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와의 언어 확장

“너는 배운 게 없냐?”

너무한 말이었다. 아무리 내가 고대의 상식이 부족하다지만 배운 게 없냐니, 어떻게 그런 망언을 할 수가 있지?

부루퉁한 내 표정을 본 세트는 참 뻔뻔하게도 말을 이었다.

“그렇잖냐. 신들의 이름을 모르는 건 그렇다 쳐도, 역할을 모르는 건 멍청한 거지.”

대체 다른 놈들은 이런 앨 놔두고 뭘 한 거야? 세트는 투덜거리며 다른 신들을 욕했다. 처음 본 빛에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하지만 말이다. 네가 아무것도 모를 때까지 내버려 둔 게 정상이냐? 그렇게나 상냥한 선을 대변하는 놈들이 정작 바로 곁에 있는 꼬맹이는 챙기지도 않았다니 우습지. 저런 걸 신이라고 따르는 인간들은 눈이 삐었나?

끝이 보이지 않는 비꼬기 실력에 감탄하기도 잠시, 그만하라는 의미로 세트를 툭 쳤다. 그는 곧바로 말을 멈추고는 내 머리를 토닥였다. 순간 휘청하긴 했지만, 아마 토닥임이 맞았을 것이다.

“그래, 너도 고생이 많다. 저런 모자란 놈들 사이에서 말도 안 통하니 얼마나 힘들었겠냐. 이젠 내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그는 한참 동안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다가 씨익 웃었다. 왠지 불길했다. 내가 서술한 세트는 결코 정상적인 애는 아니었으니, 저렇게 웃는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나를 중심에 두고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세트, 사고 칠 생각은 아니지?”

“너는 날 뭐로 보는 거냐? 게다가 네가 지금까지 벌인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반쯤은 사실이었다. 내가 태어난 연꽃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검은색이었고, 그로 인해 나를 불길하게 여긴 자들이 많았다.

매우 짜증 나는 점 중 하나는 그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는데,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판타지적 허용을 할 것이라면 쌍방향적인 소통이 가능하게 했어야지, 대체 뭘 위해 일방적인 소통이 되게 한 걸까. 그들이 날 모욕하는 소리는 다 들리는데, 정작 그들은 내가 욕하는 걸 알아듣지 못했다.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신박한 엿을 먹이기로 했고, 여러 가지 사소한 일을 벌였다. 물론 내 기준에서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나름의 복수를 반복하다 보니, 신들은 나를 세트에게 보내기로 한 것 같았다.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세트와 합심해서 사고를 쳐도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저런 망할 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은 행운이 될 것이었다.

세트를 처음 만났을 땐 그가 나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에 경악했지, 아마? 그동안 나의 말을 이해한 것은 디레 뿐이었는데, 드디어 두 번째로 교류할 수 있는 신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 세트도 꽤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분명 말이 안 통하는 신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나랑은 잘 통하냐?’ 세트가 했던 말이다.

그 뒤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때마다 세트는 신들을 욕했다. 대체로 얘가 이렇게 될 때까지 신들은 뭘 했냐는 한탄이었다. 한탄 뒤에는 가르침이 이어졌다. 대충 신들 사이의 상식이나 뭐 그런 것들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닌지, 그는 무언가를 알려주려 고민하고 있었다.

“너도 우리의 언어를 배워야 하지 않겠냐? 내가 아무리 네 곁에 붙어있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고, 고립되었을 때 힘든 건 결국 너야. 신으로서 얼마나 살게 될지 모르는데 계속 그 상태면 힘들 거다.”

“네가 가르쳐줄 거야?”

“원한다면. 애당초 널 가르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않냐.”

“그건 그렇지.”

선생에 선택권은 없었고, 그저 배우느냐 마느냐의 선택만 가능했다. 기회가 된다면 이집트어를 배우고 싶었고 배울 필요도 있었으니 선택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배울래. 언제까지고 너와 샤에게 집착할 수는 없으니까.”

이집트어를 하게 돼도 계속 따라다닐 예정이라는 말은 꾹 삼킨 뒤 기쁜 듯 웃었다. 언어의 장벽이 사라져도 다른 신들과 말이 통할 것 같지는 않고, 내가 원래부터 알던 존재는 현재 기준으로 둘밖에 없으니까. 낯설지 않은 애들과 함께하는 게 마음 편했다. 게다가 다른 신들은 고상한 말투로 나를 욕했잖아? 사소한 복수는 했지만, 여전히 앙금은 남아 있는 상태이다.

“언제부터 가르쳐줄 거야? 지금 바로? 아, 참고로 너무 고된 진도를 나가면 도망칠 거다?”

딱히 할 것도 없고 심심한 인생이지만, 그렇다고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공부를 하고 싶진 않았으므로, 미리 엄포를 두었다. 살살 하자, 우리. 인생은 길고 남는 시간은 넘쳐나잖아.

“대신 조건이 있어.”

잠시만요, 선생님. 조건을 먼저 듣고 계약해야 하는 건데 왜 선 계약 후 조건 제시인 거죠? 세트가 나에게 이상한 조건을 걸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네가 쓰는 언어와 문자. 본래 네가 태어나야 했을 곳의 언어를 알려줘.”

무리한 조건은 아니지? 세트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잠시 입을 닫은 채 가만히 있었다. 고민하려고 한 건 아니고, 그저 세트의 비율이 멋져서. 그가 대답을 재촉할 때가 되어서야 정신 차릴 수 있었다. 쟤는 왜 저렇게 잘생겨서는 자꾸 날 홀리냐.

아무튼, 그의 조건은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것. 서로의 언어를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것 같았다. 이집트어로도 한국어로도 소통할 수 있다면, 나는 이중언어가 가능해지는 것이니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국어를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게 중요했다. 앞으로 이집트어만 주야장천 쓸 텐데, 그러다가 정작 한국어를 잊어버리면 아쉬우니까. 좋은 조건이었다. 그런데 한국어를 배워서 어디다 쓰려고 하는 거지? 미안해하지 말라고 만든 조건인가?

“내 언어를 왜 배우려는 거야? 여기선 딱히 쓸 일도 없고, 아주 먼 지역과 먼 시대에나 사용할 수 있는데?”

게다가 신들은 다른 언어를 좋아하지 않잖아. 말을 덧붙이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세트는 자길 고지식한 놈들과 비교하지 말라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들이 이상한 거지. 고지식함에 취해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퇴물들. 언제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건 새로운 것이고, 네 언어는 큰 값어치를 할 거야.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 때문에 판도가 뒤집힌 적이 몇 번인데.”

무언가 명언이 나온 듯하다. 쓸모없어 보여도 제 나름의 쓸모가 있고, 전쟁이라는 큰 사건에도 대비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일까. 여전히 세트에게 한국어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살긴 했으니 내가 보지 못하는 걸 고려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좋아. 그러면 서로 언어를 가르쳐주는 조건인 거지?”

“서로 언어를 교환하는 셈이지.”

“하루에 두 언어를 다 할 수는 없으니까 번갈아 가며 할까? 오늘은 너희 언어, 내일은 우리 언어, 이런 식으로.”

“그래, 기대해라.”

사고 칠 생각조차 안 들게 해주겠다는 사악한 말이 들린 것 같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세트야, 살살 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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