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랑은 그런 거야"

긴장된 숨을 깊게 내쉬고는 굳게 닫힌 문을 똑똑 두드렸다. 딱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승낙한 것으로 여기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침대 위에 앉아있는 세트였다. 그는 벽을 향한 채 침묵하고 있었다.

“세트, 삐졌어?”

“아니.”

“그럼 토라졌어?”

“아니.”

“으응…. 세트는 삐지지도 토라지지도 않았구나.”

“그래, 멀쩡하다.”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평소라면 노크하기도 전에 아는 척하며 반겼을 텐데. 내가 들어간 뒤에도 말을 안 걸고, 등 돌린 채 대답을 짧게 끊어버리다니. 이건 분명 단단히 삐진 모습이었다.

세트가 날 바라보지 않는 이유는 분명 내게 있었다. 얼마 전의 내 말을 듣고, 또는 행동을 보고 나서부터 저리 되었으니 말이다.

사과라도 해야 할까? 나는 그가 왜 저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느 때와 같은 말과 행동이었고,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할 법한 무언가가 있진 않았다. 혹시 그동안의 언행이 쌓이고 쌓여, 그가 더는 버티지 못할 지경이라도 된 것일까? 그러나 그는 언제나 나의 잘못을 곧바로 지적하는 편이었는데. 솔직하다고 여겨진 그는 사실 숨기고 있던 불편함이 컸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내게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직접 알려주길 원했다. 저렇게 꼭꼭 숨어 나를 무시하는 세트라니, 그답지 않은 소심한 모습이었다. …그답지 않다는 게 조금 잔혹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세트는 언제나 내 곁에서 장난스러운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압박을 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함께 한 지 수천 년이 지났는데 저런 모습이라니.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세트라니.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짤막한 대답을 듣고 나니 너무 눈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도 어리광만 피워서일까. 세트에게는 자꾸 철없이 굴게 된다. 이런 면이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을 데굴 굴리다가, 작전상 후퇴하기로 했다. 나중에, 내 생각을 좀 더 정리한 다음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았다.

마저 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가려는 찰나, 세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보일 정도는 아니고, 정말 미세하게 말이다. 그가 어떤 표정이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뚝뚝 끊어지던 말투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어디 가.”

“나… 디레에게 가보려고. 응, 그러려고.”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마침 할 얘기도 있으니까.”

…솔직히 무서웠다. 내가 위험한 짓을 해서 화날 때의 세트보다 무서웠다.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의 고요함 같아서,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나의 어색함을 눈치챈 세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니, 어느샌가 나와 그는 마주 본 채 앉게 되었다.

“시륜, 륜. 너는 왜 그렇게 멍청하냐.”

…잠깐만, 세트야. 갑자기 비방이라니? 상황도 잊고 욱할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눈가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놀라 반응하진 못했지만.

“륜. 너는 때때로 우리가 널 미워해야 마땅한 것처럼 굴어. 부당한 죄책감을 안고 아무도 모르게 자책하지.”

사실 우리는 진작부터 눈치챘는데 말이야. 그리 속삭이는 세트의 눈빛은 표현하기 힘든 물기로 얼룩져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 신화를 왜곡한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인간이 있었나? 최소한 우리 신들은 그러지 않아. 신화는 인간의 믿음에 의해 탄생한 것이니 왜곡됨이 당연하지. 너도 마찬가지야. 네가 우리를 탄생시킨 뒤 많은 역경을 안겨주었더라도, 너는 그저 서술했을 뿐이잖아. 우리는 결코 서술자를 원망하지 않아.”

그러나 신화를 왜곡한 인간들과 나는 경우가 달랐다. 그들은 신들의 역사를 바꿀지언정 운명을 바꾸진 못했다. 신들의 생사는 그들 손에 있지 않았다. 반면 나는 신들의 운명 자체를 서술했다. 그들이 모두 죽어버리고, 신화가 몰락하는 순간을 운명이라 칭했다. 운명이니까, 바꿀 수 없으니까. 그런 핑계를 대며 그 운명을 즐겼다.

신들을 숭배한 인간들과는 달리, 신들을 유희 거리로 여겼다. 나는 단순한 서술자가 아니었고, 이 사실은 나를 줄곧 괴롭혀왔다. 그러니 이 고통은 받아들여야만 하는 당연한 것이었다. 남들에게 공유해서는 안 되는, 나 혼자만이 감당해야 할 죄였다.

“언젠가 말했지. 누군가가 너의 삶을 이야기로 적었더라도, 너는 그저 소설 속 등장인물에 불과했을지라도, 네 삶에 있어 그 모든 경험과 감정은 글로 끝나지 않는다고. 최소한 너는 네 삶의 주인이었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네가, 네 입으로. 그는 단어마다 힘줘 끊어내었다. 지금 하는 말은 모두 네가 했던 말이라고, 기억나지 않느냐고, 그리 말하는 듯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도 생각했지. 네가 우리를 서술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너는 우리의 운명을 만들었지만, 그 운명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한 건 우리이니, 그 누구도 너를 원망할 순 없을 거라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안타깝게 웃었다. 그의 눈매는 촉촉해진 지 오래였고, 매끄럽게 올라간 입꼬리도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내 감정을 대신 받아간 것마냥 슬피 웃었다.

“그러니 우리는 너를 원망하지 않고, 너에게 책임을 짊어지라고 요구하지도 않을 거야. 오히려 네가 우리와 함께 지낸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행복한 미래를 그리겠지. 너의 웃음에 따라 웃고, 너의 울음에 함께 울 거야. 우리의 사랑은 그런 거야, 륜.”

그 모든 말이 나를 배려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의 사랑이 날 버겁게 만듦을 알면서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안심시키기 위해 사랑을 속삭이는 것이다. 나의 삶을 지키고 싶어서, 내가 외로이 썩지 않아도 되는 단단하고 풍족한 지반이 되어주려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나는 너희의 그런 사랑을 이해할 수 없어. 아니, 공감하기 어려워. 내가 인간 태생이라 그런 걸까? 인간의 사랑은 부질없어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도 금세 서로를 배신해버려. 사랑했던 만큼 증오를 불태워. 서로를 갉아먹고 무너뜨려.”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너의 고백에 답하지 못하는 것도. 너의 사랑은 의심하지 않지만, 나의 사랑은 믿을 수가 없어. 너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는데, 내 감정이 변질될까 두려워.

“지금은 신의 몸을 가졌지만, 나의 내면은 아직 인간이라서. 너희를 배신할까 봐 두려워. 너희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취급하며, 종래에는 너희를 사랑하지 않게 될까 무서워. 그러고 싶지 않아. 그건 당연한 게 아닌데,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오만하며 어리석은 존재가 될까 봐 무서워.”

세트는 나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너의 말을 모두 들어주겠다는 듯, 네가 쏟아내는 감정을 받아내겠다는 듯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어. 언젠가 내 감정이 변한다면, 그러나 너희의 감정은 그대로라면. 그건 너무 잔인하잖아.”

차라리 미움받는 것이 편할지도 몰라. 속삭이듯 나온 마지막 문장이었다. 작디작아 나조차도 내뱉음을 인지하지 못한 문장. 나는 모든 말을 쏟아낸 뒤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기에, 고통스레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만일 보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세트는 목 위까지 올라온 단어를 애써 삼켰다. 불안정한 상태의 나를 더 흔들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꺼내려 했다.

“변화는 당연해. 인간이든 신이든 결국 변하지. 나는 영원에 가까운 사랑을 말하지만, 그건 변치 않는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사랑은 변해. 어떤 방향으로든 변하겠지. 하지만 네가 걱정하듯 상대를 상처입히는 건 극소수야. 한때 사랑했던 상대를 일부러 상처입히는 자가 어디 있겠어. 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를 상처입히고 싶어질 것 같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내 감정이 아무리 변해도, 그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지겨워할 날이 오더라도, 결코 해칠 수는 없었다. 그들을 상처입히고 싶을 리는 없었다.

“네 사랑이 변하더라도 우리를 아끼는 건 여전하겠지. 우리는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는 거다. 네가 우리 곁에서 떠날지라도, 우리를 떠올릴 때 힘겨워하지 않고 즐거워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러니 지금처럼 쓸데없이 걱정하며 자책하는 꼴은 그만 보고 싶다. 세트는 답답한 나머지 마지막 말을 내뱉을 뻔했으나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내 생각을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그의 말을 모두 들은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졌다. 사막 한가운데를 헤매고 다닐 때보다도 더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혼란스럽다기엔 차분하고, 이성을 되찾았다기엔 멍한 상태였다. 들었던 말들을 모두 되새기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세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가만히 기대있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세트가 무언가를 더 말하는 듯 싶었지만, 등을 토닥이는 온기에 빠른 속도로 잠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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