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하면 어쩌지"

“...디레가 날 원망하면 어쩌지?”

“그걸 이제 와서 걱정하는 거냐?”

“아니…. 하지만 그렇잖아. 내 멋대로 누굴 살리고 죽일지 정해도 되는 걸까?”

“어차피 다 죽을 놈들인데 뭘 그리 고민하냐. 네 덕에 나도 살 수 있고, 그 녀석도 친우를 모두 잃지는 않게 될 텐데.”

“하지만 결국 그들을 죽을 운명으로 만든 건 나잖아. 모두를 살리는 것도 아니고 너만 살리는 거잖아. 다른 신들도 살릴 수 있을 텐데, 그냥 놔두는 거잖아.”

나는 그게 마음에 걸려.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다물었다가 잠긴 목소리로 내뱉었다. 디레의 친우들을 죽이는 것도 나, 살릴 수 있음에도 방관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나였다. 내가 아는 디레라면 나와 세트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겠지만, 정말 그럴까?

내가 이곳에 태어나면서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다. 원래라면 디레를 빛으로 추앙하되 약간의 거리를 두었을 신들은 내 존재로 인해 디레를 더 가까이했다. 불길한 징조를 안고 태어난 나 때문에, 디레는 더 빛으로 추앙받았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본래의 서사보다 덜 회의적으로 변했다. 사랑이 부담되었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밝아졌다.

본래의 디레는 신들을 존경했지만 진정한 친우로 여기진 않았다. 겉으로는 친우로 지냈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자신은 빛이 아니며 어둠인데, 모두가 속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디레는 어떤가. 신들에 대한 존경은 줄었을지 몰라도, 진정한 친우로 여기고 있다. 내가 어둠의 역할을 맡은 덕분에 디레는 자신에 대한 의심을 덜 하게 됐다. 자신이 빛이라는 걸 인정했고, 자신을 어느 정도 내보이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신의 몰락이 주는 타격은 전혀 다를 것이다. 지금의 디레에게 신의 몰락은 그야말로 근원의 소멸이다. 진심을 주고받은 존재가 한꺼번에 스러지게 되는데, 무너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내가 걱정하는 것은 디레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나를 원망할까 두려울 뿐이다.

디레를 믿어서 그럴 수도 있고, 내 욕심이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있다. 지금의 디레는 내가 아는 디레보다 더 강하니까, 무너지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금방 일어서서 빛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원망은 다른 차원이다. 이런 운명을 만든 존재가 누구인지 모를 때는 괜찮지만, 그 존재가 나라는 걸 알게 되면? 심지어 운명을 틀어버릴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다른 신들에게 품은 앙금, 혹은 다른 이유로 인해 죽음을 방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도 괜찮을까?

나는 무섭다. 디레가 나를 원망하고, 매섭게 대하고,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며 상처입힐 것이 두렵다. 디레가 날 외면하게 될 것 같아 두렵다. 나는 디레를 위해 이 세계에 존재했는데, 디레에게 버림받으면 어찌해야 할까. 디레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두렵다. 디레는 항상 속을 감추는 아이니까. 날 용서한다고 해도 속으로는 원망할 것이다. 원망하며 나에게 화살을 돌리려 하다가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여 자책할지도 모른다. 디레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어이, 진정해.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고개를 숙인 채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가만히 지켜보던 세트는 손끝으로 내 이마를 툭 치며 밀어냈다. 슬쩍 올려다보니 역시나 걱정하는 낯이다.

“넌 그게 문제야. 항상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걱정하고 자책하지. 네가 하지 못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며 땅을 파고 들어가잖냐.”

아냐, 이번엔 정말 가능한 선택지였는데, 내가 그걸 버렸잖아. 가능성조차 무시해버렸잖아.

대답하고 싶어 입을 달싹였지만, 세트는 듣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그런 걸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네 부담을 덜어갈 신이 여기에도 있는데, 왜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하냐. 네가 계획하고 고려한 것들을 나라고 모르겠냐? 어쨌든 너보다 오래 살았고, 네가 보는 미래는 나도 보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잘못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소리다, 멍청아.”

잠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네 탓으로 돌리고 마음 편하게 살라는 거야? 대체 왜? 물론 나보다 네가 더 많은 것을 보고 있겠지만, 하지만 선택은 결국 내가 했잖아. 선택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데 왜 네가 대신하겠다고 하는 거야?

“디레가 이 계획을 알고 있더라도 나와 똑같이 말했을 거야. 너는 항상 네가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정작 너한테 선택지가 얼마나 있었지?”

창조주라는 사실도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눈치채서 어쩔 수 없이 말했고, 영혼과 육체가 일치하지 않아 한참을 깨어나지 못했던 것도 네 의지가 아니었고. 세트는 하나하나 손꼽아가며 그동안의 일을 읊었다. 그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 나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인지 되짚게 된다.

생각해보면 디레와 같은 날에 태어난 것도, 하필 검은 연꽃에서 태어난 것도 내 의지는 아니었다. 이곳의 언어로 말하지 못한 것도 내 탓은 아니었고, 비록 내 행동으로 인한 결과이긴 하나 세트를 만난 것도 내가 선택하진 않았었다. 세트와 지내며 미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 건 내 잘못이지만, 그런 것들을 조합해 창조주라는 결론을 내린 세트가 이상한 것이었고.

온전한 내 선택은 이 세계에 떨어지기 전, 디레를 만들 때뿐이었다. 디레를 만들고, 불행을 안겨주고, 남들을 믿지 못하게 만든 것. 계속해 자책하며 무가치함에 젖어 세월을 보내는 우울한 신을 탄생시킨 것. 딱 그것만이 내 선택이었는데, 그게 너무 컸을 뿐이다. 하필이면 이 세계에서 태어나 그 선택의 결과물을 보게 됐고, 아무 선택도 할 수 없게 됐다. 저런 운명을 적은 나에게 있어 선택은 사치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륜. 전에도 말했지만, 이 세계는 네 것이 아니야. 너는 우리를 창조했지만, 이 세계 전반을 창조하진 않았지. 너는 네가 우리에게 불행이란 운명을 안배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

아, 물론 날 그런 여자와 부부 관계로 만든 건 좀 불쾌했지만. 이것도 원래의 신화가 그런 거라며? 네가 만든 운명은 아니니 됐네. 그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운명은 개인이나 집단이 만들 수 없는 영역이잖냐.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세계의 흐름. 너는 반쯤은 창조주이니 본래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만, 그것도 결국 하나의 운명 아닌가? 너는 운명을 안배했으며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해. 실제로는 모두 세계가 계획한 큰 틀일 뿐이니, 무엇을 하든 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어.”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보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운명을 바꾸는 것조차도 운명에 포함된다는, 다소 허무하지만, 책임을 버리기엔 적격인 문장. 문제가 있다면, 나는 디레의 서사로 그것에 반박하려 했다는 점이겠지.

릴은 신이 될 운명을 버려 자신을 희생했고, 그 운명은 분리되어 디아가 되었다. 릴의 영혼은 아펩과 뒤섞여 디레가 되었으며, 그 속의 악마들은 점차 정화되고 있다. 주요인물로 정의한 디레의 서사가 이러한데, 과연 이 세계는 운명을 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걸까? 세계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는 존재가 버젓이 있는데?

결국 난 책임을 버릴 수 없다. 세트가 나보다 잘 알겠지만,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들을 만들고 몰락으로 이끌었다면,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실패하더라도 모두를 살린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이 아닐까? 신의 몰락으로 시작된 디레의 삶이라지만, 더 많은 신을 살리는 게 옳지 않을까?

원점으로 돌아간 생각을 읽은 것인지, 세트는 자신의 머리를 헤집은 뒤 내 머리까지 헝클였다. 그는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냐며, 과거에 내린 판단을 의심하지 말라고 말했다. 과거의 너는 그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고, 나 또한 그에 동의했다고. 운명이니 뭐니 거창하게 말했지만 결국 네 마음만 편해지면 되는 거라고. 너는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었으니 나는 그에 보답할 뿐이며, 내가 죽지 않는 한 네 곁을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널 원망하지 않으며 오히려 고맙게 여긴다고. 나는 그리 말하는 세트에게 그저 기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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