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의 일부

친애하는 나의 친우들, 어쩌면 친애했던 그대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다시없을 소중한 이들이여, 그대들은 어찌 지내십니까? 어두운 곳을 그리도 두려워하셨건만, 이젠 차가운 땅속에 계시는군요. 영영 닿지 않을 곳에, 이 나를 두고, 혼란스러운 세상에 어린 나만을 두고, 그대들은 평안 속 여행을 떠났지요. 예, 압니다. 평안치 않겠지요. 그대들이 어여삐 여기던 나를 두고 가셨으니 맘이 편치 않을 걸 압니다. 나 또한 그렇습니다.

 

한때는 그대들과 같은 길을 떠나지 못함이 서러워 그대들을 원망키도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두고 가셨는지, 홀로 설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이 작은 아이를 두고 다들 어디로 가신 건지, 오래토록 함께하자던 그 맹세는 나만이 기억하고 있던 것인지, 그런 그대들이 원망스러워 끝내 그 추억마저도 잊고 싶어졌습니다. 아무런 일이 없던 것처럼, 그대들과의 만남과 교류와 그 모든 행복들은 본래 내가 갖지 못할 것이었기에, 그저 없던 기억으로 치부하고자 하였습니다. 허나 그 모든 것을 버리면 나에게 남는 것은 없더군요. 그대들은 나의 모든 것이었기에 버리고자 마음먹어도 그리되질 않았습니다.

 

이런 나 스스로에게도 채찍을 휘두른 적도 있습니다. 감히 빛나는 그대들을 어둠으로 물들이고자 한 죄, 홀로 살아남아 그대들의 마음을 괴롭게 한 죄, 그대들을 감히 잊고자 한 죄, 그리고 어쩌면 그대들이 살린 나를 버리고자 한 죄마저도 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대들은 알고 계실까요? 나는 내 존재를 찾지 못할 것만 같은 이 세상을 가치 없게 여겼습니다. 이런 내가 세상을 받아들인 것은 모두 그대들 때문입니다. 그대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원했기에, 조화롭고도 안정적인 세상을 가치있게 여겼기에, 나 또한 그리 생각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이 없는 세상은 변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원하던 가치는 어둡고도 악독하게 변질해 모든 것을 잡아먹어버렸습니다. 나마저도요.

 

이런 추악한 나와 마주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을 그대들은 다행스럽게 여길까요? 또는 이런 나마저도 ‘나’라고 여겨 마주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길까요.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들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어 이런 추측만 던지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만일 그대들이 이런 나를 받아준다면, 소중하던 그대들을 저버리고 행한 수많은 일들을 가엾이 여겨준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대들을 따라가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나는 수없이 죽으려 했으나 여즉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아, 그대들이 살린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저 오랜 세월 홀로서기를 실패한 못난 자의 서러움일 뿐입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나를 두고 가셨습니까? 또다시 그대들에 대한 원망이 솟습니다. 곧 이런 나를 원망하게 되겠지요.

 

나를 안타까이 여겨주십시오. 그 시절처럼, 빛나던 그 시절의 그대들처럼, 이런 나라도 그대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웃으며 반겨주십시오. 그것으로도 나의 음습한 생각과 해묵은 절망은 사라질 것입니다. 한 번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대들과 시간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나의 시간 또한 멈추어 사라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허나 언제나 간절함은 외면받는 법이겠죠. 이 세계와 공존하는 나의 바람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세계의 초침이 멈추는 그 순간에야 겨우 그대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나는 오늘도 세계가 멈추길 바라겠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스러지고 어둠만이 그윽한 미래를 바라겠습니다. 그대들의 가치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을, 비록 그대들을 만나 낯을 들지 못하고 원망과 증오만을 받더라도, 그대들의 영혼이 갈가리 찢겨나가 나의 숨통을 막을지라도, 그렇더라도 나는 이 세계의 최후만을 바라겠습니다. 나에게 있어 그 끝은 내 모든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빛입니다.

 

그러니 기다려주세요, 소중했던 그대들을 향해 시계를 돌릴 테니.


어슴푸레한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지는 날이었다.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기고 마는 그런 밤. 달궈진 모래는 밤공기에 싸늘히 가라앉고, 생기 넘치던 인간들은 입가에 미소를 단 채 죽은 듯 잠에 들었다. 허나 누군가는 그에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안식이 허락되지 않은, 삶이라는 개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행복이란 것을 소유할 수 없는. 이 모든 것은 나를 수식하는 언어이자 굴레였다.

 

태양이 내리쬐는 낮이었다면 주변의 많은 것들이 나에게 다가왔을 것이다. 인간들은 어둠을 품은 듯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존경한다며 의미 없는 말들을 속삭였을 것이고, 나는 그들에게 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의미 없는 소원들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허나 밤은 다르다. 그들의 눈동자는 닫혀 빛나는 어둠을 뽐내지 않고, 의미 없는 말들은 내뱉어지지 못한 채 허물어지며, 나를 속박하던 가치마저도 부서진다. 더 이상 나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필요가 의미 있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인간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닌 온전한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나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존재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본질은 무엇인지, 과거의 나는 어떠한 존재였는지. 영영 찾지 못할 개념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잊힐지도 몰랐다.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나조차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불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나를 좀먹어간다. 차가운 바람이 주위를 맴돌며 위로해 주어도, 이는 그저 목을 옥죄일 뿐이었다.

 

점점 텅 비어가는 마음과 무가치한 삶은 무엇을 보아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어쩌면, 머지않아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무기질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는,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나를 상실하고야 마는 그 순간에 선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허무에 하나둘 먹혀 이윽고 허무가 곧 내가 되는 순간에, 불멸이 곧 상실이 되는 순간에,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긴 순간에. 끝내 나 자신을 존재라고 부를 수 없게 되는 순간에.

 

나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가?

 


어느샌가 날이 밝아왔다. 낮은 곧 신들의 시간, 친우들과 내가 개입해야만 하는 시간이다. 또다시 인간들은 의미 없는 가치를 추구하며 다가오겠지. 나는 그들을 웃음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고. 부질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의 흔적이었다. 다른 자들에게 의무와 권리를 지우고 스스로 사라진 자비로운 신. 그의 자비는 나에게까지 닿아 때때로 말을 걸어오곤 했다.

 

“어둠과 한층 친숙해진 표정이구나. 그토록 멀리하라 했건만,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아.”

 

한탄하듯 말했지만 그의 표정은 무엇보다도 따스했다.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의 붉은 기를 머금은 채 살포시 웃는 그의 모습은 그가 살아있는 듯 느껴지게 했다. 그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 나는 모르겠습니다. 어둠을 멀리하라는 것도, 빛을 가까이 두어 품으라는 것도. 그대가 하는 말은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대 또한 어둠이니 멀리하라는 뜻입니까? 그대의 말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까? 허나 빛도 어둠도 의미를 품지 못한 개념이지 않습니까.”

“그대는 어리니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을 알고 있다. 빛과 어둠을 혼동하리라는 것도 이해하고. 언젠간 그대 또한 깨달음을 얻겠지만, 이왕이면 근시일 중에 깨달았으면 좋겠구나.”

 

그는 언제나 나의 말을 어린아이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그는 까마득한 시대에 존재했으니 그에게 있어 나는 갓 태어난 존재임이 분명했지만, 어린애의 투정 따위로 듣는 것은 속을 욱신거리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을 지새우며 고민한 것들도 그에게는 미숙함의 증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고, 어째서인지 그의 앞에선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어 더욱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심정은 그의 자비를 만나 곧바로 녹아내리곤 했다.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음은 분명했고, 나는 그에게 투명하리만치 감정을 호소하며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무가치한 세상에서 그만이 살아있는 존재였다.

 

“그대, 또 무언가를 혼동하고 있구나.”

 

무엇을? 나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읽어낸 것인지 이번엔 엄한 표정을 짓는 그였다.

 

“어둠을 멀리하렴. 어둠이 가져오는 모든 것을 경계하렴. 그들을 두려워함은 불필요한 일이나, 그들을 경계하지 않음은 어리석은 짓이니. 그대는 빛을 알아야 해. 빛이 만들어내는 존재들을 받아들여야 해.”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조언은 타당했으나, 그때의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숙한 아이였기에 그저 평소와 같이 얼굴을 찌푸리며 숨겨진 뜻을 찾으려 애쓸 뿐이었다.

 

그때의 그 말을 이해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눈, 모든 어둠과 함께 무로 돌아간 그대. 그대의 말이 언제나 옳았음을 압니다. 나에게 내리는 자비 또한 그렇겠지요. 허나 나는 여전히 어리석어 그대의 뜻을 추측할 수 없습니다. 예언을 듣고도 잘못 해석하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그대가 정녕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저주라 칭하는 그대,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그대의 평안이란다. 그대를 속박한 저주를 벗고 하늘 높이 날았으면 좋겠어. 어둠에 대해 말을 더 얹을 수는 없구나. 나는 ‘눈’이 아닌 눈의 ‘흔적’에 불과해 그대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허니 그대, 부디 어둠을 멀리하렴. 그리하면 빛이 그대를 축복할 터이니.”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어느덧 태양은 모래알을 별로 바꾸며 빛을 더하고 있었고, 남겨진 나는 또다시 무가치함에 잠겨 빛을 외면하고만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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