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펩의 이야기

“아펩, 너는 왜 악이 되길 자처한 거야?”

그저 순수한 의문이었다. 지금껏 봐온 아펩은 마냥 악한 존재가 아니었고, 배려심이 부족할 뿐 나름의 존중을 해 주는 아이였다. 단순히 악하기에 바라지 못할 것을 탐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텅 빈 호숫가로 시선을 내리며 오래된 것을 회상하듯 까마득한 낯으로 물었다.

“네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네가 아는 악은 무엇이지?”

그는 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했다. 평소의 자신만만하던 낯은 흐려졌고, 우리의 주변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는 신중히 단어를 고른 끝에, 귀 기울여 들어도 흘려버릴 것처럼 작은 문장들을 버석해진 입 밖으로 꺼내었다.

나는 이집트 최초의 악이었지. 허락되지 않은 권능을 탐하고, 빛을 삼키며, 인간들을 타락시키는 삿된 것. 어느 신은 본인을 바다의 주인이라 칭하며 나를 배척하려 들더군. ‘그대는 세상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태양이 뜨면 달이 지는 것은 순리이거늘, 어찌하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이들을 불러들이는가?’

그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가 어째서 인간들 앞에 나섰는지, 간절하지 않은 그가 어찌 감히 알겠는가? 그는 상실을 몰랐고, 죽음을 몰랐다. 그는 영영 잊히지 않을 존재였기에 우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펩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너는 이곳을 만들었으니 알고 있겠군. 네가 생각하기에 잊힌 신이란 무엇이지? 단순히 문헌에서 사라진 자들을 일컫는가? 그래, 그것까지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고. 그렇다면 알아두어라. 신에게 있어 망각은 존재의 상실과도 같다.

신은 인간의 상상과 믿음에 의해 태어난 존재. 인간에게 쓸모가 없어진다면 곧바로 버려지는 존재이지. 버림받은 신은 그들을 지탱하던 믿음을 잃고, 존재 이유를 상실하며, 곧 모든 존재에게서 잊힌다. 인간뿐만 아니라 같은 신의 기억에서도.

대부분의 신은 잊히기 전 수명을 다하지. 어떠한 이유에서건 바다로 돌아가며, 그 신은 인간에게 버림받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을 지켜주고 떠난 신이라며 추앙받았지. 허나 수명을 다하기 전 버려진 신은 다르다. 그들은 권능을 잃은 뒤 미쳐버리지.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신의 본질은 흐려지고, 그렇게 영영 잊히는 게다.

그는 웃었다. 곱게 모여있던 입술을 비틀었다. 잔뜩 구겨진 얼굴은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랐고, 이내 그의 분노를 대신하듯 까득 소리가 났다.

나는 그들을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때의 나는 오만했고, 운명을 가벼이 여긴 얼간이에 불과했다. 잊힌 신들의 본질을 씻어내어 권능을 되찾게 하겠노라고, 그리 맹세했다. 또한 두려웠을지도 모르지. 나의 수명은 일반 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고, 영원에 가까웠다. 내가 죽기 전 잊힐 가능성이 더 크다는 소리다. 나는 저들처럼 추악해지고 싶지 않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삶을 지속하고 싶었다. 그래, 나는 모두의 기억에 새겨질 악이 되기로 했다.

인간에게 있어 악은 계속해 경계해야 할 위협이지. 인간의 존속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악은 영원한 것이 아닌가? 인간은 언젠가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만, 그 어느 때에도 악에 대한 경계는 잃지 않는다. 선은 잊히기 쉬운 것이지만 악은 그렇지 않지. 내가 악이 된다면, 나는 절대 잊히지 않는 신이 될 테지. 어리석게도 그리 생각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펩을 위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의 자책 혹은 한탄은 듣는 나에게도 무거운 짐을 안겨주었지만, 그렇다 하여 내가 그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경중은 다르겠지만, 그의 말은 마치 죽기 싫어서 남을 죽였다는 소리와도 같게 들렸다. 그는 많은 인간을 죽였고, 또 많은 것들을 파괴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 본능으로 인해 나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그가 나의 아래에 있는 지금,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여 방관할 수는 있을까? 섣부른 위로도 할 수 없었고, 그에게 무언가를 따질 수도 없었다.

헌데 어느 날, 잊힌 존재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는 인간이 생겼더군. 그 어린 인간은 이미 이성을 잃은 신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가능할 리가 없는 일이었어. 그들에게 희망을 주다니? 아무런 판단조차 하지 못할 자들이 그의 말을 따르고, 그의 웃음에 함께 웃었다. 그는 잊힌 자들의 신이나 다름없었어.

릴의 이야기였다. 릴이 잊힌 신들을 찾아다닌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릴은 그들을 연민했을까? 어째서 릴이 말도 안 되는 사명을 따르려 했던 것인지, 아펩의 말을 들으면 알 수 있을까?

나는 그를 데려오기로 했다. 그와 함께 지내면 영영 잊히지 않을 존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잊힐지라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를 데려왔고,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평범하게. 단연코 수백 년간 평범한 생활이라고는 한 적이 없었는데, 너무나도 오랜만에 이성을 되찾은 기분이었지. 그는 우리의 신이었다.

우리는 그를 해칠 수 없었다. 우리의 희망이었고, 우리를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였으니. 그를 잃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었고, 그의 생은 우리의 것에 비하면 순간이었다. 우리는 그를 영원한 존재로 만들려 했다. 잃어버린 권능을 되찾은 뒤 그에게 양도하여, 그를 영원히 잊히지 못할 신으로 만들려 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이성이 돌아왔고, 권능이 희미하게나마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권능이 되살아난 때, 침입을 받았다. 우리를 배척했던 자는 바다를 이끌고 나타났고, 순리인 태양도 함께였다. 많은 자는 바닷속에 잠겨 소멸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우리의 신은 슬퍼했다. 신은 미안하다고 말한 뒤,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택했다. 그의 영혼과 우리의 본질은 뒤섞여 바다로 돌아갔고, 그 속에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의 신은 사라졌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견뎌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본질은 흐려졌다. 이내 나밖에 남지 않았을 때, 네가 나타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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