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러스 커미션 샘플

유머러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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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곧 망할 것이다. 확실하다. M의 눈앞에 놓인 괴상한 액체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존재해서는 안 될 물질이 빚어졌으므로, 이는 지구가 드디어 자연법칙까지 뒤틀렸다는 뜻이며 그 다른 무엇보다 더 확실한 망조이다.

 

M은 눈앞에 놓인 잔을 노려보다가 딱딱하게 물었다.

 

“이게……뭡니까?”

 

P는 유려하며 능숙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대로의 그린 듯한 미소이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웃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당신이 이렇게나 좋아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준비해줄 걸 그랬어요.”

“헛소리 마시고요, 이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설마 이런 것도 모르십니까? 당연히 커피지요. 일만 하지 마시고 세상 기본 상식 좀 익히시지요.”

 

그렇다. 눈앞에 있는 액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커피였다. 향을 맡는다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커피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커다란 머그잔에 정성스럽게 담겨 온 커피는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아직도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바닥에서 거품이 끝없이 올라와 위로 돌진하여 수면을 공격해댔다. 공격의 희생양은 수면 위에서 부유하는 무수한 얼음들이었다. 얼음은 급격한 온도변화에 금이 가고 거품의 공격을 맞아 ‘쩡’ 소리를 내며 깨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얼음이 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얼음은 높게 쌓였고, 이 얼음 대군은 녹으면서 커피의 열을 빼앗아갔다. 이렇게 커피 군단의 공격력을 차근차근 약화한다.

 

그리고 이 위대한 전쟁을 컵으로 옮기고 카페 메뉴의 작명 형식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이런 이름이 붙는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위 주문하지 말란 말입니다!”

 

순간 M은 흥분해버렸다. 그답지 않게 튀어나온 감정이었다. 너무 어이없었기 때문일까? 자신을 놀리는 기색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 P의 노골적인 주문 때문이었을까? 커피에 마땅히 적용되어야 할 규칙이 깨졌기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P는 드디어 소리 내어서 웃었다.

 

“푸핫. M, 처음에 커피를 주문해 달라고 한 건 너예요. 난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라고요.”

 

정말 유감스럽게도 P의 말이 맞았다. 어제 밤잠을 설쳐서 그랬는지, 아니면 최근에 업무가 많아서 무리했는지, M은 오늘따라 유독 피곤했다. 따라서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앉았고, 주문은 P에게 넘겼다. 무엇을 시킬 거냐고 묻는 P에게 “그냥 커피 하나,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답한 게 화근이었다. M은 무언가를 선호하는 일이 없었고 커피의 취향도 딱히 댈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아무거나’ 받아도 상관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세상에. P라는 작자를 이리 오래 보았는데도 ‘아무거나’라는 단어가 그렇게나 위험한 단어인지 어째서 지금에야 알게 된 거지?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다. M은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늘 있었던 P의 장난질이다. 유독 수준이 낮아 보이지만, 그래도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장난질에 반응하는 것은 P를 더 즐겁게 만들뿐이다. 이 패턴은 익숙했다. M은 감정을 빼고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 인성이 쓰레기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괜히 이상한 주문으로 카페 직원분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이제 무슨 민폐입니까?”

“응? 무슨 말이지요?”

“당신의 인성을 설마 그간 모르셨습니까?”

“아니. 그건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제가 직원분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니.”

 

P는 얄밉게 고개를 기웃거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고갯짓에 M은 다시 한번 감정이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눌렀다.

 

“이해를 못 하십니까? 공감 능력이 떨어지시는군요. 일하시는 분께서 갑자기 주문을 받으면 얼마나 당혹스럽겠…….”

“이 카페의 사장도 재미있겠다고 하시면서 동참했었는데요?”

“…….”

 

M은 저도 모르게 카운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지켜보던 카페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사장은 그 즉시 바빠졌다. 그릇의 물기를 닦아 정리하고, 커피 머신을 점검하다가, 카운터를 닦고.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손님 구경할 만큼 한가하던 사장이 대체 왜 그렇게 갑자기 바빠졌을까?

 

“하…….”

 

깊고 피곤한 한숨이 올라왔다. 참 이상했다. M은 자신이 별로 인류에 대한 믿음이 넘쳐나는 사람이라고 여긴 적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배신감에 마음이 이리 물드는 걸까? 혹시 방금 깨진 것이 인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세상에 마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던 상식에 대한 믿음이 깨진 것일까?

 

“그래서, 안 드실 겁니까?”

 

P가 깐족댔다. M은 포기하고 잔을 들었다.

 

그래, 침착하자. 형태가 어떻든 그저 커피일 뿐이지 않은가? 효율적으로 생각하자면, M에게 중요했던 것은 카페인의 유무이지 않은가? 그 이상은 상관없다. 비록 P의 장난질에 놀아났기는 했지만, 그래서 갑자기 혈압이 오르고 목덜미가 당기며 만물에 대한 분노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지만 아무튼.

 

그때 얼음 하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뒤집혔다. 뽈칵! 그러면서 커피 방울이 M의 손등에 튀었다. M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잔을 놓치고 말았다. 놓친 잔은 당연하게도 지구의 중력과 물리 법칙으로 인해 엎어졌고, 안의 내용물은 쏟아졌다. 문제는, 그 방향에 M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행하게도 커피는 미지근했고 화상을 입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흰 셔츠에 얼룩이 생겼고 제복에서는 아주 향기로운 향이 났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잠을 깨는 최고의 방법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바로 커피를 엎지르는 것이라고. M이 겪어보니 확실히 그러했다. 피곤함이 가시고 정신이 확 맑아졌다. 자잘한 감정이 싹 가셨고 해야 할 일이 명료해졌다. 그래. 왜 이걸 몰랐을까?

 

“어머……. M, 그러니까. 방금 놀래서 손 떠신 건가요?”

 

P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으로 살짝 가리며 물었다. M은 P의 말을 무시하고 일어나 저벅저벅 걸었다. 방향은 카운터였다. 사장은 M의 눈치를 이리저리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이런! 이걸 어째? 손님, 닦아낼 냅킨 좀 드릴까요?”

“그건 됐습니다.”

 

M은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비에 맞은 사람이 정중히 우산을 사양하는 듯한 투였다. 빗물 대신 커피 방울을 떨어뜨리던 M은 제 카드를 사장에게 내밀었다.

 

“새로운 주문 하나 더 받으실 생각 없으십니까?”

 

바야흐로 2차전의 시작이었다.

 

 

 

다음 음료는 M이 직접 들고 왔다. P에게 쟁반을 내미는 태도는 서빙 하는 직원처럼 예의 발랐지만 P는 그 태도를 놀릴 수 없었다. 방금 했던 일 때문에 주눅이 든 것은 아니다. 그저 눈앞에 무슨 심연에서 수억 년 동안 썩다가 방금 기어 나온 것 같은 정체불명의 괴상한 이물질이 잔에 담겨서 들이 밀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롭네요. 이게 뭔가요?”

 

P가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어서 내놓은 말은 고작 그것이었다. 여전히 느긋하고 여유로운 척 굴었지만, 입가는 떨리고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M은 그 모습을 비웃지 않았다. 그로서는 드문 친절함과 다정함까지 엿보였다.

 

“제 마음입니다.”

“너의 속내란 이렇게 새까맣군요. 저런. 전문적인 상담 치료가 필요할 것 같은데. 혹시 받아보실 생각 없으세요?”

 

그것은 시커먼 색이었다. 단순히 진한 블랙커피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석유와 같은 검고 어두운 색이었으며 탁했다. 그 잔에는 티스푼이 올라가 있었는데 조금 들어 올리자 점성이 아주 진한 액체가 느리게 떨어졌다. 그리고 자잘한 알갱이가 액체 속에 가득 섞여 있었는데 액체와 함께 질퍽거리며 떨어졌다. P는 자갈을 섞은 타르를 떠올렸다. 향 대신 악취라고 불러야 할 냄새는 비렸다. P가 표정을 찡그리자 M이 말했다.

 

“다른 말로 성의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제게 음료 한 잔을 사주셨으니 저도 보답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되어서 말입니다.”

“제 선물에 감동했군요. 이렇게까지나 감동할 필요는 없는데. 난 돈 많아서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감동 안 했습니다. 예의라고 했습니다. 받으십시오.”

 

M은 강압적으로 P에게 잔을 들이밀었다. P는 뒤의 가게 주인을 힐끗 보았다. 그 사람은 이 키메라를 탄생시킨 것이 꽤 뿌듯한 모양인지 혼자 훈훈해 하고 있었다. 아니. 사장 양반. 대체 이런 걸 왜 만드는 건데? 혹시 장사를 때려치우고 싶었나? 사실 아까도 P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을 때 그 사장의 눈이 반짝이기는 했다. 그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었다. 하지만 그 성정이 조금 전에는 오히려 P에게 도움이 되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P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M은 덧붙여주었다.

 

“참고로 식품위생법을 준수하며 취급에 문제가 없는 재료들로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아니,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과거에 쓰였던 여러 독과 사약도 천연재료로 만들지 않던가? P는 손끝으로 잔을 약간 밀어냈다. 사실 닿기도 싫었다.

 

“너나 많이 먹도록 하세요. 난 입맛이 별로 없어서.”

 

M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순진한 아이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편식……하십니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할 필요가 있나요?”

“그러니까 꼬맹이들처럼 이건 안 먹는다고 밀어내며 음식을 가리신단 말입니까?”

“그저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안 먹는다고 해서 내가…….”

“혹시 근래까지도 피망이나 콩 같은 것을 포크 끝으로 밀어내셨습니까?”

“허,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말했…….”

“이런, 죄송합니다.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당신이, 식사 예절이며 행동이며 외모며 태도며 전부 완벽하시다고 주장하시는 분께서 다 커서도 편식하는 습관이 남아있으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거 대단히 죄송하군요.”

 

M은 P의 말을 자르며 제 말만 줄줄 읊었다. P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M은 고의적으로 P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안다고 안 빡치는 건 아니다. 그러나 P가 누군가? 그는 남을 다루고 조종하는 관리자이지 조종당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다. 그러니 고작 이딴 수로 P를 흔들 수는 없다.

 

“M, 한참 모자라시는군요. 내가 고작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간다고 생각하는…….”

“쫄리시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 잔 당장 내놔.”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P로서는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눈이 뒤집혔, 아니. 이상한 충동에 휩싸였고, 정신 차리고 나니 제 손에 잔이 쥐어져 있었다. 제 상황을 눈치챘을 때 P는 아차 싶었다. 그러나 인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M이 지켜보고 있었다. 눈짓으로 이렇게 묻는 듯했다. ‘설마, 못 하시겠습니까?’ P는 그 검은 무언가의 액체를 들이켰다.

 

 

 

잠시 후 P는 카운터를 턱 붙잡았다. 금세라고 쓰러질 것 같이 얼굴은 창백했고 입가에 검은 액체 한 줄기가 피 대신 흘렀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으려는 오기가 온몸에 가득했다. P는 간신히 카드를 꺼내 들었고 입을 열기 전에 살짝 이를 갈았고, 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받은 만큼은 갚아 버릴 테다.

 

“주문, 하나만 더 받아주시지요.”

M은 그런 P를 신중하게 주시했다. 그로서는 드물게도 희미한 만족감이 떠돌았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무엇이 나오더라도 넘어가지 않을 테다.

 

그렇게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는 치열한 싸움이 오후 내내 벌어졌다. 카페의 사장만 신나는 참 아름다운 주말이었다. 그 사장은 앞으로 세 시간 후에, 둘이 앉았던 자리를 청소하며 세상을 저주하게 되는데 그건 지금으로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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