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의 부활

정신을 차렸을 땐 신의 영역으로 이동한 뒤였다. 나는 바닷속에서 얼마나 잠겨있던 것일까? 본래의 목적이었던 능력 회수도 달성했으니 어서 인간계로 돌아가야 했다. 체감상으로는 기껏해야 100년이 흘렀지만, 바다는 너무나도 변덕스러워서 실제 시간의 흐름과는 다를 가능성이 컸다. 저번에도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400년이 흘러있어 충격받지 않았나.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되도록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배신당했다. 화려한 신의 영역에서 전환된 풍경은 삭막했다. 원래라면 나름 활기차고 따뜻한 공간이어야 했다. 세트의 신전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사람의 말소리는커녕 생명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잿더미와 모래더미만이 흩날렸다.

전쟁이 시작된 지 꽤 되었음은 확실했다. 내가 이곳으로 나온다는 걸 알고 있는 세트가 신전의 보호를 포기했다면,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것일까? 어쩌면 세트도 이미 사막의 모래 한 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이 능력을 가지려 도박을 한 것은 모두 세트 탓이었다. 세트를 살리고 싶어서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내 존재를 걸었다. 디레가 아니라 세트 때문에, 나는 필멸자로서의 나를 버렸단 말이다. 세트가 없다면 전부 헛수고에 불과한 것들이다.

폐허가 된 신전처럼 내 마음도 무너지기 직전, 멀리서 피와 먼지로 뒤덮인 인영이 달려왔다. 그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웃었다.

“륜, 드디어 왔냐. 600년 만의 재회인데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눈의 바다로 간 지 600년이나 지났다고? 그보다 너는 왜 그런 꼴이야. 다치지 말라고 했잖아. 분명 떠나기 전에 약속했잖아. 몸을 사리라고, 다시 만났을 때 멀끔한 모습으로 웃으며 만나자고.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았으나 그 무엇도 내뱉지 못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신전을 포기했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소멸했을지도 모르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을 테니. 더 빨리 오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자,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한다고? 능력은 되찾았어? 네 몸은 멀쩡히 기능하고? 이번에는 영혼도 멀쩡하지?”

세트는 부러 호들갑을 떨며 내 주의를 돌리려 했다. 언제나 그랬다. 혼자 삽질하며 끝을 모르고 파고 들어가는 나 때문에, 그는 언제나 웃으며 모든 걸 가볍게 만들려 했다. 바보 같은 세트. 나는 땅을 파다가도 그의 가벼운 말에 안심하며 모든 걸 묻어버리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트, 잘 들어. 우리는 신의 영역으로 가야 해. 그리고, 그리고….”

제대로 설명해야 했다. 그가 나를 믿고 있으니까, 그 믿음만큼 의젓한 모습으로 부응해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능력이 생겼다고는 하나 나는 결국 평범한 인간이었다. 인간으로 시작한 나는 저들처럼 신으로서 사고할 수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그는 서둘러 자신의 모습을 정돈했다. 몸에 묻은 피와 먼지를 씻어내고 단정한 차림으로 돌아왔다.

“미안. 약속을 어길 뻔했네.”

...너 정말 뻔뻔한 거 알아? 내 망설임을 그대로 치워버리고, 너에게 짜증 낼 거리를 굳이 만들어주고 있잖아. 그렇게 또 내 고민을 없애버리려는 거지.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고는 깨끗해진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전쟁이 끝나갈 시점이라면 더욱 서둘러야 했다.

“일단 신의 영역으로 가서 설명할게. 시간이 없으니 빨리 이동하자.”

세트는 씨익 웃으며 품 안에 나를 가두었다. 이내 나를 풀어주었을 땐, 다시 화려한 신의 영역이 펼쳐져 있었다.

 


신의 영역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고, 그 호수의 중앙에는 하늘을 꿰뚫을 듯 치솟은 기둥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그 기둥에서 씨앗이 나오고, 그것이 자라 연꽃으로 만개한 뒤에는 그 속에서 신이 태어난다. 나도 그랬고, 디레도 그랬다. 태초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지금 시도하는 것은 반대이다. 오히려 신을 연꽃으로 만들고 씨앗으로 바꾸어, 다시 연꽃을 피워내는 행위이다. 현재로서는 단 한 번도 실행되지 않은 이론. 원래의 세계에선 디레의 첫 죽음이 만들어냈을 과정이었다. 나는 원작을 깨고 세트를 살리고자 한다.

나와는 달리 전쟁을 그대로 겪은 세트는 지금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 알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건 그의 다정함 때문이겠지. 그래, 이것 때문에, 이 다정함을 잃고 싶지 않아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다.

세트를 붙잡고 호수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세트는 ‘창조주도 아니고 일반 신이 호수에 들어가다니, 저주받는 것 아니냐’라며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잠자코 따라왔다. 수면은 점점 깊어졌고, 어느샌가 물은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더 깊이 들어가야 했으므로, 세트에게 안기며 기둥 근처까지 걸으라고 했다.

마침내 손을 뻗으면 기둥이 닿을 거리에 다다랐을 때 세트에게서 떨어져 능력을 끌어올렸다. 바다의 의지가 깃든 한, 내가 이 호수에 빠질 일은 없었다. 세트는 내게서 바다를 느낀 듯했다. 잠시 놀란 듯 멈칫했지만, 이내 얌전히 기다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전에 말했지? 디레의 부활은 연꽃으로 이뤄진다고. 따라서 디레의 불멸은 불사가 아니며, 그저 죽은 뒤 새로운 신으로 태어나는 거라고.”

“그랬지. 설마 나도 연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냐?”

눈치 빠르긴. 내 비밀을 전부 말했으니 가능한 추측이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 세트는 언제나 바보였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내 표정을 본 그가 부러 사나운 표정으로 자길 멍청이로 생각했냐며 으르렁거리는 것도 당연했고. 이 무거운 상황에서도 서로에게 장난을 거는 걸 보면,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믿고 있는 것일까. 굳건한 신뢰 위에 있으니 상대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겠지.

세트를 올려보던 나는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에서 손짓했다. 함께한 세월이 수백 년인 까닭에, 그는 빠른 속도로 이해한 뒤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세트의 검고 굳센 눈동자를 마주하니 걱정도 사그라드는 듯했다. 나는 손을 뻗어 세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너는 연꽃으로 돌아갈 거야. 연꽃은 점차 작아져 씨앗이 될 것이고, 그 씨앗에는 바다의 의지가 섞이겠지. 물론 내 영혼도 일부 섞일 예정이고. 제일 중요한 건….”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제일 고민했던 것, 가장 걱정했던 것이 이 부분이다. 죽음을 수용하겠다고 말한 세트에게 어쩌면 가장 큰 상처를 입힐 내용. 나의 이기심을 담은 내용.

차라리 말하지 말고 실행해버릴까, 내 양심을 무시하고 싶게 만들었던 것. 세트는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와 이마를 맞대고 내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보이는 최대의 신뢰 표현이었다.

“너는 능력도 기억도 온전할 거야. 그 무엇도 잃지 않을 거야. 다만, 너의 시간은 멈추어버리겠지.”

능력을 얻으며 내가 잃은 것. 릴이 자신을 희생할 때부터 잃게 된 것. 디레는 영원히 경험할 수 없고, 눈 또한 알지 못하는 것.

우리는 모두 균형을 잃었다. 운명과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존재들은 각자가 시계의 초침을 갖고 있고, 서로 다른 시간으로 살아간다. 초침이 제각기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균형이야말로 세상을 이루는 근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초침을 잃었다. 누군가는 초침 없이 태어났고, 누군가는 후에 초침을 버렸다. 이제는 세트의 초침이 망가질 차례였다.

나는 세트의 시간을 되돌릴 생각이었다. 지금 세트의 시간은 자정이 다가오고 있고, 그의 운명은 곧 끝날 것이다. 이 시간과 운명이 끝나기 전에, 그의 초침을 거꾸로 돌려 최초에 가까운 시간으로 만들 것이다. 물론 어린 시절까지 돌리진 않고, 그 직전의 시간을 그의 최초로 바꿀 것이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시기의 세트로 초기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간 그의 시간이 흐르지 않도록 초침을 부숴야 한다. 나는 나름대로 창조주였기에 초침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지만, 세트는 그렇지 않다. 세계는 창조주이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들에게만 관대하며, 피조물들에게는 가차 없는 존재였다. 세트의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건 그것이 나의 선택이어서 그런 것이지, 세트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세계는 나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운명을 거스르는 피조물은 존중하지 않았고, 그의 초침을 온전히 떼어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고통스러울까? 초침을 부수면, 세트는 괴로워할까? 분명 그럴 것이다. 그 고통이 일시적일지라도, 불멸한다는 사실로 인해 영영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나도 알고 있다. 인간인 내가 생각하는 불멸과 신들이 생각하는 불멸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느끼는 불멸이 훨씬 더 거대함을 안다.

하지만 세트, 나는 이 이상의 선택지를 만들 수 없었어. 어쩌면 네가 그대로 죽는 것이 옳았을지도 몰라. 괜히 운명을 바꾸지 않고, 그냥 그대로 흘러가게 방관해야 했을지도 몰라. 그건 알지만 나는 널 살리고 싶었어. 널 잃고 싶지 않았어. 막막한 이 세계에서 나의 모든 걸 알면서도 믿어주었잖아. 허무맹랑한 이야기인데도 전부 믿어주었잖아. 결국 네 배려에 익숙해져서 다른 자들을 만날 수 없게 했고, 네 다정함에 취해 내가 신이 되게 만들었잖아. 네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사람으로 만들었잖아. 네가 나쁜 거야. 응, 이번에도 네가 나빴어.

그렇게 세트의 탓을 하며 눈을 감았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얼굴을 맞댄 채로 서 있었다. 서로의 숨이 섞이고, 붙잡힌 얼굴과 손의 온기가 비슷해질 때까지.

 


얼추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그제야 부끄러워졌다. 물론 세트와의 자잘한 접촉은 익숙하지만, 얼굴을 이렇게 가깝게 두고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다. 열이 오르는 기분에 서둘러 눈을 뜬 뒤 물러났다. 세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힘을 주지 않았었나 보다. 내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가볍게 얹어두었을 뿐이었다. 무거운 내 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세트는 눈을 뜨고 있던 것 같다. 내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이 그의 눈동자였으니. 걱정과 죄책감에 가라앉았던 심장이 단번에 입 밖으로 뱉어질 것 같았다. 어딘가 울렁거리는 심장을 다시 억누르며, 그의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그가 연꽃이 된 후에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널 기다리게 했지만, 너는 날 기다리게 하지 마. 너는 내가 믿는 몇 안 되는 신이니까, 신도의 기도를 들어줘야 해.”

마지막까지 내 이기심을 토해낸 뒤, 그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능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주변으로 물이 모여 연꽃 형상을 이루고, 마침내 만개한 연꽃이 꽃봉오리로 돌아갈 때.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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