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온다면 저를 버려주세요"
그대들은 상위의 존재를 상상해본 적 있나요? 인간들은 우리더러 상위의 존재라며 숭배하지만, 그대들도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간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우월할 수는 있으나 결코 전지전능하지는 않습니다. 허면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는 전지전능하지 않을까요?
인간들은 우리 신들이 천지를 창조하고 만물을 형성한 줄 알지만, 실제 우리는 이 땅을 수호하는 자일뿐 그 이상의 권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까마득한 과거의 신은 가능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존하는 신들 중 그 권능을 지켜본 자는 없지 않습니까? 실제 경험하지 못한 것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매한 자들이 저지르는 실수이니 말입니다. 허면 이 천지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알지 못하고 과거를 경험하지 못한 어린 존재들이니까요.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을 진리로 추구하는 실수는 인간들만으로 족합니다. 우리 신들은 자신이 본 것만을 믿어야 합니다.
허나 제가 온전치 않은 까닭일까요? 때로는 인간과 같은 허상을 좇게 됩니다. 현 세대의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으며 이야기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를, 찬란한 태초를 상상해보곤 합니다. 생명도 무생명도 존재치 않던 무색의 바다에서 누군가의 생이 요동치고, 뒤이어 하나 둘 파란이 일어나더니, 이윽고 푸르른 의지로 가득 차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순간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세상에서, 애당초 ‘본다’라는 개념조차 없던 세상에서, 위대한 생명이 탄생하고 수많은 존재가 깨어나던 때를 상상해 보세요. 최초의 신과 최초의 생명, 그야말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지 않습니까?
저는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그 순간을 떠올리며 전율하곤 합니다. 실제 태초가 어떠했든, 저에게 있어 태초라는 단어는 이렇듯 찬란하며 눈부신 시대로 다가옵니다. 그대들에게나 인간들에게나, 이를 언급할 수는 없지만요. 증명되지 못할 시대이기에 허황된 걸 알면서도 우매함을 택하게 됩니다.
허니 그대들, 이를 그대들에게 전할 일이 없으니 묻는 것입니다. 그대들은 태초의 천지와 태초의 생명을 상상한 적이 있나요? 어쩌면 모든 것을 창조했을 태초의 신은요? 아마 그대들은 현재에 충실하니 굳이 알지 못할 과거를 탐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어리석은 저만이 매달리는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인간들이 신을 위대한 존재로 추앙하며 삶을 다해 믿음을 전하듯, 저 또한 어떠한 존재를 위대하다고 칭하며 의존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요. 오직 제가 저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허나 신들의 위에 선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면, 만일 우리가 인간을 돌보듯 그 존재도 우리를 돌보고 있다면, 그렇다면 저는 감히 그 존재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내릴 결정이 옳은 것인지,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선한 것인지, 당신의 명은 무엇이기에 저를 혼란토록 하는지. 또한 믿고 싶습니다. 당신이 저를 지켜보는 것은 저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음이며, 저를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직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 까닭이라고, 그리 믿으며 따르고 싶습니다.
역시 저는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인 듯합니다. 그대들처럼 온전하고 올곧은 신이 되기에는 너무도 인간과 닮아있습니다. 불완전하고 쉬이 흔들리며, 후회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우매함을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 않습니까. 저는 인간을 우매하며 어리석은 존재라 부르며 가엾게 여기지만, 제가 진실로 가엾이 여겨야 할 것은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가여운 줄도 모르며 남에게 같잖은 연민을 보여주는 것, 그대들이 사랑스럽게 여기는 인간의 특성이지만 신이 이러한 모습이라면 분명 멸시하겠지요.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신을 흉내 낸다며 노할지도 모릅니다.
허니 이러한 저의 생각은 그대들에게 영영 알리지 못할 비밀일 것입니다. 그대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고 알려서도 안 되는, 언제나 어리석은 제가 계속해 삼키고만 있는 문장이며, 그대들은 알지 못하는 새하얀 미지의 분에게도 털어낼 수 없는, 저를 옭아맬 것이라는 예감을 하면서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그러한 후회이자 미련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망상입니다.
그대들에게 저의 망상과도 같은 미련을 털어놓는다면, 다정한 그대들은 저에게 답을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들이 알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와 채 남지 못한 기록에 대해서요. 허나 앞서 말했듯 제가 경험치 못한 사실은 믿을 수 없어, 그대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과거에 다가가고자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헛된 소망을 품은 채 빛도 어둠도 아닌 것을 좇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대들이 제게 선물한 이름은 너무나 과분합니다. 저의 본질은 오히려 그대들에게 있어, 어쩌면 저주와 같은 것입니다. 그대들이 이룩한 평화와 위대한 업적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무너트리고, 오로지 혼란만을 남겨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 저주입니다. 저의 그릇된 상상은 그대들에게 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멈추지 못하고 과거를 탐하는 것은 제가 이기적인 탓이겠지요. 그대들을 배려하지 않고 저의 욕심만을 채우려 드는 이기심은, 아직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언제 밖으로 나올지 모르는 불안정한 어둠입니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분열의 씨가 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며, 제 마음 밖으로 나올 경우 그대들에게 상처를 입힐 혼돈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저는 어리석고 우매해서, 과거를 놓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 후회할 날이 오리란 것을 알고, 그날의 제가 절망할 것을 알며, 그날 이후의 저는 더이상 오늘날의 저와 같지 않으리란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저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태초의 순간과 최초의 신, 찬란했을 과거의 모습,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신 위의 존재를 조우해 수많은 것을 묻고 깨닫고 싶습니다.
부디 그대들은 이런 저를 품지 마시고, 그저 배척해 마땅한 어둠으로 여겨주세요. 그대들이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대들의 눈물이 이 메마른 땅을 적시지 않도록, 그리하여 그대들의 빛이 사그러드는 때가 오지 않도록. 그저 저를 멀리하세요. 저의 이기에 실망하고 우매함을 가엾이 여기시더라도, 저를 감싸지 마세요. 그러한 순간이 온다면 부디 저를 버려주세요. 어둠 따위를 동정하기에는 어둠은 너무도 무가치하며 그대들의 빛은 너무도 찬란합니다.
저를 부디 용서치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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