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
봄에겐 죄가 ——이란 것이었다.
봄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목소리라서. 바람에 흘러오듯 귓가에 와닿은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면 그곳에서는 검은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는 환상을 봤다. 머리를 길러서 뒤로 묶은 머리에 한 손에는 담배처럼 생긴 막대사탕 하나를 쥐고, 저를 불러놓고 아직도 자신을 보지 않는 눈동자는 분명히 검은색일 테다. 졸업한 고등학교의 교복 바지와 셔츠를 입고, 그 위에 후드티 하나를 입은. 그리고.
"왜."
유현, 초유현. 그 이름을 뱉으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뱉지도 못하고서 삼켜버린 이름이 있을 자리에 짤막한 의문 하나가 들어찼다. 그런 의문에 답하듯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 검은 것이 노란 것과 만났다. 봄은 이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잘 알았다. 봄아, 우리.
"봄아, 우리-"
히어로나 해볼까.
"히어로나 해볼까?"
우리 세상을 한 번 지켜보자.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살짝 흥분한 듯 높았다. 누가 지가 하자면 다 하자고 하는 줄 아나. 아, 왜. 한번만 하자. 히어로 한번 하면 무기징역이잖아. 종신계약이라고 해. 그거나 그거나. 혼잣말을 하듯, 어쩌면 툭 쏘아보내듯 틱틱대는 말과 그에 달라붙듯 감겨오는 문답. 한쪽은 거절이었고 다른 한쪽은 그럼에도 같이 하고자 했다. 하자, 싫어, 하자, 싫다고, 하자, 현아.
평행선을 달리던 대화에 비로소 적막이 생기고 나서 봄의 노란색이 현의 검은색을 봤다. 겹치는 두 색 중에서 먼저 피한 것은 현이었다. 빤히 보는 노란색에서 도망치고 나서야 힐끗, 어색해진 눈이 서로를 마주하다가, 다시 깨졌다. 그런 행위가 몇 번, 이내 적막을 깨 버린 것은 고요함을 만들어 낸 장본인의 달싹거리던 입이 제대로 벌려지고 나서였다. 왜, 하고 어떤 감정을 꾹꾹 담아 부른 나머지 건조해진 물음이었다. 그 건조한 것이 적막을 깨고 마중물처럼 초유현의 입을 열었다.
"그냥, 멋있잖아. 어차피 피해를 입히는 빌런의 수준도 낮을거고, 그, 왜-"
떨어진 문장 아래로 주절주절 흘러나오는 말들은 봄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들이었다. 현재 사회의 혼란한 정도와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라거나, 어떤 각오를 했고 사실 히어로라고 해도 여차하면 도망치자는 말 같은 것도. 아니, 사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말은 아닐테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초유현이라는 남자가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언제 한 번 말해 줬던가, 그런 작은 중얼거림에 이어지던 말이 멈추기를 한번. 이내 다시금 흐르는 말 속에서 봄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금 마주한 초유현은 이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그러면서도 이것은 스스로에 의해 왜곡된 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줄줄 흘러나오는 논리도 그럴싸했다. 그냥 설득에 못이기는 척 눈 딱 감고 하자고 하면 초유현도 그대로 좋아하겠지.
"현아, 나는."
그렇지만 봄은.
"그냥 히어로같은걸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히어로 활동이 정말로 싫었다. 현이 히어로 활동을 하는 것이든 뭐든, 누구든지 히어로 활동이 그냥 싫었다. 히어로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히어로 활동이란 것을 오롯이 싫어할 뿐이라서. 그렇구나, 하는 현의 반응에도 그저 응, 하는 한 마디만을 내뱉을 뿐이라.
그러면, 하고. 잠깐의 침묵 다음에 입을 여는 것은 현의 입이다. 서운한 것인지 후련한 것인지 모를 눈이 이번에는 똑바로 노란색을 마주했다. 그러면 나 혼자라도 히어로 할게. 목소리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서운함이라거나, 어쩌면 보여주겟다는 자신감의 표현일수도 있고, 혹은 이런 모습에라도 홀려서 같이 하자는 말을 꺼내보란 신호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봄은 그저 떠나는 현의 등 뒤를 바라보면서, 부디 그가 건강하기를. 이뤄지지 않을 소원을 빌었다.
봄아,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익숙하다면 가장 익숙한 목소리가 저를 부른다. 방금 전에 현의 뒤에서 그의 무사를 빌어주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현의 몸은 그렇게 성치 못했다. 제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를 붉은 칠을 전신에 펴바른 듯이 붉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분명 제가 기억하는 현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는데, 그의 모습을 보니 눈동자가 흔들리고 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의 탓으로 현이 저렇게 된 것임을 잘 알아서 더.
"왜 그렇게 다쳤어."
다치지 말라고 기도까지 해줬잖아. 현아. 옅은 물기가 나는 목소리가 현을 안았다. 신체 일부가 사라지고 제대로 힘도 없어진 현은 무거웠고, 양 팔로 그를 껴안듯 부축하면서 받는 무게가 마치 이것이 네가 현을 버려서 생긴 죄의 무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불쾌했다. 그러게 왜 그런 거 했어, 하지 마라고 할때 마음 접던가. 차마 그렇게 질러버릴 수가 없어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미안."
목소리엔 몸이 그렇듯 힘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에 대해 미안하다는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대충 알았다. 옛날에 봄이 말한 것을 안 들었다거나에 대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단지 떳떳하게 자랑할 수 없음에 미안하다고 한 거겠지. 후회는 하지 않는다. 현의 신조는 그랬다. 그래서, 저 사과가 봄에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항상 지금 이 순간이 되면, 봄은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에 니가 죽는다고, 히어로가 되면 그럴 거라고 말하면 그럼에도 히어로를 할 놈이라고.
현은 그런 놈이었다. 결국 제가 죽든 같이 히어로를 한 봄까지 죽든, 그 죽음에 미안해하면 미안해했지 그러면서도 행동하는 것은 멈추지 않을 놈. 봄은 멀쩡한 상태인 채로 현을 내려다보는 것이 문득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여태껏 이런 꿈을 꿀 때면 너를 따라 히어로가 되기로 했던가. 그래서 어떤 부상도 없이 너를 내려다보는 지금이 정말로 이질적이라고.
"현아, 나는 히어로 활동이 진짜 싫다."
히어로 활동이 현을 죽였다.
봄이 활동하지 않아서 어떤 불편함을 낳았다.
"그리고 너도."
그것이 싫어서 봄은, 멀리 도망치기로 했다.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