 것 같아요. 부동산 할머니가 주소를 써 주셨는데 글씨를 전혀 못 알아 보겠어서...”
빛나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자 다미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재미 하나도 없는데. 아, 참! 이렇게 친한 척 하다가 공사비 물어 내라고 하면 어쩌지?
“아아, 옆집에 이사 올 사람이었구나. 음, 만나서 반가워. 집 계약 할 거지? 여기 월세가 엄청 싸거든.”
“그건 모르겠어요… 아직 방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
“할 거지?”
빛나는 다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끊자 눈을 깜빡이며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서 빛나는 말문이 막혔다.
“네가 들어오는 바람에 이렇게 됐으니까. 이 개판에서 어떻게 살아? 앉을 데도 없잖아. 난 여기 아는 사람도 없어서 신세 질 데도 없단 말이야. 마침 옆집이라고 했으니까... 아, 기왕 이렇게 된 거 부동산에 같이 가서 계약하고 올까?”
“네?”
빛나는 다미가 웃음을 띠고 말하자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억울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무단침입은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뭘 훔치지도 않았고 그냥 집이 혼자 맘대로 터졌는데 왜 그게 내 탓처럼 되는 건지.
“가자, 가자. 여기서 일어났던 일은 내가 할머니한테 자알 말해 둘 테니까. 가서 월세 계약서에 도장 쾅 찍고 오는 거야. 약속한 거다? 특별히 나도 같이 가 줄 테니까.”
다미가 말을 마치고 굳게 잠겨 있던 현관문을 열었고 열린 문 바깥으로 빛나를 밀어냈다.
“뭐, 뭐라고요? 자, 잠시만요… 잠깐! 으윽…!”
빛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텨 봤지만 결국 밀려나고 말았다.
말라 보이는데 힘이 왜 이렇게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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