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하는 자놀

해바라기 피는 봄

몬트넬 - 네레우스 과거사

곡식창고 by 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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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벗어나 있는 언덕배기에 늦봄의 나른한 햇빛이 스르륵 비쳤다. 네레우스는 태양을 한 번 올려다본 뒤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봄아지랑이가 나풀거리며 춤을 춘다. 정상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높이의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니 아래로 집들이 띄엄띄엄, 그 사이로 밭이 총총히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어촌과 시원하게 전진하고 후퇴하기를 반복하는 바다가 한 눈에 보였다. 네레우스는 잠시 마을을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섰다. 그의 깊은 바닷속을 꼭 빼닮은 남색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부스스 흩어진다. 네레우스는 느슨하게 묶여있는 머리끈을 풀어헤치고 위로 틀어올렸다. 정면에서 보면 뒷머리가 보이지 않는 게 꼭 어릴 적 머리가 짧았을 때 같다. 네레우스는 지금 열다섯의, 조금은 커버린 아이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시선을 돌린 곳은 아직 철이 되지 않아 꽃망울도 채 맺지 않은 커다란 해바라기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네레우스는 해바라기로 이루어진 작은 숲을 헤집고 들어갔다. 해바라기 밭 한가운데에 도달한 네레우스는 쭈그리고 앉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사벨, 나 왔어. 2년 만에 보네….”

네레우스는 잘 닦여 이끼 하나 없는 묘비석을 쓰다듬었다.

여덟살 늦봄. 네레우스는 그 날도 어김없이 일을 나간 부모를 기다리며 의미없이 커다란 가죽공을 차고 주워오기를 반복했다. 공놀이는 이제 딱히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할 일이 없어 할 뿐이었다. 물레방아도 제 목적이 있어 굴러가는 것을 반복하는데, 네레우스에겐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 때였다.

“저기 등대 밑 작은 집에 마귀할멈이 산대!!”

어린아이 하나가 흥분하여 외쳤다. 네레우스는 공이 저멀리 달아나지 않게 얼른 붙잡고는 흥미로운 소식을 알린 아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야, 세상에 마귀할멈이 어딨냐?”

“진짜 있다니까! 콜린이 거기 사는 마귀할멈이 마법을 부리는 걸 직접 봤대! 심지어 소문에 의하면….”

아이는 네레우스에게 굉장한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바짝 붙어 속삭였다.

“저 마귀할멈, 우리 같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대…!”

“뭐, 뭐? 잡아먹어?”

“그렇다니까~! 마법을 쓰려면 어린아이의 싱싱한 피가 필요하대!”

어린아이다운 발상이었다. 이 곳은 도시와는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마을. 아무래도 그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마법에 대한 지식이 이 마을에 있을리가 없었다. 네레우스는 그제야 흥미가 생겼는지 침을 꼴깍 삼키며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곤 말했다.

“그, 그런데 왜 어른들이 내쫓지 않는 거야…?”

“마귀할멈이 어른들 앞에서는 좋은 사람인 척 하니까 그렇지. 그 마법으로 마을 어른들의 일을 거들어 준다나봐.”

“그럼 좋은 사람 아니야?”

“이 바보가! 마을 어른들이 너처럼 속은 거야!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니까?”

“그렇다기엔 사라진 아이도 없고… 증거가 없잖아.”

“어휴 답답해. 됐다! 그러다가 너가 제~일 먼저 잡아먹히는 거지 뭐.”

그 또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네레우스는 덜덜 떨면서도 다 큰 채가 하고 싶어 애써 무섭지 않은 척 말했다.

“뭐래, 마귀할멈 까짓 거, 내 주먹 한 번이면 이기거든?”

“푸핫, 키도 쪼끄만 게~”

“키랑 무슨 상관인데! 마귀할멈한테 한 번 나와보라지! 내가 확….”

“그래, 그 마귀할멈 여기 있다.”

갑작스레 들린 가느다란 노인의 목소리의 두 아이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으, 으아아악!! 마귀할멈이다!!”

둘은 노인을 보고 기겁하며 달려나갔다. 아까 무섭지 않다며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네레우스는 잔뜩 겁에 질려 잡아먹히기 싫다고 외치며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내달렸다. 그러다 그만 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긴 제대로 넘어졌는지 무릎이 욱신거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긁혀 벌어진 상처 틈으로 피가 새어 나왔다. 네레우스는 상처가 아프고, 또 노인이 무서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때 노인이 네레우스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우, 우아악…! 잡아먹지 마, 나 맛없다고!”

네레우스는 두 팔을 허우적대며 노인을 가로막았다. 여전히 길바닥에 엎어져 앉은 채. 노인은 그의 손짓이 별 위협도 되지 않는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네레우스는 이대로 어린 나이에 일찍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푸른 빛이 노인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노인이 네레우스의 무릎을 조심스레 쓰다듬자 피가 금새 멎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네레우스는 그 광경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이, 이것도 마법이야?”

“그래, 마법이지.”

신기함. 그리고 호기심. 마법은 어린아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변두리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 번화가라고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여덟살 꼬맹이에게는 더더욱. 네레우스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의 흙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는 툴툴거리며 네레우스에게 말했다.

“또 어리석게 뛰다가 넘어지면 그 때는 진짜 잡아먹어버릴지도 모르니 조심해라.”

실로 괴팍한 성격의 노인이었다. 자신을 아이를 잡아먹는 마귀할멈이라 오해하고 겁에 질려 도망가다 넘어진 아이한테 잡아먹어버린다는 협박이라니. 그도 그럴 것이 그 노인은 어려서 홀로 여행을 떠나 온갖 험한 일은 다 겪어본 자였다. 그런 환경에서 그의 성격은 모날대로 모나버리고 만 것이었다. 전 생애에 걸친 길고 긴 여행을 끝마친 뒤 노인은 이제서야 여행 중 보았던 가장 아름답고 한적한 마을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대로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 상부상조하며 지내다 조용히 죽으면 참 좋겠군, 이라 생각하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동네 꼬맹이의 오해는 일종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노인이 돌아서 제 집으로 가려는데 허리에서 작은 당김이 느껴졌다.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까 무릎을 치료해준 꼬맹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코트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할멈, 나도 그 마법이란 거 가르쳐주면 안 돼?”

꼬맹이, 네레우스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노인은 네레우스를 잠시 훑어보았다. 확실히 마법에 재능은 있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 재능을 꽃피우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한 아이였다. 그 시간을 홀로 버텨낼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불가능할 것이라 노인은 생각했다. 아주 긴 시간을 한 가지에 몰두하는 건, 정말 타고난 노력파에게만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노인은 아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왜 안 돼?”

“재능이 없어.”

노인은 그리 말한 뒤 네레우스를 내버려두고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포기할 네레우스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레우스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알아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그는 그 날 이후로 틈이 날 때마다 등대 밑 작은 집으로 달려가 노인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며 매달려 징징대었다. 어느 날은 참다못한 노인이 두꺼운 책 한 권을 턱 내려놓더니 네레우스를 보며 말했다.

“이거 읽고, 나온대로 따라해서 저기에 불 피워내는 걸 성공하면 그 때 알려주마.”

“진짜? 진짜지? 약속한거다?”

“난 한 입으로 두 말 안 해.”

그 날부터 네레우스는 오전에는 부모님 일을 돕고 오후에는 노인의 집 앞마당에 주저앉아 불을 피워내려 애를 썼다. 노인이 내어준 ‘마법 기초 개념서’는 낑낑대며 집으로 들어가 눈이 감겨 잠들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노인은 그런 아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참을성이라곤 전혀 없는 어린아이가 혼자 저것을 해낸다면, 그런다면 노인 생각에 정말로 그 아이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할멈, 할멈 나와 봐! 나 성공했어!!”

노인이 문을 열고 나오자 보인 것은 숯댕이가 얼굴에 잔뜩 묻은 네레우스와 한 줄기 연기를 피워내고 있는 작은 불씨였다. 노인은 희미하게 웃더니 네레우스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아야!”

“자꾸 할멈이라고 부를테냐. 내 이름은 할멈이 아니라 이사벨이다.”

“우윽… 알겠어, 이사벨. 그럼 나 이제 마법 가르쳐주는 거야?”

노인은 답없이 제 집으로 들어갔다. 네레우스는 아까 맞는 부분을 문지르며 굳게 닫힌 다갈색 문을 빤히 쳐다봤다. 그는 마당에 주저앉아 소리쳤다.

“가르쳐준다며!! 왜 그냥 들어가는데!”

“이 좁쌀만한 녀석아, 내가 안 가르쳐준다 했니? 하여간 어린 것들은 참을성이 없어, 참을성이.”

노인, 이사벨이 툴툴거리며 멋들어진 모자를 쓰고 도로 집 밖으로 나왔다. 그는 네레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라. 니 지팡이나 하나 고르러 가보자꾸나.”

네레우스가 환하게 웃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신이나 팔짝팔짝 뛰더니 이사벨의 손을 덥썩 잡았다. 네레우스는 자신의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뒤이어 그의 눈 앞에는 익숙한 시골마을이 아닌 화려한 간판을 달고 있는 상점들로 가득 들어찬 골목길이 펼쳐졌다. 그 날은 네레우스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도에 가 본 날이었다.

“네레우스 씨~!”

저를 부르는 소리에 네레우스는 혼잣말, 아니, 대화를 하다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곧이어 그의 애인, 몬트센이 해바라기를 헤치고 들어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잖아요!”

“아하…. 센, 많이 걱정했어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어머님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 일러주시지만 않았어도 전 오늘 하루종일 네레우스 씨 이름을 외치며 마을을 헤집고 다녔을 거에요.”

“센이랑 상관없는 일이라 시간 낭비가 될까 봐 그랬어요. 미안해요.”

“네레우스 씨가 미안할 게 뭐있어요?”

몬트센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름 고민하고 결론낸 거잖아요~ 결과가 바보같았을 뿐이지.”

“윽….”

네레우스는 뺨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짖궂게도, 그의 애인은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조금 즐기는 듯 했다. 몬트센은 네레우스를 바라보며 생긋생긋 웃다가 그제야 묘비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누구에요?”

“아.”

네레우스가 몬트센의 손을 잡아이끌며 답했다.

“인사해요, 센. 제 스승이자… 친구에요.”

열네살 늦봄.

“이사벨…님.”

네레우스가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그의 스승을 불렀다. 옅은 흙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노인은 콜록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오더니 네레우스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새끼돼지같은 녀석아, 갑자기 웬 존칭이냐?”

“그동안 너무 버릇없게 굴었던 거 같아서…요. 이젠 열넷이나 됐고 철 좀 들어야하니까….”

“됐다, 징그러우니까 존대는 집어치워라.”

이사벨은 부엌으로 가 소금통과 설탕통을 집어들며 말을 이었다.

“난 어른이기 전에 네 말동무니까 말이다. 그래, 그 친구란 거지. 여하튼 거기 테이블에 앉아. 간만에 너 좋아하는 빵을 좀 구워뒀으니.”

“자꾸 무리하지 말라니까…요.”

“이게 무슨 무리냐? 취미다, 취미. 그리고 그 징글징글한 말투는 그만두랬어.”

네레우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초록색 격자무늬가 수놓아진 테이블보가 이제는 집에 있는 소파보다 더 눈에 익은 네레우스였다. 네레우스는 이사벨이 마법을 가르쳐주겠다 말한 그 날부터 거의 매일 이 집에 와 마도서를 읽거나 마당에서 마법 연습을 하곤 했다. 네레우스는 이사벨이 쟁반 째로 내놓은 빵을 반으로 죽 찢으며 말했다.

“…아, 맞다. 아까 친구랑 저 앞에 동산에 갔었는데 꽃이 잔뜩 피었더라고. 이사벨 꽃 좋아하잖아. 근데 멀리 못 다니니까… 직접 보러가기 힘들잖아. 그래서 내가 이사벨 보라고 몇 그루 뽑아왔어.”

“그래. …뭘 뽑아?”

“꽃나무.”

이사벨은 어이없어 하며 찬장에서 잼을 꺼내다말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정말 네레우스 말대로 꽃나무 몇 그루가 뿌리를 드러낸 채 덜렁 놓여있었다. 이사벨은 찢어낸 빵을 입에 쑤셔넣고 우물거리고 있는 네레우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이 망나니 녀석이. 어릴 때 하던 엉뚱한 생각들은 어째 커서도 그대로냐.”

“아야야…. 그렇지만 이사벨한테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마당에 심어줄까?”

“너 좋을대로 해라.”

이사벨은 썰렁하게 말했지만 네레우스는 분명 그가 웃는 것을 보았다. 힘들게 갖다나른 보람이 있다고, 네레우스는 생각했다. 잠시 뒤 마당으로 나간 네레우스는 삽으로 흙을 퍽퍽 퍼내고 꽃나무 하나하나를 마당에 일렬로 심었다. 이사벨은 마당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그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삽 세 개가 두둥실 떠오르더니 네레우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이사벨…! 그냥 가만히 앉아있어.”

“보고 있으니 답답해서 말이야. 마법 배워서 어디갖다 버리고 손으로 직접 퍼나르고 있어? 이 공벌레만도 못한 녀석아.”

“…아까 나무를 옮기는데에 마력을 다 썼단 말이야. 여기저기 쓰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고. 하여간 재능이 없어서….”

네레우스는 말 끝을 흐리며 삽으로 다시 흙을 퍼날랐다. 사실 그는 3년째 마법 실력이 거의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었다. 슬슬 회의감이 들었다. 어릴 때 무슨 오기로 마법을 배우겠다 선언하고 지금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재능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때 시작도 하지 않았더라면. 네레우스는 자신의 꿈이 완전히 허황된 것은 아닐까 두려움도 생겼다.

“재능이 없는 건 아니야.”

“응?”

“4년. 앞으로 4년만 지금처럼 해. 그제야 재능이 꽃 필 테니까.”

“이사벨이 직접 재능없다고 했었잖아.”

“너가 10년을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사벨이 네레우스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네레우스는 삽집을 멈추고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의 보랏빛 눈동자에 네레우스의 얼굴이 비쳤다. 처음 만났을 적에는 네레우스가 늘 올려다봤어야 했건만, 이제는 키도 거의 비슷하였다. 그는 문득 자신의 스승이 이렇게 왜소하고 나이 들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벨은 언제까지고 자신보다 거대하고 든든한 보호자일 것만 같았는데.

“네레우스. 지금까지 잘 했어. 앞으로 4년만 더 지금처럼 노력하면… 그 땐 이 나라에서 손 꼽히는 마법사가 될 수 있을거라 장담하지.”

네레우스의 눈이 반짝였다. 8살, 처음 마법을 보았을 그 때처럼. 이사벨처럼 노련한 사람이 확언하는 일이라면 정말로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네레우스였다.

“그럼 이사벨, 나 왕정 마법사도 될 수 있어?”

“그게 목표였던게냐?”

“응, 왕정 마법사가 되어서… 아니야. 뒷 말은 비밀. 나중에 진짜 되면 말해줄래.”

부모님과 스승님, 모두가 어려움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하고 싶어. 그리고 지금같은 일상을 이어가고 싶어. 네레우스의 꿈이었다. 왕정 마법사가 된다면 앞으로를 걱정할 필요없을 정도로 부자가 될 테니까.

‘그렇게 돈이 많아지면 부모님은 일할 필요가 없으니 나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이사벨의 불편한 몸을 보조하고 곁에서 지켜줄 일꾼도 고용할 수 있을거야.’

그에게 마법은 그저 수단일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행복을 지켜줄 수단. 이사벨이 슬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처럼만 하면 못 할 것도 없지.”

네레우스는 피식 웃으며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잠시간의 침묵. 얼마 뒤 이 침묵을 깨트린 것은 네레우스였다.

“이사벨은 왜 꽃을 좋아해?”

“아름답지. 그리고 그 아름다움 뒤에 추악함을 잘 감추고 있지.”

이사벨의 시선이 꽃나무로 향했다.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추악함을 숨기려 발버둥치는 생명체, 그게 바로 꽃이야. 그리고 그걸 향기와 아름다운 형태로 승화시키지. 그래서 좋아해. 철저히 가면을 쓴 생명체라서.”

네레우스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이고 추악하면 추악한 것이지 둘 다일 것은 또 뭐람. 네레우스는 잠시 삽질을 멈추고 저가 가져온 꽃나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사벨이 말한 것을 이해하려면 또 다시 6년이 흘러야만 할 것 같았다.

“스승이자 친구…”

“네, 마법을 가르쳐주신 분. 어릴 때 제가 마법을 가르쳐달라며 며칠을 매달렸었거든요. 그러다 겨우 제자로 받아주셨고요.”

네레우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는 몬트센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묘비를 보며 조잘거렸다.

“이사벨, 내 남자친구야. 그거 기억나? 이사벨이 맨날 나보고 그렇게 망나니같이 굴어선 오려던 색시도 다 도망가겠다고 그랬잖아. 근데 이제 나 연애도 한다? 많이 컸지. 그리고 나… 센 덕분에 마법 공부도 다시 시작했어. 이사벨이 예전에 말한 경지가 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 지 모르겠지만… 알다시피 너무 오래 쉬어서 말이야.”

몬트센은 네레우스가 이렇게 말이 많은 것을 처음 보았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네레우스의 본래 성격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네레우스의 스승은 어린 시절에 머물러있는 사람이라서 어릴 적 모습이 내비칠 수 밖에 없겠다고. 아니면 이사벨은 답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 공백을 자신의 소리로 매꾸어버리는 걸까. 몬트센은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열다섯 겨울의 막바지. 어느 날 이사벨이 대뜸 네레우스에게 귀걸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물이다.”

샛노란 금속 밑으로 은은한 푸른빛이 도는 술이 달려있는 귀걸이 한 쌍. 네레우스의 눈 색과 퍽이나 잘 어울리는 생김새였다. 네레우스는 귀걸이를 받아들고 잠시 쳐다보더니 종이에 싸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지금이야 아직 귀를 뚫지 않아 사용할 수 없으나,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내가 여행을 다니던 때 얻어두었던 것이다. 나중에 하고 다니면 부족한 마력을 보충하는데 도움이 될 게야.”

“…고마워. 그런데 갑자기 웬 선물을…”

“원래는 성인이 되었을 때 주려했는데,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아서 말이야. 아무래도 직접 주는 편이 나으니까….”

“그런 말을 왜 그렇게 담담하게 해?”

네레우스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언급 탓에 두려움이 덮쳐드는 기분을 느낀 네레우스였다.

“죽기는 누가 죽어. 이사벨, 내가 왕정 마법사 되는 거 봐야지. 당신 제자가 얼마나 잘 컸는지 확인해야할 거 아니야. 축하한다며 늘 구워주던 빵을 구워주고, 늘 그랬듯 자만하지 말라며 꿀밤을 먹여주고… 그래야 하잖아.”

“살만큼 살았으니 하는 말이다. 너도 말 한 마디에 감정이 오락가락할 나이도 아닌데 왜 이리 흥분해?”

“그냥 말 한 마디가 아니니까 그렇지…! 삶에 그렇게 미련이 없어? 왜… 왜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는데…”

“내가 감시 안 한다고 연습 게을리 하지말고.”

“내 말은 안 듣는 거지?”

네레우스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답답했다. 이사벨에게 자신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아 답답했다. 어쩜 이리 한결같이 못된 노인이 되려는건지. 그는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더니 주머니에서 아까 받은 귀걸이를 꺼내 내밀었다.

“지금 주지 마. 내가 성인이 되면… 그 때, 그 때 줘. 도로 가져가.”

“...”

“가져가라고!!”

네레우스는 귀걸이를 억지로 이사벨의 손에 구겨넣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사벨은 멍하니 네레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제 손에 들린 귀걸이를 한 번 보고 힘없이 허, 웃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네레우스, 네 스승님 오셨다.”

네레우스는 어머니의 말에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눈가가 벌게진 채로 창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그의 스승, 이사벨이 문 앞에 서있었다. 그는 아까까지 화내던 것은 기억나지 않기라도 한 듯 얼른 일어서 현관문으로 뛰어나갔다.

“이사벨, 몸도 안 좋은데 왜 우리 집까지…”

“미안하다.”

이사벨이 다시 네레우스에게 귀걸이를 내밀었다.

“내가 내 감정에 무디다고 다른 사람까지 그러리라고 생각한 건 잘못된 거겠지. 네레우스, 네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하다.”

네레우스는 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는 애써 눈물을 삼키고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사벨의 옷자락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이사벨은 제자를 끌어당겨 안고는 그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주었다. 울음이 잦아든 뒤 네레우스는 헤헤, 웃음을 흘렸다. 아까까지 화를 내더니 울다가 달래주니 금방 웃는 꼴이라니. 몸이 이만큼 컸어도 아직 어린애는 맞는 모양이었다.

“센, 재미없죠. 먼저 내려가 있어요. 마을 시장 가면 볼거리 많을 거에요. 가서 구경이라도….”

“아니요, 저도 네레우스 씨랑 같이 있을게요. 스승님 이야기, 좀 더 해줄래요? 지금껏 네레우스 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거의 못 들어 봤잖아요. 그래서… 궁금해요.”

네레우스는 자신의 애인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위해주고 언제든지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그는 몬트센의 손을 꼭 잡고 눈을 살며시 내리깔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승님은요, 무척 괴팍한 분이었어요. 뭐만 하면 구박하고… 좁쌀만한 녀석이라 부르질 않나, 틈만 나면 꿀밤을 먹이질 않나. 그래도 전 그를 참 좋아했어요. 또 다른 보호자…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아버지는 뱃일로 바쁘고 어머니는 농사일로 바쁘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을 끝내고 나면 부모님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그걸 채워준 게 이사벨이었어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렇게 매일같이 가 앉아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마법을 배우러 간 게 아니라요?”

네레우스가 몬트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몬트센은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걸까 싶어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을 되짚어보았다. 그가 세 번 쯤 다시 곱씹어볼 때 쯤, 네레우스가 입을 열었다.

“난… 마법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요. 이사벨에게 가르쳐달라고 조르던 아주 어릴 때야 흥미가 있었지만 좀 크고 나서는 재미없었거든요. 정말 찰나의 유흥. 딱 그 정도였어요. 그런데 마법이 아니면 이사벨의 집에 가있을 핑계가 없기도 했고… 잘하는 것도 딱히 없었기 때문에 이거 하나라도 잘해서 어른이 되면 마법으로 돈을 벌어 부모님과 이사벨을 모시고 살아야지, 그 생각이었어요. 그게 내가 마법을 배운 이유랄까요. 그래서 스승님이 돌아가신 날, 그 때부터 마법을 그만뒀고요.”

몬트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렸다. 나비 한 마리가 팔랑이며 날아오더니 그의 머리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나중에 연구자가 되고서 편의를 위해 사용한 게 다에요, 정말. 그리고 지금은….”

네레우스가 말 끝을 흐리더니 손을 뻗어 몬트센의 머리에 내려앉은 나비를 쫓아냈다. 하얀 날개를 가진 나비는 그 얇은 것을 흔들며 언덕을 타고 마을 아래로 날아갔다. 네레우스는 눈으로 나비를 쫓아갔다.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꿈을 상대에게 이야기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법으로 센을 지키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시작한 거 뿐이에요.”

열다섯 늦봄. 이사벨은 이제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침대에 걸터앉아 뜨개질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창 밖 마당에 핀 꽃을 구경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이 모든 일을 할 때 대부분의 시간에는 곁에 네레우스가 앉아있었다. 네레우스는 말없이 침대 옆에 기대어 앉아 마도서를 읽거나 명상을 했다. 그러다 이사벨이 몸을 일으키려 하면 얼른 일어서 그를 부축하고 가끔은 가까운 곳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였다.

어떤 하루. 이사벨이 창 밖에 길게 늘어선 식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해바라기가 피려면 아직 멀었겠지.”

“그건 왜?”

“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 노란 꽃잎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려나….”

네레우스는 그의 스승을 올려다 보았다. 이사벨은 어쩐지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해바라기. 그것은 이사벨에게 큰 의미가 있는 꽃이었다. 네레우스에게 정확히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는 해바라기에는 이사벨의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담겨있으리라 짐작했다. 다음날부터 네레우스는 마도서 옆에 공책을 펼쳐놓고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공책에 지렁이가 지나간 듯한 글씨를 펼쳐내곤 뒷마당으로 뛰쳐가기도 하였다. 그러기를 열흘.

“이사벨!”

네레우스가 창 밖에 서 창틀을 톡톡 두들겼다. 이사벨이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자 네레우스는 환히 웃으며 마당 쪽으로 손바닥을 쫙 펼쳐보였다.

“해바리기야.”

마당에는 해바라기 서너송이가 활짝 핀 채 태양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사벨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보였다. 그는 네레우스의 머리를 콩 쥐어박고는 말했다.

“이 망나니 녀석아, 이러면 내가 좋아할 거 같았냐. 요 며칠 바쁘다 싶었더니 이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였어?”

“아야… 당연하지. 그리고 뭐… 좋으면서.”

네레우스가 짖궂게 이히히, 웃었다. 이제 이사벨에겐 해바라기에 대한 추억이 또 하나 생겼겠지. 네레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뒤 해바라기들이 잎을 부르르 떨더니 꽃이 다시 움츠러들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네레우스는 멋쩍게 뒷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음…. 역시 아직 부족하네.”

“그러니 연습이나 더 해. 괜히 나 기쁘게 한다고 이러고 있지 말고.”

“괴팍한 할망구. 감동 좀 받으란 말이야.”

“말 다했니?”

네레우스는 입을 비죽 내밀더니 지팡이를 허리춤에 달린 주머니에 찔러넣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한 번 쯤은 대놓고 좋아해도 좋을텐데. 하지만 네레우스는 이사벨이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 기뻐했을 거라 생각했다. 해바라기를 처음 발견했을 때 따뜻한 미소를 보냈으니.

그리고 같은 해, 진짜 해바라기가 필 무렵. 이사벨과 네레우스의 이야기는 마침내 막을 내렸다.

네레우스의 말을 들은 몬트센은 미소를 지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도전해보겠다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네레우스는 또 말없이 몬트센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몬트센은 여전히 웃으며 상대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잠시 뒤 네레우스는 자리에서 일어서 지팡이를 빼들더니 몬트센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센, 이왕 여기 온 거, 이거 보여줄게요.”

그는 눈을 살며시 감고 작은 목소리로 영창했다. 하늘색 빛무리가 아른거리며 꽃밭에 퍼져나갔다. 해바라기들이 움찔거리더니 마침내 꽃망울을 터트렸다. 일제히 꽃을 터트리듯 피워내는 광경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예쁘죠. 이사벨이 꽃을 참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이사벨에게 꽃을 철보다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서 연구하고 만들어낸 마법이에요. 5분 정도 있으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긴 해서 큰 의미는 없지만…. 하하, 그래서 스승님이 그렇게 냉랭하게 굴었나.”

“무슨 상관이에요. 이걸 소중한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너무 예쁜데. 네레우스 씨의 스승님도 그 마음을 좋아했을 거에요.”

볼이 살짝 붉어진 네레우스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해바리기 꽃잎 하나가 흩날려 몬트센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레우스는 꽃에 둘러쌓인 몬트센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식물 연구 말이에요.”

“네?”

“사실 이사벨이 말한 꽃의 아름다움이 뭔지 궁금해서 시작했어요. 꽃은 추악함을 아름다움으로 감추는 힘이 있다고 그랬었거든요. 그 말을 이해해보려고 들여다보다가… 진짜로 빠져버린 거고요. 연구하면 할수록 그 추악함이 뭔지 모르겠고… 그랬었는데. 그런데, 이제 이사벨이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알 거 같아요.”

네레우스가 환히 웃으며 몬트센의 손을 붙잡았다. 몬트센도 그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사실 몬트센은 네레우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기뻐하는 게 보였기 때문에 공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쁨을 나누는 것에 꼭 이해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네레우스는 묘비에서 등을 돌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몬트센에게 물었다.

“이제 내려갈까요?”

“그래요.”

둘은 활짝 핀 해바라기 사이를 헤치고 나가 언덕을 내려갔다. 네레우스는 언덕을 다 내려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해바라기들이 다시 자신의 꽃봉오리를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네레우스는 왜인지 자신의 스승이 해바리기 옆에 서 저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몬트센을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마법 연습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구박하는 목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스승님.’

네레우스는 소리없이 입만 뻥끗거렸다. 이래도 그에게는 분명 잘 전해졌으리라. 네레우스는 오늘이 또 다른 느낌의 봄에 대한 기억이 될 거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늦봄의 따스한 바람이 다시금 네레우스와 몬트센의 곁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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