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곳곳의 잉크가 번져 있다.
안녕, L. 널 안 본지 겨우 닷새인데 벌써 너무 오래 전에 본 기분이야.
나는 다른 애들이랑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는 좋은 숙소를 발견해서 그곳에서 다같이 머물고 있어. 주변에 워낙 사람이 많아서 곧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운 좋게 멀쩡한 음식을 많이 발견해서 다 같이 나눠먹었어. 오랜만의 사람다운 음식이라도 다들 좋아하더라. 너한테도 나눠주고 싶었는데.
세상에, 지금까지 저 녀석들을 어떻게 통제한 거야? 너가 말도 없이 이탈하고 나서 며칠동안 얼마나 아비규환이었는지 몰라. 널 찾으려고 이탈하려는 사람을 잡아야 하지, 서로 싸우는 애들은 또 겨우 말리고, 네가 사라지니까 다른 무리들이 우리를 얕보고 뒷통수 치러 오지.. .. 그런 일들을 수습하다 보니까 내가 팀의 리더가 되어 있는거 있지.
세상에, 내가 리더란다. 이해돼? 그 작고 가녀리다는 평만 받았고 맨날 얕보이던 내가! 너도 내가 리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놀라 자빠지지 않을까 생각해.
그래도- 앞에 이야기했던대로, 잘 지내고 있어. 팀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다시 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다른 애들에게 위안과 든든함? 을 많이 줬나봐. 어제부터 슬금슬금 네가 이탈하고 난 뒤에 했던 일을 사과하는 애들이 생기고 그러더라. 솔직히 권력의 맛이 나쁘지는 않은데... ... 목숨과 직결되는 일이다 보니 책임감이 좀 부담스러운 것도 있어서, 네가 있는 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어.
새삼, 넌 이런 일이 아니여도 늘 그런 사람이었지?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그땐 네가 철이 없어서 타인들을 끌어들이고, 성격 안 좋은 사람들 챙기고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런 네 말솜씨를 배워뒀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사흘 정도 뒤에, 동네 뒤에 있는 산을 지나 다른 지역으로 갈 예정이야. 그곳에 다른 사람들이 만든 쉘터가 있다나봐. 혹시라도 같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또 산행이니까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날은 아침에 산 입구에서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봤다가 같이 움직이려고.
너만큼 친절하거나 남을 잘 믿지 못해서 우리 거처에 우리팀이 아닌 사람들을 데려올 순 없지만, 그정도는 할 수 있겠더라. 정작 여기 사람들은 다 일행이 아니었다가 네 덕분에 일행이, 친구가 된 사람들인데.
그래서 아직 네 감염을,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나봐. 그 폐공장지대에 다시 돌아가려고 하고 말이야. 일행을 포함해서 그곳에 가려는 사람들은 내가 여러가지 방법으로 막아보려고 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겨우 끌어모은 것들의 소굴로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
보고 싶네.
하지만 널 보는 일이 가장 최악이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마을 곳곳에 인사를 남기고 갈게.
잘 살아남을테니까 걱정 마.
그동안 고마웠어.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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