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불꽃

영원을 바치다

어느 탐심(貪心)의 기록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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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컾 공식 서사(리뉴얼 전) 일부

(C)떨리고설레다 2021


◈◇◈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탐이 났다. 물론 지금과 같은 종류는 아니었다. 잘 다듬으면 쓸 만한 원석을 발견한 기쁨, 직접 깎아 길러 내고 싶다는 욕망, 마침내 완성된 보석이 제 손아귀에 들어왔을 때 얻을 환희. 태초에는 분명 그런 비슷한 것이었다. 온갖 오묘한 기분이 뒤섞여 만들어낸 인재(人才)에 대한 탐심이었다. 몇 차례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지금처럼 기이하게 변성하기 이전에는.

잘 숙성된 한 병의 포도주 같은 향을 풍겼다. 정교하게 세공된 유리잔에 술이 따라지는 소리를 가지고, 동시에 프리마돈나가 부르는 아리아의 청아한 고음 같은 냄새이기도 했다. 그 농익은 과일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그닥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깨진 향수병의 유리 조각에서처럼 흩어져 나오던 빛의 산란을 마주했을 때 이사도라가 떠올린 건 단 한 가지였다. 폐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여들어오는 물을 삼키며 문득, 지독한 소유욕을 느꼈다.

그래, 이사도라는 미치도록 그가 가지고 싶었다. 가장 깊은 안쪽까지 달아오를 정도로 탐이 났다. 여느 것이 그렇듯 살짝 어긋나 있기까지 한 감정이었다. 서투름에 마냥 어쩔 줄 몰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약한 욕망을 품었다. 손발을 묶어 제 곁에만 붙들어 놓고, 해사하게도 물든 여린 뺨을 잡아 제게로만 돌려 놓고, 질 좋은 호박(琥珀)을 닮은 눈동자에는 제 이름을 몇 번이고 새겨넣어서 그의 세계에 저만, 그렇게 오로지 저만 가득 채워져 있기를 바랐다.

.

.

.

"…뭐?"

못 할 말이라도 들었다는 양 바루가 얼굴을 굳혔다. 썩 품격 있는 어조는 아니었다. 세스 공작 이사도라는 묵은 왕조의 풍습을 몰아내고 카미로사의 시대를 새롭게 연 개국 공신이며, 비서인 그는 별다른 공이랄 게 없는 데다 고작 이달고(*hidalgo, 작위 없는 귀족) 출신에 불과함을 감안했을 때 더더욱. 하지만 애초에 이를 원한 사람이 저였으므로 이사도라는 딱히 정정할 생각이 없었다.

이사도라는 흑단 책상의 둥글게 깎인 대리석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서랍을 열면 바로 보일 위치에는 보석함을 넣어 두었다. 진보랏빛 벨벳으로 만들어졌고 네 귀퉁이에 은장식이 붙은 상자. 그녀의 한손에 아슬하게 잡히는, 반지 하나를 넣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다.

원래 그가 집무실에 발을 들이는 순간 책상 위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했다. 계획대로라면 분명 그랬다. 이사도라는 바삭거리는 입술을 가볍게 적셨다. 태연한 척 제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처럼 적절한 시기를 놓쳐 오래 서랍에 남겨 둔 것은, 바라던 상황과는 많이 달랐지만 당황한 티를 내기에 그녀는 너무 능숙했다.

"왜?"

그래도 목소리에 비치는 떨림까지는 감추기 역부족이었나. 이사도라는 옅게 묻고 드레스 옆자락을 보이지 않게 꽉 쥐었다. 크림색 새틴 천이 손가락 사이로 처량하게도 구겨졌다. 그러고는 심장이 덜컹덜컹 내려앉는 기분에 귓불을 붉혔다. 아무리 상처받지 않은 척을 해도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돌아올 거절의 말, 그 뒤를 잇는 미안하다는 표정. 혹은 역한 것을 보는 듯한 경멸 따위의 최악의 가짓수가 총총 머릿속을 맴돌았다. 두려웠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사도라 세스는 살아온 이래 최고의 긴장을 맞이했다.

"…도라."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입에서 제 이름이 다정하게 흘러나왔다. 이제는 죽고 없는 오라비와 아직 사이가 좋았을 시절 가볍게 불리우던 애칭이었다. 그녀를 그렇게 이르는 사람은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았다. 바루는 낮게 한 번 더 반복해서 부름으로써, 제가 그 중 하나임을 친절하게도 되새겨 주었다. 들리는 음절이 너무도 달큰했다. 이사도라는 코끝이 먹먹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치마를 움켜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다행히도, 혹은 다른 의미로 불행히도 그녀의 걱정을 비켜간 종류였다.

"원한다면 가져도 좋아."

바루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야."

"…뭐가?"

이사도라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흐릿하게 새어나온 목소리가 가맣게 젖어들어갔다. 바루가 고개를 저었다.

"그 자리는 내게 주어질 만한 곳이 아니야."

하도 오래 보아 이제는 익숙해진 겸양과 함께 대안이 내밀어졌다. 대신, 하고 내뱉는 말끝이 떨렸다. 대신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방안을 기억해 줘. 그 단어를 스스로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수치이고 치욕일 텐데도 바루는 꿋꿋이 문장을 끝맺었다. 말을 마친 입술이 원래대로, 고집스럽게 닫혔다.

정부(情夫), 엄연히 남편의 신분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정을 통하는 외간 남자. 가문 간의 정략 결혼이 상당히 흔한 탓에 웬만한 귀족이라면 흔히 한둘쯤 갖는 존재였다. 하지만 고상한 척 하기를 좋아하는 사교계의 풍습에 따라 뒤에서는 모욕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가 일쑤였다. 저 또한 그러하면서 아닌 척 남을 죽어라고 공격하는 인간들의, 그 물어뜯기는 먹이. 이사도라는 바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꺾일지언정 절대 굽히지 않을 고고한 귀족의 성격을 얼마나 많이 물려받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그 자존심 강한 이가, 스스로 그런 자리에 남겠다고 한다.

"당신은…."

이사도라가 울컥했다.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야?"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도 그 자리를 거절한다는 건, 감히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그이에게 마음을 주어 버려서, 내게 묶일 수 없다는 거야? 북받치는 질문에 바루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이사도라는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그 여자를 찢어발겨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뭐?"

바루가 보기 드물게 당황해서 물었다. 그녀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은 아니었다. 끝없는 구덩이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기분에 이사도라는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분명 청혼을 거절당한 사람은 저이고 상처받은 사람 또한 저인데. 그가 받은 모욕이라 해 봤자 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조차도 못한데. 저런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제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라도 지은 사람마냥 느껴진다. 이사도라는 옷자락을 움켜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도록 힘을 더 주었다. 항상 그랬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녀는 늘 철저한 약자였다.

"지금은 귀족들의 마음을 달랠 때야. 실세들이 사라졌대도 여전히 귀족파에는 건실한 가문들이 존재해. 세스에는 입지를 단단히 해 줄 그들의 표가 필요해…."

가문에 무엇이 필요한지 이사도라보다 더 잘 이해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의 말에 한 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사도라는 제가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이사도라가 입을 열었다.

"아이비를 황후로 만들 거야."

아카데미 시절부터 가장 가까이를 지킨 캐스티아의 아이비 지니어스를 호적에 올려서, 세스의 딸로서 황실에 들어가게 할 테다. 황실과 이어진 확실한 끈이 필요했다. 하지만 본래 자식이 드문 세스에는 적당한 일가 친척이 없고 이사도라가 세스를 떠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 상황을 깨달은 이후부터 줄곧 고심해 오던 사안이었다. 아이비와도 이미 합의된 일이었다. 권력욕이 강한 그녀는 이야기를 자세히 듣자마자 곧장 승낙했다. 죽은 이의 호적을 수정한 사례도, 흔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존재함을 확인해 두었다.

"그 애가 건재한 이상, 카미로사와 잡은 세스의 손이 잘리지 않는 이상 감히 나를 위협할 수 있는 건 없어."

카미로사 이외의 어떤 가문과도 단단히 묶이지 않는 것. 혼인과 혈연이라는 강한 연을 배제하고 오로지 거래를 통해 동맹을 만드는 것. 자신 있게 말하는 전략이, 실은 위험 부담이 상당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이사도라는 알았다. 안전. 권력을 놓치지 않는 방법. 바루의 제안은 지극히 합당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제 와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사도라는 방금, 줄곧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던 세스의 명예가 흙바닥에 짓밟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는데.

이사도라가 울컥했다.

"나는, 나는 당신에게 과분한 자리를 주겠다는 게 아니야."

움켜쥔 주먹 속에서, 손톱이 손바닥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어."

세스의 일원으로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바루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어깨 너머로 곁눈질만 유지한 채 황제를 끌어내렸던 눈으로 그를 살펴볼 것이다. 사소한 행동이나 작은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미친 개처럼 달려들어 죽일 듯 물어뜯겠지. 어쩌면 그는, 귀족의 명예라고는 하나 없었다고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고작 반반한 얼굴만 믿고 이사도라를 구슬려 옆자리를 차지한 천박한 남자라고.

이건 모든 면에서 바루에게 불리한 제안이었다. 적어도 이사도라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그냥 당신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라도 내 손을 잡아 달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나를 위해서, 내가 당신을 원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갈망하여서, 그 모든 비극을 기꺼이 짊어지라고 감히, 청하는 거야.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올라왔다. 이사도라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따끔거리는 코끝을 꾹 눌러 억지로 밀어 삼켰다.

울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황후가 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늦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멋쩍었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이사도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손가락 틈새로 곁눈질한 그는 훌쩍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바루가 손을 뻗어 이사도라의 것을 끌어내렸다. 세세한 주름이 진 가슴께의 드레스 아래에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난…."

이사도라가 웅얼거렸다. 코 언저리가 찡했다.

"세스를 몽땅 카미로사에게 안겨 주는 짓을 할 리가 없지."

황가의 이름을 담는 투가 퍽 불경스러웠지만 감히 이를 지적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적어도 이 방 안에서는 그랬다. 코를 살짝 훌쩍이며 이사도라가 덧붙였다. 귀족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그것 또한 아무렴 어떤가. 

"내가 원하는 것은 세스의 부흥이지 카미로사의 부흥이 아니니까."

이사도라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가장 바깥쪽에 보관해 둔 상자를 꺼냈다. 반지는 발톱으로 뱀을 움켜쥔 독수리가 날개쳐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입에 물린 투명한 자수정은 세스의 공작부인에게 대대로 주어지던 보석이었다. 지금까지의 세스와는 달랐으면 하는 마음에 보석만 빼내어 새로운 링에 박았다.

반지를 꺼내다가 문득 올려다 본 눈동자가 하염없이 떨렸다. 이사도라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루의 손을 잡았다. 검을 잡는 이의 손답게 손바닥은 단단했고 굳은살이 박였다. 서기라는 본연의 직무에 충실한 탓에 손가락 곳곳은 잉크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사도라에게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피하지 마."

이사도라가 명령했다. 바루는 얌전히, 손에서 힘을 풀고, 이사도라가 움직이는 대로 맡겼다. 남자치고는, 심지어 검을 잡는 이라고 믿기 어렵게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에 반지는 딱 맞게 들어갔다. 이사도라는 그 위를 가만히 손가락으로 덮었다 떼었다. 고개를 들어 사랑하는 남자의 선명한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스노의 바루, 당신에게 청합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여전히 요동치는 심장은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상상만으로도 뜨거운 단어들의 조합을 천천히 내뱉었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요…."

흔들림이 서서히 잦아들어갔다. 대신 눈이 부드럽게 접히며, 밤하늘을 닮은 속눈썹이 눈가를 덮었다. 바루가 이사도라에게 잡혀 있던 제 손을 뺐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의 손을 제 것으로 덮었다.

이사도라는 울고 싶어졌다. 아니, 웃고 싶었다. 사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이사도라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래서 이사도라는 그냥, 움직이는 대로 얼굴 근육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표정이 조금 이상한들… 그러한들 아무렴 어떤가.

바루가 대답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당신을 거절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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