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불꽃

Stargazing(2)

오늘도 사랑하는 꿈을 꿀 것이다.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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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컾 현대 AU

(C)떨리고설레다 2022



Stargaz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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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사도라 세스를 처음 만난 그 순간을 바루는 기억하고 있었다.

 밤 늦게 마지막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당분간 새벽에는 일이 없었기에, 간만에 오래 잘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집 가면 우선 뭘 좀 먹고 싶었다. 찬장에 바쟈가 숨겨 둔 과자가 몇 봉지 남았을 테다. 그러고는 바로 이불에 쓰러져야지. 평소보다 고작 한두 시간 더라지만 그것만으로도 훨씬 나았다. 산다는 건 원래 매일이 피곤한 일이니까… 조금이라도 짐을 덜 수 있다면 다행인 셈이지. 

그 밖에도 조금은 희망찬 다른 생각들을 몇 가지 더 하다가, 걸려 온 전화를 자연스레 받았다. 텅 빈 주소록을 채운 약간의 번호들 중 하나, 누나였다. 또 무슨 일이려나.

"여보세요?"

 그러나 들려온 것은, 예상과는 다르게 낮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바루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발신자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바쟈 번호인데. 잠시 고민하다가 결론지었다. 혹시 핸드폰을 잃어버린 건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쌍둥이 누나는 몇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이제 또 그럴 때 됐지. 어디냐고, 금방 받으러 가겠다고 말하려 입을 떼었을 때였다.

"혹시,"

"…핸드폰 주인분 동생 되시는 분 맞으신가요?"

 진지하고, 조금은 촉촉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네, 그런데요. 바루는 집으로 향하던 발을 천천히 멈췄다. 전화 너머에서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사고가 나서요. 병원에 있는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차게 몰아치던 빗물에 차가 미끄러졌댔던가.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평소에는 잘 타지도 않는 택시를 잡으려 큰길가로 뛰는 걸음이 떨렸다. 오늘은 데리러 오지 말라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끝까지 굽히지 않는 그 고집을 어떻게든 꺾었어야 했다… 멍청하게도 항상 나중에 후회했다.

"아."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굉장한 미녀인 것은 둘째치고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바루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윤 나고 곱슬거리는 흑발이 가슴께까지 흘러내렸고,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했다. 이사도라 페이지, 전 세대의 최고라고 불리는 여배우 세라 페이지의 딸이며, 연예계에는 완전히 문외한인 바루마저 알 정도로 유명하던 배우 겸 모델이었다. 아직 나이가 한 자리 수일 때 혜성처럼 등장해서는, 너무나 닮은 특유의 외모로 세스 그룹의 사생아라는 소문에도 잠시 휩싸였다가, 작년에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돌연 활동 중지를 선언해서 화제가 된. 

다들 지나치게 이르다고 수군거렸고, 남의 인생을 제 기준으로 재는 건 실례라고 생각하는 그도 조금은 동의했다. 아니, 잠깐만. 바루는 고개를 살짝 털어 잡생각을 지워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런데 그녀가 왜 여기에?

이사도라는 오히려 바루가 더 놀랄 정도로 크게 움찔하더니 미끄러지듯 가까이 다가왔다. 모델은 원래 저렇게 움직이던가, 따위의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어느새 속눈썹의 작은 떨림까지도 보일 정도의 거리가 된 것을 깨달아서였다. 

기어올라오는 묘한 기분을 멈추기 위해 바루는 조금 주의를 돌려 다른 곳을 보았다. 수많은 실물 영접 간증들과 다를 바 없이, 화면보다 훨씬 예뻤다. 바쟈보다는 조금 작아 보이네, 한 165쯤 되려나. 프로필에는 분명 168cm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러나 그 노력을 방해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이사도라 페이지는 짙은 입술을 나른하게 달싹여 작은 단어를 발음했다.

"…바루?"

그리고 이름 불린 이가 놀란 것은, 불린 게 제 이름이거나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았을 때에도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수정을 그대로 깎아 놓은 것 같은 눈동자와 음악 프로그램에 잠시 출연해서 극찬을 받았던 목소리가,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슴끼리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이사도라 페이지는 눈으로 울고 있었다. 여자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소름끼치고 죄책감이 느껴지는 일인지, 바루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심지어는 그냥 여자도 아니고, 제국 제일의 미녀라 불리던 전 톱스타다. 또 그 상황에서 할 말을 고른다는 게 하필이면 최악의 경우라. 말을 뱉어 놓고 뒤늦게 후회까지 했다.

"…누나는?"

 "아, 미안."

 이사도라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나서 뒤의 침대를 가리켰다. 바루는 가까이 다가가서 잠든 누나를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온통 하얀색이었다. 하얀 베개, 하얀 이불, 심지어 링거를 맞느라 드러낸 손목까지도 투명하고 희었다. 저와 같은 색의 긴 머리카락만 베개 위에 넓게 흩어져 있었다. 

이외의 다른 색, 그러니까 그가 걱정하던 붉은 상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졸이던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는데, 갑자기 어깻죽지에 손이 올라와 깜짝 놀랐다. 어느새 다시 가까이 다가온 이사도라가 변명하듯 말을 꺼냈다.

"크게 다치진 않았어, 부러진 데도 없고. 지금은 그냥 잠든 거야."

"그러네, 요."

 자연스럽게 편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급하게 존대를 붙였다. 사실 먼저 하대한 건 저쪽이 먼저였지만, 그런 건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이사도라 페이지에 비하면 저는 한없이 보잘것없는 소시민일 뿐이었고 하대받는 일에는 이미 익숙했으니까. 

오히려 당황한 건 이사도라 쪽이었다. 어째서인지 바루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상당히 놀란 듯 크게 뜬 눈을 빠르게 깜박이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혹시 기분 상했어… 요?"

"네?"

"제가… 초면에 반말 해서."

 여전히 젖어 있고 또 조금은 상처받은 듯한 목소리였다. 긴장도 풀 겸, 편하게 살짝 웃으며 바루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겪은 진상이 얼만데. 이 정도는 기분 상할 만한 일 축에도 못 끼었다. 게다가, 누가 이사도라 페이지를 앞에 두고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 그러나 돌아온 대답에도 안심하지 못한 듯 우울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바루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어 부인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말 편하게 하세요."

"…."

 그럼, 이사도라가 천천히 운을 떼었다. 바루도 편하게 해. 머뭇거리자 그녀는 다시 한 번 권했다. 나 혼자만 하는 건 싫어. 바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거의 동시에 내밀어진 휴대폰에 조금 놀랐다. 

번호, 찍어 줄래. 거의 들릴락말락한 웅얼거림이었다. 수 년 전 방송에서 보았던 그녀의 캐릭터가 고양이처럼 도도했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의외였다. 자신감 있게, 특유의 미소를 빙긋이 지으며 건넬 줄 알았는데. 아니, 그 전에 번호를 딸 일도 없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바루는 움찔했다. 지금, 번호 따는 거야? …설마.

 바루는 다시 한 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이미 찾아 둔 뒤였다. 아마도 상태를 확인하려 받아가는 거겠지. 이 정도도 안 하면 그냥 뺑소니가 되는 거니까…. 

꾹꾹 전화번호를 누르고 건넸더니 이내 제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는 끊어졌다. 이사도라 페이지는 붉은색 통화 종료 버튼 위에 손끝을 올려놓고 부드러운 명령조로 말했다. 잘 관리되어 매끈한 블루 그레이의 매니큐어 위에 콕콕콕 매달린 작은 보석 파츠들로 시선을 빼앗고서.

"저장해."

바루는 기꺼이 그 말에 복종했다. 이사, 도라, 페, 이, 지. 밋밋한 기본 폰트로 토독, 톡 적혀 가는 제 이름을 고개를 빼고 넘겨다보다가,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아닌데. 잘못 들었나 싶어 옆에 선 그녀를 내려다보자, 이사도라는 잠시 망설이며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대나 싶더니, 드라마에서 익히 보였던 나른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덧붙였다. 이건 몇 사람한테밖에 안 알려준 건데….

"페이지 아니야."

"?"

"세스."

이사도라는 급기야 바루의 핸드폰을 손에서 채갔다. 자기 연락처를 아예 직접 저장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쓰고 지우는지, 토도독 소리가 자주 들렸다. 마침내 되돌아온 핸드폰을 받아 들고, 주소록에 새겨진 아까보다 한참 짧아진 이름을 바루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도라, 도라… 세스. 애칭인가? 아무래도 이사도라 페이지라는 배우는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에게 애칭을 허락하는 종류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성이 다르잖아. 그 의아함을 눈치챘는지 이사도라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내리며 설명했다.

"세스 맞아."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던가, 하다가. 그 비밀이 온갖 방송 매체와 소속사까지 동원해 부인했던 소문이라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저기, 이거 그렇게 간단하게 뱉어버릴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사도라 페이지, 아니 세스는 무심히 말을 이을 뿐이었다. 마치 나 오늘 아침을 굶었어,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태연스럽게.

"나 그쪽 집안 사생안데."

 바루. 스물 한 살. 직업은 바리스타… 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 카페 직원. 가족으로는 상업디자인을 전공하는 쌍둥이 누나가 하나 있고, 이외에 취미 없음, 특이사항 없음. 프로필조차 보잘것없는 평범한 인간 하나가, 우연히 은퇴한 유명 여배우의 비밀을 알아버린 순간이었다. 

그게 벌써 사 년하고도 조금 더 전의 일이었다.

.

.

.

꿈을 꾼다. 

또 다시, 같은 꿈을 꾼다.

원래 바루는 꿈이니 예언이니, 하는 헛된 소리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미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언제나 누나인 바쟈 쪽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그래서 찝찝하게 눈을 뜬 순간 바루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그러나 각기 다른 장소를 배경하여 비슷한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었을 때, 그리고 매번 등장하는 가리운 얼굴의 여자가 모두 같은 사람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것이 고작 개꿈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했다.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를 사랑했다.

이건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왔어?"

바루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누나는 자기 침대에 엎드려 손톱 다듬기에 열중이었다. 앞에 놓인 검은 매니큐어 병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새로 산 모양이지, 생각하며 바루는 자켓을 벗었다. 바쟈가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생활은 훨씬 나아졌다. 적어도 양심의 가책 없이 작은 사치를 부릴 정도는 되었다.

"오늘은 안 나가?"

바쟈는 주말에 일을 하지 않았고, 대신 사람을 만나러 자주 나갔다. 바쟈는 원래 친구가 많았다. 학생 때부터 사람을 좋아했고 잘 어울릴 줄 알았다. 바루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바루는 친구의 필요성을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었지만, 저와 반대인 누나를 사랑했다.

"오늘은 약속 없는데."

바쟈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녁 밖에서 먹을까?"

"뭘 굳이."

돈 아깝게,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제국에서 지원하는 생계유지금은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둘 중 한 사람은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쨌거나 둘 중 그녀의 성적이 나았기 때문에 동생이 아르바이트로 벌어 오는 돈에 의지해 공부에 매진했던 그 때를, 바쟈는 죽도록 혐오했다. 간발의 차이로 늦게 태어났다지만 동생은 동생이었다. 바루가 가끔 돈 타령이라도 할라치면 그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은 나가기 좀 늦었잖아."

대신 바루는 덧붙였다.

"그냥 있는 거 아무거나 찾아 먹을게."

"그럼 치킨 시켜."

"사먹는 건 내일 해도 되잖아."

"내일은 나간단 말이야."

저걸로 해, 바쟈가 턱짓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자기 핸드폰을 가리켰다. 그러면서도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붓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바루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잠금이 없어서 그냥 열렸다.

주문을 마치고 바루는 누나를 돌아보았다. 검은 매니큐어가 천천히 손톱의 빈 공간을 채웠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바쟈는 덜 마른 손을 들어 자랑하듯 내밀었다. 무광 탑코트를 발라서 매트하게 만들 거야, 하고 말했다. 다음 순간 이사도라의 핸드폰 케이스가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 적어도 바루가 생각하기로는 - 연상이었다. 이사도라 페이지, 아니 세스는 카페 오픈부터 마감까지 종일 카운터가 보이는 구석에 죽치고 앉아 있었으니까.

"근데."

바쟈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어?"

"도라는 요즘 어때?"

누나는 친절하게도 - 물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 머릿속의 그 이름을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바루는 잘못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움찔했다. 바쟈가 다음 손톱에 집중하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괜히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가?"

"그냥- 잘 있냐구. 요즘 바빠서 연락도 못 했고…."

첫만남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바쟈는 단번에 이사도라에게 사랑에 빠졌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다웠다. 이제 두 사람은 거의 평생을 알아 온 친구처럼 지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바루가 툴툴댔다. 혼자 놀란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났다.

"알려주기 싫음 말아."

바쟈가 입술을 삐죽였다.

"너는 계속 연락하잖아."

"연락 안 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바루가 대답했다. 연락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는 경우가 더 많았으므로, 어쨌든 거짓은 아니었다.

"그래."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말투로 바쟈가 대꾸했다.

"…근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뭐가."

표정을 쉽게 숨길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지나치게 일찍 시작한 사회 생활에서도 가끔은 이렇게 장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루는 가만히 왼쪽 가슴께를 꾹 눌렀다. 모른 척 한다지만 사실은 알았다. 이사도라가 화제로 등장할 때마다 늘 나오는 이야기였다. 보통의 성인 남녀 - 꽤나 친밀하기까지 한 -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겨날 법한 어떤 관계에 대하여. 바쟈는 생각날 때마다 질문했고 바루는 어김없이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무리 누나라지만, 아니 그래서 더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멍청이."

"알아."

"나빴어."

"그래."

바쟈는 뚱하게 그를 노려보다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냉장고에 맥주 좀 가져와 봐. 먼저 먹고 있을래."

"매번 말하는데, 제발 술 좀 그만 마셔."

바루는 투덜거렸지만 얌전히 냉장고를 열어 맥주 캔을 꺼냈다. 화제가 전환된 것에 안도한 점도 있었다.

.

.

.

신경 쓰지 않는 거라면 너는 못된 거고, 모르는 거라면 정말 멍청한 거야.

언젠가 바쟈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 대충 넘기는 척을 했지만, 사실 반대쪽 귀로 흘려보내지 않고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겨 두었다. 그 자리에서 바루는 진짜 바보 같은 게 누군데, 하는 생각을 했다. 둘 중 어느 쪽도 그를 칭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도저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껏 먹어 온 눈칫밥이 얼마인데. 아니, 아무리 평생을 눈치 보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깨닫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기 일 아니라는 듯 관심 끄고 지낼 수 있는 편도 아니었다. 바로 그 점이 바루를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사도라 세스가 바루에게 보이는 관심은 필요 이상이다. 

그런데 그 여자는 도대체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면서 카페 오픈을 기다리다가, 아니면 가장 구석진 곳에서 마스크도 내리지 못하고 허니브레드를 깨작이다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사도라 세스는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막상 그 미소를 마주하는 사람은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 주고 싶은 충동에 괴로워하는데도.

차라리 대놓고 뭐라도 요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힘으로 가능만 하다면 무엇이든 가져다 바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사도라 세스는 누구인가. 대배우 세라 페이지의 딸,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인 여자. 모든 것을 가졌으며 동시에 못 가질 것도 없는, 그야말로 세계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저는 누구인가.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는 한 남자가, 저 빛나는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제 주제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이 관계를 도저히 진전할 수가 없다. 바루는 현실을 너무 일찍 배운 부류의 사람이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하리라는 헛된 믿음 따위 잃은 지가 오래였다.

바루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아마 오늘도 사랑하는 꿈을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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