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리온 안쿠닌에 대하여

선동과 날조로 가득한 이 뱀파이어의 인간 시절

Baldur's Gate by 아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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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리온 안쿠닌, 아랫도시의 전도유망한 젊은 치안판사. 사람들은 그의 반반한 얼굴과 부드럽게 곱슬거리는 백발에 가까운 은발, 매력적인 목소리를 칭찬하곤 했다. 그의 법봉은 늘 엄정하게 울렸으나 발더스게이트의 시민들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치안판사는 널리고 널렸지, 안쿠닌 씨가 아니더라도 뇌물 먹일 머저리들은 많다 이 말이야. 근데 뭐하러 그깟 법정을 구경 다니느냐고? 이 머저리 좀 보게, 그야 잘생겼잖아! 법정 옆에 사는 하프 드워프는 깔깔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공개법정이 열리는 날은, 먹을거리 장사가 아주 잘 돼. 판결 내릴 때 고 눈을 봐야 해, 눈을… 저어기 어디 늪지에 사는 마귀할멈이 봤더라면, 나 같으면 당장에라도 눈알 하나 파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을 거유!

그의 눈동자는 구슬처럼 빛났다. 사회에 찌들지 않은 투명한 눈은 법봉을 세 번 두드릴 때면 유독 햇살을 받아 타오르듯 반짝이곤 했다. 이 젊은 치안판사는 범죄자에게 관대하지 않았으므로 법정은 시민의식을 선도한다는 취지로 가끔 방청객을 받았다. 치안판사의 권한이라고 해 봤자 도둑질이나 소매치기, 혹은 이웃간 거친 다툼 정도의 경범죄를 판가름하는 정도였으나, 아스타리온이 낮고 엄중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읊을 때면 방청객들은 앉아 있던 투박한 나무의자가 폭풍해안 예배당의 대리석 계단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곤 했다. 사과 한 알을 훔쳐 굶주린 아이에게 건네준 죄로 옥살이를 하게 된 청년이 울부짖든 말든, 시민들은 아스타리온이 내리는 판결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이 도시에 참된 선고를 내리셨군요, 안쿠닌 씨! 남의 정의로 배를 채운 시민들은 공개법정에서 퇴장하며 그렇게 재잘댔다. 아스타리온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마담. 법복을 벗으면 저도 일개 시민이니까요. 발더스게이트가 살기 좋은 도시가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해가 질 때쯤 아스타리온은 퇴근 준비를 한다. 머리를 정리하고, 앞코가 약간 닳은 구두를 갈아신고, 얇은 코트까지 탁탁 털어 깔끔히 정리했다. 저녁식사로는 양고기에 구운 사과를 곁들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익숙해진 법정 문을 나섰다. 멀리 항구를 타고 들어왔을 소금기 가득한 공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초가을의 산들바람이 뺨을 스치자, 아스타리온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내심 오늘의 판결을 곱씹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배고픈 아이에게 주기 위해 고작 사과 한 알을 훔쳤다고 더러운 지하감옥에 몇 달간 처넣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사실 고민하고 있었다. 그에겐 상의할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있는 선배들은 구멍난 호주머니에서 술값이 동나면 대놓고 뇌물을 받았다. 제대로 된 판결을 받는 이가 드물었고, 소매치기들은 아스타리온에게 사건이 배정되면 이를 갈았다. 선배들은 아스타리온에게 충고하곤 했다. 그렇게 빡빡하게 굴면 이 일 오래 못 한다고. 형사 범죄는 더했다. 코앞에서 사람이 사라지고 죽어나가는데, 실종이며 살인이 비일비재한데도 정식 수사관들은 나몰라라 술이나 들이켰다. 일을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사람의 목숨이 가장 싸구려인 동네였다. 기껏해야 술 취한 비렁뱅이나 잡으러 다니는 치안판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아스타리온은 종종 회의를 느꼈다.

그러나,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거지? 여기선 다들 그렇게 산다. 이웃에게 닥친 부조리에 허울뿐인 동정으로 일관하며, 그 재앙이 내게만 일어나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다. 평등, 공정, 균형, 이 도시에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질 높은 삶을 위한 정신.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아스타리온은 매일같이 허공에서 줄타기를 했다. 하수구 아래 지하수로로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매일같이 외발자전거의 페달을 밟았다. 내일도, 모레도, 오래 지난 후에도 계속해서… …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아스타리온은 눈을 꿈벅였다. 어쩌면 저녁식사 전에 가볍게 산책을 하는 것도 좋겠다, 이런 좋은 날은 매일 오지 않으니까. 오후 5시 30분, 아스타리온은 항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항구는 온갖 소리로 가득했다. 멀리서 들어오는 고기잡이 배의 뱃고동, 방금 닻을 내린 선원들의 고함, 싱싱한 생선을 떼러 온 상인들의 높은 목소리가 한데 섞여 불같이 타올랐다. 신선한 바다내음이 발길을 휘감았다. 발 닿는 곳마다 뿌리내린 잡초가 버석이며 뒤틀린다. 관리되지 않은 연석이 달각달각 우그러진다. 붉은 노을이 바다에 섞인다. 굴절된 태양이 눈동자에 담겼다. 생각 많은 눈동자가 핏빛으로 빛난다.

아, 나는 정말 이 도시를 사랑해. 폐를 한가득 채운 산소를 만끽하며, 아스타리온은 속삭였다. 잔인하게도, 떠날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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