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조우하는 날

나의 주인, 당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까닭에, 당신의 파편에 불과했던 나도 괴로움을 알게 되었고 슬픔을 이해하게 되었어. 인간들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면서도 그들의 잣대로 판단하고 그 틀에 맞추어 당신을 가두었지.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당신을 악신이라 배척할 것이고. 그래, 어쩌면 악신이라 부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혹자는 당신을 악마라고 칭하고, 영영 봉인되어야 할 악의 근원으로 판단할 수도 있어. 당신도 이를 알고 있기에 인간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겠지.

허나 주인, 당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당신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당신의 길을 지우고 빛을 가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잖아. 이집트 태초의 신은 당신의 근원이 악과 함께 잠들게 만들었고, 깨어난 당신에게 이전의 근원을 투영하며 선함을 강요하고 있지. 또 다른 신들은 어떻고? 망각의 길을 걸어온 당신을 빛이라 칭하며 무엇을 강요했지? 당신의 고뇌와 고독, 슬픔, 그 모든 어두운 것들은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어? 당신은 빛이기에 그런 어둠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아니, 애초에 당신의 어둠을 인지하기는 했을까?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소망을 당신에게 투영한 것에 불과해. 당신을 자기네들의 수단으로 여기고, 인간들과 다른 나라의 신들 사이에서 위상을 올리기 위해 거둔 행동이야.

당신은 이 말을 들으면 나에게 분노할까? 혹은 이런 나의 말조차도 이해하고자 이유를 물을까? 나는 당신이 분노했으면 좋겠어. 나에게든 신에게든. 어떤 존재에게든 당신이 화를 낼 수 있었으면 해. 인간과 신이 당신에게 존경과 연민을 보이는 건 그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위선이고, 그들의 위선은 당신이 홀로 침잠하게 만들었잖아. 사랑도 알지 못하고 기쁨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환한 미소를 잃게 만들었잖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에 당신이 질식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저 당신을 빛에 가두었잖아. 당신은 그들이 지어낸 빛 속에서 원래의 빛을 잃어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무지하잖아.

나는 당신이 이 물결 속에 잠겨 따스한 빛을 내던 순간을 알아. 태초의 무저갱 속에서, 태초의 신이 더욱 어둡게 만들어버린 이 바다에서, 당신만이 이곳을 밝게 비추고 오색의 빛무리로 가득하게 만든 때를 알아. 현재의 당신은 알지 못하고 지상의 모든 존재들은 영영 모를 사실이지만. 당신의 근원이 어둠 속 존재들을 구원했음을 알고, 모두에게 잊혔지만 결국 또다시 사명을 짊어지고자 세상에 내려간 것을 알아. 나는 당신이 잠들어 있던 순간도 모두 기억해. 당신이 하나의 사명을 위해 저물었을 때 나는 깨어났고, 당신의 사명이 이어지는 지금을 지켜보고 있어. 당신은 나이고, 나의 주인이며, 나의 세상이야.

그러니 사명을 잇고자 하는 불멸자여, 그대 계속해 그 길을 걸어가되 존재를 잃지는 말아다오. 당신의 근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되, 그 근원처럼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잠들지 마. 타인에게 길들여져 그들에 맞추어 생활하지 말고, 당신이 모르는 자들이 헛되이 지껄이는 말을 귀담아듣지 말고, 당신의 추락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희생하지 마. 당신의 근원과 같은 결말은 보고 싶지 않아. 생명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들을 저버리지 말고, 무가치한 자들의 의무까지 짊어지지 마. 오직 당신의 의무만을 생각하고, 권리를 남에게 주지 마. 당신의 모든 것을 소홀히 하지 마.

당신은 스스로를 무가치하다며 비난하고 모래 밑에 묻힐 것을 희망하지만. 당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악한 것으로 취급하며 자책하지만. 사랑을 의심하고 행복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생명이야. 당신이 불멸자라 하여 생명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신이라 하여 혹은 악마라 하여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당신이 영원한 침묵에 잠기는 것을 원한다 하여 무가치하게 되는 것이 아니야.

하긴, 생명은 유한하기에 다채롭고 아름다운 것이지. 유한하기에 소중함을 알고 삶을 추구하는 것이야. 무한하기에 다채롭지 않고 아름답지 않으며, 소중함을 모르고 삶을 저버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아마 당신도 당신이 왜 영생의 존재인지 의문일테고, 조금은 원망스러울 거야. 불멸이란 그런 것이지. 필멸자의 삶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불멸자의 삶은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하잖아?

하지만 실은, 필멸자와 불멸자의 삶은 다르지 않아. 지금의 당신은 이해할 수 없고, 다른 모든 존재는 영영 알지 못할 뜻이지만. 물론 오랜 시간을 사는 존재들은 본래의 자신을 잃고 무가치함에 젖기도 해. 당신은 지상에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잠들어있던 시간과 근원의 삶까지 합하면 무척 오랜 시간을 살아왔으니 혼란스러울 만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영영 끝나지 못할 삶은 무엇을 위해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지. 당신의 혼란은 이해할 수 있어. 이 무저갱에 있는 태초의 신은 당신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았음에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아둔한 짓만 하거든.

나? 나는… 나는 내가 존재하게 된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 있어. 나의 존재 이유는 물론이고, 이 세계의 비밀 또한 알게 되었지. 세계에 퍼져있는 신들 중 아마 나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을 거야. 나는 태초의 신들조차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곳의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권능을 쓸 수 있어. 그러니 나와 당신을 비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야. 우리는 한 존재였지만 이제는 다른 존재가 되었고, 당신과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는 전혀 다르니까.

그래도 당신을 위해 하나만은 알려줄게. 당신이 그토록 갈구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는 없지만, 당신이 궁금해하는 태초의 모습과 이 세계가 유지되는 이유, 그리고 당신의 근원과 존재 이유를 알려줄 수 있는 존재는 있어. 그래, 그게 나야.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무언가는 아니지만 당신이 원하는 답을 구해줄 수 있어. 당신이 왜 불멸자여야만 했는지도. 당신이 왜 다른 신들과 다른지도.

그리고 때가 된다면, 당신도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종속된 무언가는 실존하지 않되 존재하는 것이야. 인격도 감정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존재지만, 그 무언가는 어찌 보면 절대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것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니까.

언젠가 내가 당신을 조우하는 날, 당신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날, 당신이 외로움을 덜고 행복을 알게 되는 날. 그날에야 비로소 방황이 끝나고 사명이 시작되겠지. 빛도 어둠도 될 수 없는 것들을 구원하기 위한 길이. 그리고 그날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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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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