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불꽃

Stargazing(1)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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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컾 현대AU

(C)떨리고설레다 2022


너는 기억하지도 못할 아주 예전에, 너는 나를 사랑했어. 이런 말을 하면 분명 믿지 않겠지만, 나.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계속 너를 그리워했어.

 …우리가 전생에 연인이었다고 하면 너는 믿어 줄까.


Stargazing

별 보기

1


"…뭐야."

 막 불을 붙인 담배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갔다. 이사도라는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분명 반쯤 열린 창문을 넘어들어왔을 바루의 손이 제 담배를 들고 있었다. 갑작스레 빼앗긴 데 기분이 언짢아지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의 얼굴에 치솟던 짜증이 도로 내려갔다. 

이사도라는 창가에 몸을 기대며 나른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SNS 팔로워들이나 이전에 만났던 숱한 남자들 모두가 입을 모아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한 표정이었다.

"나 줘."

"이딴 거 피우지 마."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의 목적인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은 동요해 주길 내심 바랐던 이사도라는 실망이 티 나지 않게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바루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는 단홧발로 꾹 비벼 껐다. 하얀 신발이 혹 더러워지기라도 할까 봐 숨을 죽이며 지켜보다가, 이사도라는 참았던 숨을 낮게 내뱉었다. 방금 제가 얼마나 우스웠는지를 깨달은 탓이다.

멍청아, 어떻게 동요를 바래. 오히려 휘둘리는 건 제 쪽이었다. 그 앞에서는 우아한 척도, 고고한 척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상처받기 싫고 주기는 더 싫어서 한없이 조심스러워질 뿐이었다. 바루는, 언제나 그랬지만, 다른 이들 앞에서 꼿꼿이 세워 왔던 이사도라의 자존심을 산산히 무너뜨리는 곳이었다. 

"걱정해 주는 거야?"

 바루가 미간을 좁혔다. 이사도라는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눈으로는 동시에 그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꼼꼼히 훑어내려갔다. 탁한 프러시안 블루의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고집이 어린 눈매에 그을린 벌꿀 색 눈동자가 갇혀 있었다. 그녀를 응시하느라 조금 치켜 올라간 눈썹과 앙다문 입술선은 정색할 때조차 매력적이었다. 

지금까지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그래 왔듯, 정말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철저하게 그어진 선 위에 세운 벽마저 여전히 튼튼해서, 금방 무너질 것처럼 보이면서도 멀쩡했다. 이사도라는 눈을 깊게 감았다.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야 그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바루가 말했다.

"뭐라는 거야."

 이사도라는 눈을 뜨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더니 조금 우울해졌다. 오래 전이지만 여전히 선명한 옛날, 듣기 좋다고 칭찬받았던 소리였는데.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달라, 바루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확실히 아직은 많이 모자란 모양이야…. 이사도라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저보다 한 뼘은 족히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온통 검은색 투성이인 옷에서 카페 로고가 박힌 앞치마가 유일하게 눈에 띄었다. 새하얀 글씨를 감싼 진하고 어두운 녹색이 예뻤다. 사실 어떤 색이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지만.

"또 왜."

"커피 마실래."

 이사도라는 카페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제 차 곁에 서 있을 그가 아니라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면서. 도어벨만 딸랑, 울리는 건물은 고요했고, 막 문을 연 탓에 덜 데워진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어도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이사도라는 카운터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오던 바루는 조금 툴툴거리긴 했지만 별 말 없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머그잔 하나를 세심히 골라 들더니,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사진 안 찍혀?"

"이 시간에는 사람 없어서 괜찮아."


 그리고 몇 장 찍히면 좀 어때, 엎어 놓은 휴대폰 케이스를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며 이사도라가 대답했다.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늘 '네일'이 연관 검색어로 떠오를 정도로 손톱에는 꽤나 신경 쓰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좀 바쁘기도 하고 귀찮아서 영양제만 대충 발랐더니, 확실히 달라진 게 티가 나 거슬렸다. 

떨어진 별의 작은 일탈, 이외에 또 뭐 있겠어…. 덧붙이면서 앞에 자연스럽게 놓인 아메리카노를 들어 올렸다. 손은 손톱이 잘 보이지 않을 모양으로 잘 오므렸다. 그녀의 취향답게 혀가 데일 듯 따뜻하고 조금은 씁쓸했다. 그나저나 배가 고픈데, 투덜거리기 무섭게 쿠키 봉지 몇 개가 떨어졌다. 

눈을 깜박이며 위를 올려다보자 바루는 여전히 무심하게 답했다. 그녀가 원래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미리 듣기라도 한 것처럼.


"오븐 예열 안 돼서 허니브레드 못 만들어 줘."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마다 늘 그랬듯, 누군가가 가슴께를 꼭 잡고 있는 힘을 다해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이사도라는 천천히 잔에서 입을 떼고, 손을 뻗어 쿠키 봉지를 퐁 뜯었다. 하필이면 또 가장 좋아하는 아몬드 슬라이스가 박힌 것이었다. 

한 입 크기로 자잘하게 구워진 쿠키 하나를 입에 넣다가, 여전히 카운터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그를 발견했다. 제 앞자리를 탁탁 치자 바루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사도라는 쿠키가 든 입을 손으로 반쯤 가리고는 웅얼거렸다. 물론 손가락은 여전히 살짝 구부린 채였다. 앉아. 

바루는 미간을 좁혔다. 언짢을 때 늘 하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별 말 없이 천천히 걸어와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 와중에 말은 또 참 잘 들어, 그녀는 새 쿠키를 집으며 생각했다. 여지는 도대체 왜 남기는 거야….

"먹어."

"내가 준 걸로 선심 쓴다?"

"계산할 거거든!"

 쿠키를 하나 내밀자 바루가 토를 달았다. 어차피 받아 들 거면서. 이사도라는 비스듬히 턱을 괴고 눈을 굴려 카페 안을 빙 훑었다. 볼 때마다 조명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은은한 베이지색 불빛이 부드럽고도 달았다. 사장이라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만난다면 칭찬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불빛 아래에서 사람이 더 예뻐 보였다. 인스타에서 유명한 가게라더니 과연 그럴 만 하네. 

밤하늘 색을 그대로 옮긴 듯한 바루의 머리카락은 카페 빛을 받으면 아슬아슬하게 반짝였다. 이사도라는 그 우주 안에 손가락을 넣어 훑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너무 예쁘다. 마지막 연애 상대였던 유명 보이그룹 멤버 Z보다도 진심으로, 백 배는 더 나았다.

"뭐."

"아니거든!"

 컵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힐끔힐끔 곁눈질하다 들켰다. 바루는 이사도라가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과자를 하나 집어먹더니 무심하게 덧붙였다. 아님 말고. 서서히 창밖으로 돌아가는 시선을 어떻게든 붙잡아 놓고 싶어서, 이사도라는 충동적으로 내뱉을 아무 말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소식들을 재빨리 되짚으며. 

바루라는 남자는 스스로 고립되려는 것처럼, SNS나 어떤 방식으로의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저를 숨기는 사람이었지만 그 쌍둥이 누나인 바쟈는 달랐다. 그녀의 부업은 프리랜서 모델이었고 때문에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는 사진의 양도 많았다. 또 뭘 올렸더라. 분명 어제 봤던 것 같은데….

"아, 그…!"

"?"

 무턱대고 말을 질러 놓긴 했는데. 타임라인을 밝혔던 이야기들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흥미를 끌 만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어 이사도라는 조금 실망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사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가 좋아할 만한 게 뭘지 감조차 통 오지 않았다. 

핸드폰 케이스의 매트한 검정을 쳐다보다가, 하얀 머그잔에 선명하게 묻은 립스틱 자국으로 눈을 돌렸다가. 이사도라는 어디에서도 시선을 놓을 곳을 찾지 못하고 그냥 내리깔았다. 바루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져서 조금 무안해졌다. 결국 이사도라가 씹어낼 수 있는 말은 고작 한 마디였다.

"…까먹었어."

"뭐야."

 낮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이사도라는 조심스럽게 옆을 돌아보았다. 바루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팔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쿠키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걸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사도라는 조금 식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손톱을 숨기느라 조금 애매하게 오므린 손가락을 옆 쿠키로 가져다 대던 참이었다. 무심한 듯 던져진 한 마디에 손등을 찔려, 그녀는 움찔하며 손을 도로 내려놓았다.

"뭐 해?"

"…!"

"손톱은 왜 숨겨. 다쳤어?"

 가끔씩 있는 이런 순간이 이사도라는 싫었다. 애써 감추려 했던 작은 부분마저 잡아채고 걷어내는 예민함. 잠시 망설이다가 엉거주춤 접은 주먹을 펼치자 아무 무늬도, 색깔도 없는 평범한 손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사도라는 화가 났다. 저에게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게 아닌 줄을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더 긴장하고 떨게 되는 게. 일부러인지, 자연스러운 매너인지 헷갈리면서도 괜히 기대하게 되는 게. 미끼마냥 던져지는 여지와 그걸 또 물 수 밖에 없는 제가 너무너무 한심하고 짜증나서.

"아니… 오늘 아무것도 안 발라서."

 이사도라는 떨리는 숨을 그가 듣지 못하게 길게 뱉어내고선, 천천히 변명하듯 답했다. 바루가 가볍게 미소지었다. 여전히 별 감정 없이 무심한 눈동자였지만, 어쩐지 아까보다는 조금 다정해진 것 같아 그녀는 시선을 푹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그래, 그러니까 이런 느낌이….

"뭐야. 괜찮으니까 그냥 살아."

 정말 싫다고. 바루가 말했다.

"안 이상해."

.

.

.

"오늘은 어땠어?"

 회색 기가 감도는 베이지색 소파에 앉아, 옆의 분홍색 쿠션을 꼭 끌어안고 이사도라는 친구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들었다. 금테가 둘러진 아기자기한 찻잔은 이사 선물로 그녀가 선물한 것이었다. 

입가에 가져다 대자 달달한 장미향이 부드럽게 코끝을 간질였다. 집주인의 취향대로 적당하게 식은 찻물은 그녀가 선호하는 온도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이사도라는 시선을 바닥에 유지한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왜."

 아이비 지니어스는 바닥에 앉아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컵받침과 잔이 부딪히는 소리를 살짝 울리더니 걱정스러운 얼굴을 이사도라에게로 바싹 들이밀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고 새파란 눈동자가 코앞에서 깜박이자 이사도라는 몸을 반쯤 뒤로 젖혔다. 뭐야,

"기분 나빠."

"내가, 아니면 언니가? 혹시 둘 다?"

 쳇, 이사도라는 낮게 혀를 차며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이비의 추측은 빌어먹게도 항상 정확했다. 선택지에 바루가 빠진 것마저도 완벽히. 차를 입 안에 반쯤 머금고서 그녀가 들릴락말락 웅얼거렸다. 붉은 작약무늬 찻잔에서 풍기는 향만 쓸데없게도 지독하게 달았다.

"…마지막."

아이비는 손톱으로 탁자를 톡톡 소리 나게 두드렸다.

"그럴 수 있지."

난 이해해,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대로라면 화제를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사도라가 안도하기 무섭게, 아이비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더니 집요하게 캐물었다.

"그래서 왜냐니깐?"

"나한테 물어봐도 난 몰라."

그냥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걸 어떡해! 이사도라는 외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비슷한 말을 했다가 뼈아픈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어, 도대체 왜 그 사람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부모도 없고, 좋은 집안도 없고, 돈은 물론이야. 가진 것이라고는 오로지 반반한 얼굴과 몸뚱아리뿐인 그 남자에게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어서? 

그때 이사도라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대답거리는 많았지만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무엇을 대가로 지불해도 좋으니 단 하나만 받고 싶은 이것이.

아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도라도 따라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어떤 정반대의 견해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둘 다 그 사실을 이미 받아들였다.

아이비 지니어스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랑은 장난이며 인생은 실전이다. 대가 없는 성애는 실존하지 않는다. 완벽한 물물교환, 내가 원하는 것을 받으며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그런 형태 외에는 영원할 수 없다.

과거였다면, 정확히는 이사도라 세스가 아직 십 대인 시절이었다면 그 말에 동의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사도라는 그때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사도라는 믿었다. 그녀가 살아온 시간을 이해하게 된다면, 아이비 지니어스 또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사랑이다.

.

.

.

인생의 어느 때가 지나면 느닷없이 깨닫는 날이 온다.

나는 왜 태어났으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는가. 

이사도라의 그것은 열아홉에서 스물 사이의 어느 날에, 어떠한 전조 증상도 없이 갑작스레 일어난다.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년의 기억이 단번에 밀려들어오는 까닭에 처음에는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픈데, 그것도 며칠이 지나 중요한 것만 남고 싹 가라앉으면 괜찮아진다.

그 기분을 처음 느꼈을 때 이사도라는 어른이 되어 가는 도중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겪는 현상인 줄 알았다. 성숙해져 가는 일종의 통과 의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깨끗해진 머릿속에 잔재하는 기억만 되씹어 봐도 쉬이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 이전의 기억 따위를 이번 삶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이건 무언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사도라가 존재한 곳은 매번 달랐다. 제국의 귀족, 에프릴레트의 공주님, 북방 부족의 전사에서 심지어는 어느 이름 모를 왕국의 여왕 폐하까지도 되어 본 적 있었다. 이사도라는 공작이었고 마녀였으며 민족의 구원자이자 신의 대리인이었다. 이사도라는 사랑받았고 사랑받지 못했고 축복받았고 축복받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인지 손에 꼽기조차 힘든 수많은 생을 보냈다. 

그리고 모든 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모든 곳에서 이사도라는, 핏줄 속에 남은 감각으로 기억하기로는 혼신을 다해 그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는 매번 단명했고 그래서 이사도라는 홀로 다음 삶을 살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고운 모래 입자를 최선을 다해 받친 채, 혼자서만 기억하는 모든 시간을 한으로 품고선.

억겁이 지났다.

거기까지 떠올리면 가끔 숨이 막혔다. 턱끝까지 찬 공기가 차올라 내뱉는 호흡이 가빴다. 나는 왜, 도대체 왜.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아야 할 오래된 전생의 조각을 가지고. 온 몸이 뜨거워져 잠에서 깰 때면 이사도라는 수도 없이 물었다. 전해질 대상이 없는 질문은 주변을 잠시 맴돌다가 하릴없이 흩어졌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하지만 그렇다고 잊어버리기에는, 이번 인생의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팽겨치기에는. 그 기억이, 수백 번의 전생과 환생에서도 전혀 희석되지 않은 처음의 사랑이 너무 애처로워서. 그리고 꼭 찾아 헤매다 지쳐 포기를 선언하기 직전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그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매번의 이사도라는 결국 그 감정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도대체 신이여 나를 왜 이리도 비참한 열병에 내던져 두었는지. 꾸역꾸역 토해내어도 결국 도로 삼켜야 하는 게 사랑이라. 그래서 신이여 나는 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새벽에 젖어 울 때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원했잖아. 네가 맹세했잖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어도 몇 번이고 영원토록 사랑하겠다고, 네가 감히 빌었잖아?

그리하여 이사도라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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