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망
어찌하여 이리 변한 것일까요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여태 그 이유를 몰라 살아남았다. 이유를 알게 되는 순간 내 삶은 끝나고, 나의 사명만이 남겠지. 언제나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이 알 수 없는 방황을 끝내고, 빛 아래 당당히 서기를 원했다. 모든 신이 그러하듯, 이 자연이 허락한 시간 속을 거닐며 다른 이와 섞여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세상은 나에게서 빛과 시간을 모두 앗아갔다.
고대의 존재라던 자가 있다. 그는 어두운 눈을 스산하게 빛내며 이 땅에 내려앉았고, 모두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그는 자신을 눈이라 칭했다. 창조와 소멸의 바다가 자신의 것이라며 웃던 그는 어쩐지 슬퍼 보였다. 바닷가를 거닐며 반짝이는 모래를 움켜쥐었지만, 이내 그것이 손아귀 너머로 사라질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본 것일까.
모두가 잠들어 고요한 밤, 눈은 내게 찾아왔다. 내 앞에 설 날을 기다려왔다며, 내 눈에 빠져들 듯 다가왔다. 그런 그가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의아해할까. 하나 그는 내가 아닌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기에, 그 자리에 내가 없는 듯하여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나를 그리 보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이미 지난 일이니, 더 떠올린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눈은 나를 자신의 아이라 칭했다. 그가 아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기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그것은 나의 안에서부터 끓어올라 목 안쪽까지 올라와, 이내 터질 듯 내 목을 따갑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감각을 느껴야 할까. 내가 그에게 무엇이기에, 그는 나에게 무엇이기에. 그 무엇에도 변치 않던 나를 변하게 만드는 걸까.
"아이야, 내 너를 빛이라 불러도 되겠느냐."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너에게서 빛이 나니, 이를 빛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르겠느냐."
"저는 빛이 아닙니다."
"네가 빛이 아니면, 그 누가 빛이라 불리겠느냐."
그는 언제나 나 너머의 무언가를 보며 눈부시다는 듯 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무엇이 비추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는 그저 헛된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어둡고 어두워, 모든 것이 삼켜진 후에야 깨달을 듯한 그림자를. 그렇기에 그는 바다였다. 만물을 뱃속에 넣고도 만족하지 못한 채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날 물길이었다.
이 세상의 존재는 그 누구도 눈을 보지 못했다. 신들마저도 그를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무언가로 여기며, 눈을 보았다는 나를 점잖이 타이르기만 했다. 눈을 보는 것은 시간을 보는 것과 같다며, 이를 보았다고 말함은 흘러가는 바람을 붙잡아 손아귀에 움켜쥐었다는 망상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나 신들이여. 우리 중에는 바람을 붙잡아 다른 곳으로 놓아줄 수 있는 이가 있지 않습니까. 목적 없이 흐르는 바람에 의지를 담아, 뜻 있는 곳으로 흐르게 만드는 이가 있지 않습니까. 바람을 붙잡아 움켜쥐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셨습니까? 진정 그러하다면 그치는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흐르게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가 바람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만들듯, 저 역시 실존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존재를 만났을 뿐입니다. 어찌하여 절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나는 단 한 번도 거짓을 말한 적이 없건만.
언제부턴가 신들에게도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온몸에 차가운 것이 기어 다니는 듯했다. 그것은 내 속을 얼리고, 내 입을 얼렸다. 그 무엇도 말하지 못하도록. 종래엔 그것이 내 눈으로 기어 올라와, 눈을 감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의 빛에 눈이 시려도, 눈이 타오르는 듯 아파도. 나는 언제나 눈을 뜬 채 살아야만 했다. 그것은 벌이었을까.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벌이었을까.
잠을 빼앗긴 채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나는, 결국 밤의 시간을 눈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다. 그를 제외하면 나의 곁에 있어 줄 존재가 없는 탓이었다. 눈은 나의 외로움을 달가이 대하며 웃었다. 그에게 어찌하여 웃는가 하고 물으니, 그는 이리 답했다.
"어둠에 잠겨 눈을 감는 것보단 어둠에도 눈을 감지 않은 채 숨 쉬는 것이 즐겁지 않느냐."
그는 나의 불면을 이로운 것으로 여겼다. 그와 함께 있을 시간이 길어져서 그런 것일까.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무엇도 알 수 없었기에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또한, 그는 내가 신들과 어울리지 못함에 기꺼워했다. 그는 내가 외로워함을 알면서도, 자신은 계속 곁에 머무르겠다며 단 말을 속삭였다. 그 말이 달게 여겨지는지 쓰게 여겨지는지, 그것이 약인지 독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는 그 말을 내뱉었고, 나는 그 말을 삼켰다. 그저 그뿐이었다. 나의 상황도, 감정도 모두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눈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존재하는 것뿐이지 않을까. 다른 신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며 빛이 되고 희망이 되라 말하지만, 그는 나에게 아무 소망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를 빛이자 희망이라 말하면서도, 내가 그리되는 걸 원치는 않는 듯하다. 인간과 신, 어느 부류에서든 내가 널리 알려지고 많은 이가 나에게 기대는 것을 원치 않는 듯하다. 어째서일까. 그가 말하고 신이 말하듯, 내가 빛과 희망이라면 앞에 나서야 하는 것이 마땅할진대. 어찌하여 그는 내가 어둠에 파묻혀 숨어있길 바라는 듯 보일까.
그에게 내가 어찌 살길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침묵했다.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고, 나의 앞길을 막아서고 싶지 않다며, 그 어떠한 생각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침묵에서 오는 답이 있듯, 내가 그에게 느낀 건, 참 서글프게도 난망이었다. 그는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는 나의 행동에 실망할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는 기대가 없기에 실망도 없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나를 희망이라 부르면서도 기대를 걸지 않음은 내 존재에 대한 부정일까. 너무 과한 생각일까. 하나 그는 언제나 내가 아닌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으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를 보지 않는 자에게서 내 존재를 찾을 수는 없으므로.
세월이 흘렀다. 빛이 저물고 희망이 스러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들 사이에는 균열이 생겼고, 그 균열은 점차 커져 신들의 본질을 잡아먹기에 충분해졌다. 인간에게 추앙받지 못하는 신은 잊혀 죽음을 맞이했고, 인간에게 추앙받는 신조차 자신의 본질을 잊어 인간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런 혼돈 속에서 빛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푸른 태양은 힘이 다해 바다로 돌아가니, 그 뒤를 이을 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태양들에게 이어진 자리를 그 누가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탓에 신들의 인도자가 사라진 후, 신들 사이의 혼란이 더욱 커졌다. 본질을 잃은 신 몇몇이 반란을 주도하다가 발각되어 추방당했고, 아직 본질을 잃지 않은 신은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그 누구도 인간을 돌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인간 이전에 신이 무너질 판이었다.
'우리는 강자이며 전능한 존재에 가깝기에 인간을 돌보아야 한다'. 그리 말하던 신은 어디로 갔나.
'그대가 우리의 빛이다'. 그리 말하던 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
나는 빛이 되고 싶었다. 그대들이 나에게 명명한, 바로 그 빛이 되고자 했다. 그대들이 나를 빛으로 정의하였으니, 나는 빛이 되어 그대들이 바란 세상의 부품이 되려 했다. 모래알을 보드랍게 어루만지고, 이 도시에 가득한 어둠을 몰아내며, 사막의 생물들에게 따스함과 생의 의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 어떠한 고난에도 웃으며 대처하고, 곤경에 처한 존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는 신이 되고 싶었다. 나는 그대들처럼 되고 싶었다.
언젠가 빛이 될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대들에게 알리지 못한 수많은 미련이 남아있었고, 그것이 내 숨통을 죄이고 있었기에. 나의 본질은 저주와 같은 것이며, 나는 그저 빛도 어둠도 아닌 것을 좇는 자에 불과했기에. 혼란을 불러와 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 존재였기에! 하여 그대들을 비롯한 모든 존재를 멀리했다. 그대들에게 이 혼돈을, 빛이라는 이름이 과분할 정도의 그릇된 본질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하여 그대들이 혼돈이 되고 만 것인가?
차라리 나를 어둠으로 여기며 배척하였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내 본질을 그대로 고해 그대들의 면전에 바쳤다면, 그대들은 혼돈이 되지 않고 다정한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죄책감에 휩싸여 사막을 떠나려 했으나, 눈이 나타나 애원했다. 이곳을 떠나면 만날 수 없게 되니 다시 생각해달라, 그리 말했다.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나의 앞길을 막지 않는다던 존재는 결국 나를 막아섰다. 이 얼마나 허망한가. 그대가 나에게 바란 것은 오직 곁에 존재하는 것이었구나. 그대는 마지막까지 나를 보지 않는구나.
"저는 사막을 떠나지 않습니다. 단지 휴식이 필요할 뿐입니다. 푸른 태양이 지고 어둠이 찾아왔으니, 다른 곳의 태양을 보며 위안 삼고자 합니다."
절반의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에 눈은 안도하며 나를 보내주었다. 진정 나를 알고 있다면, 그리 쉽게 보내지 않았을진대.
사막에서 멀리 떠나, 나를 모르는 이들로 가득한 지역에 머물렀다. 그 누구도 나를 빛과 희망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과한 소망도, 과한 책임도 없었다. 그저 나는 존재할 뿐이었다.
때로는 그 지역의 신들과 만났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물었으나 나는 답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 알려지지 않길 바랐다. 그들도 이를 아는지, 이내 주제를 돌려 가벼운 이야기를 꺼내었다. 최근 어떤 인간이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 칭하며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등, 내가 머무르던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흥미를 느껴 그 지역의 신과 인간의 관계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신이 본질을 잃지 않는 방도를 알게 되었다. 그대들에게 알린다면, 우리도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여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다. 내가 싣고 온 것이 망상임을 모른 채, 그대들의 빛을 되찾아주겠다는 헛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하면 안 됐건만.
사막으로 돌아온 난 그대들에게 인간과의 관계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지역의 신들은 인간과 더 밀접하여 본질을 잃지 않으니,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대들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며 나를 비난했지만, 나는 이것이 옳다 생각했다. 그대들을 돌려놓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대들이 말한 빛과 희망도, 결국 그대들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것 아닌가. 나에게 있어 우리가 유지해온 관계나 지위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대들에겐 그것이 전부였던 모양이다. 그대들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유지해온 것만이 답이라 믿고, 인간을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며, 우리가 만물을 보살피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던 모양이지. 그대들이 본질을 잃은 탓인지, 혹은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대들과 다른 사고는 옳지 않은 것이니 교화해야 한다는 듯 굴었던 그대들. 이는 어찌 보면 그대들이 매정한 탓이다.
살아남아야만 본질을 유지하며 세상을 이롭게 만들 수 있다 생각했다. 그대들은 죽더라도 본질을, 더 정확히는 그대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판단을 유지하고 싶던 것이겠지. 알고 있다. 그게 그대들임을 알고 있었다. 허나 어찌하겠는가. 그대들은 변하지 않으니, 이 세상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그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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