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테디

[최시현] 커뮤 개인로그 백업

최시현의 좌천 안 당하기 프로젝트 + 애인 과거 정리해주기

실제 단체, 인물, 사건, 지역 등과는 완전히 관계없는 창작물입니다!!

고증XXXX / 날조OOOOO.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한국 배경입니다!!!!

1

 

 

한 손에 난 화분을 든 시현이 유리문 옆에 붙어 있는 현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김진문 변호사 사무실]

 

김진문이라는 이름 옆에 붙어 있는 변호사라는 글자가 어색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장검사가 붙어 있었는데. 시현이 한숨과 함께 복잡한 감정을 지워내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에 붙어 있던 작은 종이 청아한 소리를 내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이 쳐다보았다. 시현은 그를 향해 살짝 눈인사한 후 말했다.

 

“최시현이라고 합니다. 변호사님과 약속되어 있습니다.”

“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직원을 따라가 대표 변호사실 안으로 들어가니 안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키고 시현을 맞이했다. 살짝 주름진 눈가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은 4년 전과 똑같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최 프로.”

“4년 정도 됐을 겁니다. 그런데 개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직원도 뽑았어요?”

“인마, 한 달 넘었어. 제일 늦게 와놓고 인사도 하기 전에 트집이야. 일단 앉아. 차는 뭐 줄까? 아, 너는 천 원짜리도 안 얻어먹으니까 녹차 티백 하나 써줄게.”

“참나, 커피 한 잔 얼마나 한다고 녹차 티백으로 퉁 치려고 하십니까.”

“그렇게 말해도 커피는 거절할 거지?”

“믹스라면 받죠.”

 

시현이 히죽거리며 소파에 앉자 그가 종이컵에 녹차 티백을 우려 가져왔다. 시현의 앞에 종이컵을 내려놓은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난 화분을 검지로 가리키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 화분 다 죽이는 거 알면서 난을 가져와?”

“전엔 시간이 없어서 죽인 거잖아요. 이제 시간도 많으신데 좀 정성껏 키워보세요.”

“바빠지라고 해야지, 이게 아예 저주를 하네.”

 

그가 웃으며 시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히죽거리던 시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다 깔끔한 새것이라 낯설었다. 아, 헌 것도 있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낯익은 법전을 보고 눈앞의 변호사가 검사였을 때를 떠올렸다.

 

“검사님 방은 지저분했는데 여긴 깔끔하네요. 아직 한 달밖에 안 돼서 그런가.”

“거긴 다 낡아 빠져서 지저분했지.”

“바퀴벌레도 나왔었는데.”

“언제?”

“제가 봤는데요? 강렬해서 언젠지도 기억나요. 3주차 목요일 밤? 불기소 처분 이유서 열심히 쓰고 있을 때 시야 끝에 까만 뭐가 움직이는 겁니다.”

“소설 쓰지 마, 진짜. 나는 그 방에 있는 2년 동안 한 번도 못 봤어.”

“아, 진짜예요.”

 

둘 다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숨기고 겉으로만 히죽거리며 시시한 말을 주고받았다. 옛날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요즘 근황도 이야기하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겼다. 미지근하게 식은 녹차를 두어 모금 마신 시현이 농담하는 듯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검사님 쓸쓸하실 텐데 여기 제 책상도 하나 놔 주실래요? 잘 놀아드릴 수 있는데요.”

 

계속 웃고 있던 김진문이 표정을 싹 바꾸고 정색했다.

 

“야, 너 총장 준비하던 거 아니야?”

 

시현이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누가요?”

“너.”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시현이 검지를 펼쳐 자신을 가리켰다.

 

“제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 그렇게 병적으로, 1년 차부터 같은 식구가 주는 거 아니면 커피 한 잔도 안 받고 깨끗하게 관리하는 놈이 어디 있냐? 저거 청문회 준비하네, 총장 아니면 정치인. 이렇게 생각하지.”

“아니, 1년 차에 동기가 지갑 하나 받았다고 탈탈 털리는 것 보면 당연히 겁먹고 관리하죠. 그리고 저 형사부인데요?”

“영원히 형사겠냐? 공안이나 특수로 날아갈 수도 있고. 그리고 내가 차장검사님들한테 최시현 시보 때 뭐 했냐고, 어떤 놈이냐고 연락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아?”

“아니 그걸 왜 지금에서야 알려주세요. 아, 덜 관리할걸. 부담스러워.”

 

시현이 머리를 감싸 쥐자 김진문이 허허 웃었다. 깐죽이던 놈이 저러는 걸 보니 꽤 재밌었기 때문이다. 잠깐 괴로워하던 시현이 평정을 되찾고 다시 자세를 곧게 했다.

 

“정말 진심으로 총장, 정치 그런 거 전혀 관심 없고 준비하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미 글러 먹었는데요? 저 차장 들이받았잖습니까.”

“아.”

 

어떤 사건인지 떠올린 김진문이 잠깐 말을 끊었다가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거 그렇게…… 마이너스는 아닐걸?”

“뭐가 아닙니까. 계급장 떼고 덤볐는데.”

“요즘 이프로스는 좀 다른가? 사표를 쓰니 이프로스도 못 들어가서.”

“아니, 이프로스는 또 왜요?”

“맨날 일이나 처하지 말고 이프로스 좀 보고 다녀. 어째 어린놈이 늙은이보다 인트라넷을 더 안 봐.”

“이프로스에서 또라이라고 불린 그때 이후로 잘 안 봅니다.”

 

김진문이 ‘또라이인 건 맞지 않나…….’ 하고 중얼거렸다가 시현이 성질을 부리려고 하자 양손을 살짝 들어 항복하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생각보다 내부 여론이 크게 나쁘지 않았어. 처음 또라이라고 뜬 사건부터 일관성이 있잖아. 어쨌든 하극상은 맞으니 직접적으로 네 편을 들 수는 없지만 속은 시원하다. 이런 스탠스?”

“…….”

 

시현은 믿을 수가 없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진문이 시현의 표정을 보고 소리 내서 웃었다.

 

“이렇게 편하게 보는 게 마지막이니까 다 말해줄게. 너 다음 발령 때 한직으로 처박힐까 봐 걱정되는 거지?”

 

그 말에 약간 생각하던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더 꼴 받으면 사표 쓰고 변호사나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제가 욕심이 있네요. 정확히는 이규희도 하는 차장, 내가 못 달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규희보다 딸리는 것 같잖아요.”

“너는 능력은 이미 증명됐으니 이대로 하면 무조건 차장까지는 간다. 총장은 모르겠는데.”

“총장은 저도 관심 없는데요?”

“차장 이상으로 영전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어.”

 

시현이 의문으로 미간을 살짝 좁히자 김진문이 단호하게 말했다.

 

“밖에서 얻어터지고 와.”

“…….”

“좀 지나면 짬이 차서 늦어. 적당히 초보 티도 갓 벗었고 혈기 왕성한 지금 연차가 적당해.”

 

시현이 그 어이없는 말에 뭐라 할까 하다가, 곧바로 의미를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김진문이 똑똑한 녀석. 하고 중얼거렸다.

 

“위험부담이 좀…… 있고, 운도 많이 필요하고.”

“그래도 잠재적 네 편을 완전한 네 편으로 돌릴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지.”

“아, 위험한데요.”

 

잠시 계산해보던 시현이 종이컵을 들어 남은 녹차를 다 마시고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농담을 던졌다.

 

“이거, 저 옷 벗었을 때 자리 청탁하러 온 건데 생명줄 이어 붙여주시네요.”

“나중에 갚아.”

“30년은 후에 갚아야겠습니다.”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진문이 따라 일어나서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제 연락도 하지 말고, 오지도 말고.”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그 손을 잠시 복잡한 감정으로 내려다보던 시현이 양손으로 공손하게 맞잡았다.

 

“시보 때도, 그 후도, 지금도 감사했습니다.”

“그래, 잘 가고, 최 프로. 아니, 이제 이렇게 부르면 안 되지. 최시현 검사님. 잘 들어가십시오.”

“……네. 번창하십시오, 김진문 변호사님.”

 

그 손을 놓으면서 아쉬움을 떨친 시현이 마지막으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tmi : 이제 동료가 아닌 검사-변호사로 이해관계가 생겼기 때문에 지금처럼 친하게 교류했다간 나중에 책을 잡힐 수 있어서, 김진문 변호사는 시현의 검찰총장길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시현을 위해 연을 끊어주는 것입니다.)

 

 

 

 

2

 

오전 9시 정각. 그에겐 교복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정장을 입은 시현이 검사실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던 김현진 수사관과 연민지 실무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아침입니다, 검사님.”

 

익숙한 상냥한 목소리와 까칠한 목소리에 시현이 들고 온 쇼핑백을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실무관님. ‘좋은’은 날려 먹었습니까?”

“월요일 아침이 좋을 리가 있나요?”

“하하, 맞는 말씀입니다.”

 

건강하게 혈색이 도는 얼굴로 웃는 시현과 달리 실무관의 안색은 파랗게 죽어 있었다. 검사실을 잘못 배정받은 덕분에 토요일에도 퇴근을 못 하고 주말인 어제, 일요일 아침까지 근무했기 때문일 터였다. 본인은 피곤해 죽겠는데. ‘인간 아닌 거 아냐?’ 실무관이 속으로 최시현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품는 것과 별개로, 안색은 나쁘지만 해맑은 표정의 수사관이 시현에게 다가와 그가 들고 온 쇼핑백을 기웃거렸다.

 

“이건 뭡니까?”

 

그 질문에 시현이 씨익 웃으며 쇼핑백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수사관과 실무관은 법전이라거나, 동기 누군가가 쓴 책이라거나, 아니면 철야를 대비한 갈아입을 옷 같은 걸 상상했지만 그런 것에서는 날 수 없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자 미간을 좁혔다. 쇼핑백에서 나온 건 꽤나 예쁜 드라이 플라워 리스였다.

 

“검사실의 환경 개선 및 조사 대상자의 정신 건강을 위한 장식품?”

“우와.”

 

수사관이 리스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펴보았고, 그 꼴을 보고 있는 실무관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검사님…… 그게 검사님이랑 이 삭막한 검사실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안 어울리니까 보면 긴장도 풀리고 웃기지 않겠습니까?”

“그거 옆 방에 들키면 정민훈 수사관님이 ‘민지 씨. 너희 방 영감님…… 드디어 미쳤니?’하고 물어봅니다, 분명히.”

 

성대모사가 똑같다며 웃음을 터뜨린 수사관이 덧붙였다.

 

“강새빛 검사님이 보시면 ‘최 프로 안 하던 짓 하니까 좀 이상해. 정신감정 받아봐야 하는 거 아냐?’하고 말씀하실 거고요.”

 

마찬가지로 소리 내서 웃은 시현이 덧붙였다.

 

“부장검사님이 보시면 지금 시위하는 거냐고 물어보겠군요. 자, 수사관님. 그거 손에 든 김에 문에 달아주시고. 오늘은 몇 개나 떴는지 볼까요.”

 

수사관이 리스를 걸러 문으로 가고, 실무관이 서류들을 가지러 나가자 시현이 자리에 앉아 PC로 이프로스를 확인했다. 시현의 일 처리가 빨라서인지 평소 그에게 배당되는 사건 건수가 다른 검사들보다 좀 더 많긴 했지만 이건 좀 심했다. 주말을 불태워 처리한 개수보다 오늘 새로 등록된 건수가 더 많았다. 시현이 잠시 침묵했다가 벌떡 일어났다. 리스를 건 후 자리에 앉던 수사관이 흠칫 놀란다.

 

“수사관님, 아아?”

“네, 얼죽아.”

“실무관님은 안 물어봐도 생초코라떼. 다녀오겠습니다.”

 

시현이 문을 열기 전, 문에 걸린 리스를 잠깐 바라봤다가 커피를 사러 검사실을 나갔다.

 

 

 

 

 

오전 11시 58분, 시현의 검사실은 종이 넘기는 소리와 형광펜을 긋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시현이 집중할 때 모든 자극에 굉장히 예민해지는 것을 알고 있는 수사관과 실무관은 그 집중력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수사관은 시현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책상에 서류들을 배치할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을 모두 버리고 왔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집중력을 깰 수도 있으니까. 시현이 집중할수록 일의 효율이 높아지고, 그건 수사관과 실무관의 빠른 퇴근으로 이어진다.

 

‘곧 점심시간인데.’

‘수사관님이 말해요.’

‘검사님 지금 표정 없는 거 보면 초 집중이라 효율 200퍼 모드인데.’

 

두 사람이 시선 교환을 하고 있을 때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났다. 흠칫 놀란 두 사람이 시현의 눈치를 보고, 문과 가까운 자리인 실무관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최 프로 안에 있나?”

 

시현의 위에 있는 형사3부 부장검사였다. 그 목소리에 시현이 형광펜을 손에 든 채로 고개를 들었다가 자연스럽게 시계를 확인했다.

 

“아, 부장검사님. 이런. 점심시간이네요. 두 분 식사하고 오세요.”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검사를 맞이하자, 부장검사가 검사실 안으로 들어오다가 문에 달린 리스를 보고 멈칫거렸다.

 

“……최 프로, 이건 또 무슨 짓이야? 시위하는 거야?”

 

검사실을 나가던 연민지 실무관이 입 모양으로만 ‘검.사.님. 예.지.력.상.승.’하고 말하곤 도망치듯 나갔다. 서둘러 나간 것 치고는 문을 소리도 안 나게 잘 닫았다. 그걸 본 시현이 풋, 하고 웃었다가 부장검사가 쳐다보자 표정을 수습했다.

 

“아뇨, 그냥 기분 전환 삼아 사봤습니다.”

“실용적인 거 아니면 다 쓰레기라던 놈이 네 기준의 쓰레기를 왜 돈 주고 사. 시위하는 거지?”

“사람이 변할 수도 있죠.”

“……최시현이, 안 하던 짓 하니까 진짜 불안하다. 너 무슨 고민 있어?”

 

시현이 어깨를 으쓱하곤 대답 대신, 그를 여기로 걸음하게 한 이유를 내뱉었다.

 

“김진문 변호사님?”

 

어제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은, 자신의 동기의 이름에 잠시 침묵한 부장검사가 턱짓했다.

 

“가자. 밥 먹으면서 얘기해.”

 

 

 

 

 

피차 바쁜 입장이라 점심 메뉴는 지검 근처 식당의 국밥이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컵에 물을 따라 부장검사의 앞에 두고 수저까지 챙긴 시현이 뭔갈 깨달은 듯 한쪽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밥 먹으면서 하면 체하지 않을까요?”

“최 프로한테 그런 섬세함이 있었어?”

“저 이래 봬도 섬세한 사람입니다.”

“그건 몰랐네.”

 

주문하고 1분도 되지 않아 나온 국밥을 한 숟가락 떠먹은 부장검사가 주변을 살피더니 CCTV나 이쪽을 주목하는 사람 누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입 모양도 보이지 않도록 수저를 든 손으로 슬쩍 가리며, 식당의 소란스러움 속에 시현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관둘 거지?”

 

시현이 작게 웃었다. 안 관두는 게 아니라 못 관둔다. 다른 의미로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게 됐으니까.

 

“저 영원히 지방만 돌게 하지 않게 해주시려고 부르셨으면, 바로 본론 얘기하셔도 됩니다.”

 

부장검사가 다시 주변을 힐끗거린다.

 

“그래. 그럼 내부 총질은…… 아니지?”

 

시현도 마찬가지로 몸을 살짝 숙이고 입술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미쳤습니까.”

“떨궈내면 외부인이지, 하고 치는 게 잘 상상돼서 말이지.”

 

그건 시현 자신도 잘 상상되는 터라 쉽게 부정하지 못했다.

 

“……아무튼 지금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절 지켜주겠다는 분 중 가장 위가 어디입니까? 아니, 이렇게 물어보면 안 되겠네요. 그놈 뒤와 같은 급입니까?”

 

부장검사가 잠시 대답을 못 하고 시현을 바라보았다. 질린 듯한 표정이였다.

 

“야, 너 진짜…… 어떻게 알았는데?”

“부장검사님이 이렇게 빠릿한 분이 아니잖습니까. 누구 지시가 아니라면.”

 

김진문 변호사를 통해 시현과의 대화를 그대로 듣고, 평소 시현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부장검사가 자신의 끈에게 보고한 후 허락받아 시현에게 제안하러 온 게 맞긴 하다. 그런데 빠릿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거 욕 아닌가, 하고 생각한 부장검사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눈치는 더럽게 없는 게 단서 몇 가지만 주우면 정황 파악하는 재주는 뛰어나서 참. 천상 검사야.”

“그게 눈치 빠르다는 말과 동의어 같은데요?”

“너는 뭔가 이상하게 눈치가 없어. 아무튼 그걸 알아서 뭐 할 거야.”

“사건 크기를 맞춰야죠.”

“그림은 어디까지 그렸어?”

“시작도 못 했습니다만 구상은 어느 정도는. 반부패로 발령나도 어, 쟤가 저래 놓고 왜? 라는 소리는 듣지 않게는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한 시현이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진짜 모르겠는데요. 김진문 변호사님은 뭡니까? 맞습니까, 아닙니까? 절 칼로 써도 상관은 없는데, 만약 맞으면 유능한 부장검사 하나 못 끌어올려서 팽한 손에는 못 들립니다.”

 

 

 (tmi : 김진문 변호사는 시현의 근무처 상사인 서부지검장과 친분이 있어 시현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장검사가 잡고있는 라인과는 상관없는 인물입니다. 위의 지시 없이 순수하게 시현을 위해 움직였고, 부장검사와 동기이기 때문에 전날 시현과 했던 대화를 전달해주어 시현을 도와달라 부탁했습니다.

시현은 부장검사와 김진문 변호사가 같은 기수인건 진작 알고 있었고, 부장검사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행동으로 김진문 변호사를 통해 얘기가 들어갔다는걸 눈치챘습니다.)

 

 

3

 

오후 5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던 시현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한 글자라도 더 읽기 위해 지문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나서야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부장검사에게서 온 메시지는 아주 단순했다. 다른 말 없이 ‘저녁 8시, OOO’하고 시간과 장소만 쓰여 있었다. 날 이렇게 불러낼 분이 아닌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려 알겠습니다, 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오늘 6시 정각에 퇴근합시다.”

 

수사관과 실무관이 헐,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았다.

 

“와, 두 달만에 정시퇴근.”

“미안합니다. 앞으로 자주 정시퇴근합시다.”

“못 지킬 말 하지 마세요.”

 

실무관이 우우, 하는 소리를 내곤 다시 서류 정리를 시작한다. 아까보다 손이 더 빨라진 게 정시퇴근이라는 말이 효율을 높인 게 분명했다. 장난스러운 야유를 웃어넘긴 시현도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7시 40분, 부장검사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다. 정시에 퇴근하고 나름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차가 너무 막혀 예상보다 늦어졌다.

주차장에 주차한 후 차에서 내려 약속 장소인 고급 한정식집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은 쉽게 오는 곳이 아니었다. 자리를 파는 곳이라 예약하기도 힘들뿐더러 가격도 비싼 데다 거리까지 멀다. 같은 지검에 있는 부장검사가 시현을 굳이 이런 곳까지 불러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이유로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고 확신한 상태였다. 아마도, 자신을 쓰려는 사람들이겠지.

시현은 자신의 옷차림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지 차 유리를 보고 확인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이름을 물어놔 대답하자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부장검사가 예약하면서 주문까지 함께 했는지, 일행이 도착하면 음식이 나온다는 직원의 안내와 함께 차와 감말랭이가 나왔다. 그 차를 마시는 시현의 모습엔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8시 정각에 오겠지. 아니면 한 5분 정도 늦거나. 높으신 분들은 다 그래.’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면 얕잡아 보인다거나 주인공이 안 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는 듯 하다. 웃긴 건 도착은 일찍 할 수도 있다는 거다. 미리 와서 상대가 언제 왔나 지켜보기도 한다.

시현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아 8시를 약간 넘긴 시간에 문이 열렸다. 시현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 중년의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이였다. 어디서 봤었지, 실물이 아니라 사진으로 본 것 같은데. 기억을 더듬는 시현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대검 기조부장 김희현일세.”

 

무표정한 낯으로 그 손을 공손히 맞잡아 악수하며, 시현은 ‘망했다’라고 생각했다.

 

 

 

시현이 속한 곳은 지방검찰청이고, 그 위에 고등검찰청, 그 위에 대검찰청이 있다. 라인의 가장 끝에 있는 사람이 지검에 있는,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평검사를 만나러 직접 오진 않을 테니 그 밑의 사람을 만날 거로 예측하긴 했다. 그런데 온 사람이 대검찰청의 기획조정부장이라면 그 위는 얼마나 높은 사람일지.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자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맛있게 먹었다. 어차피 눈앞의 기조부장님께서 계산할 거니까 비용 부담도 없다.

 

“소문과 똑같군.”

 

막 물김치를 입에 넣던 참인 시현이 입을 다문 채로 씹어 넘기고 대답했다.

 

“긍정적인 소문일 테니 기조부장님이 불러주신 거겠지요.”

“하하하. 그래, 내가 나올지 예상했나?”

“아닙니다. 지검 차장검사 정도로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날 봤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

“이거, 검사 생활 좀 오래 하자고 시작했는데 오히려 더 빨리 끝장나게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웃겼는지 기조부장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 되지. 부장은 달고 나가야지.”

“그러니까 부장 달려면 5~6년은 더 남았으니 목숨줄 좀 길게 붙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웃는다. 시현이 불경하게도 불퉁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웃음을 참은 기조부장이 서류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오늘은 당장의 목숨줄을 붙이는 데 도움을 주려고 불렀네.”

 

건네주니 일단 받은 시현이 봉투를 뜯어보지 않고 손에 든 채로 물었다.

 

“뭡니까?”

“기회이기도 하고, 시험이기도 하고.”

 

대화에 이렇게 단서를 안 주면 힘든데. 봉투를 뜯어봤다가 안에 든 게 알면 안 되는 정보라면 정말 목숨 자체가 위험해져서 함부로 뜯어보질 못한다. 이미 본 걸 되돌리는 방법은 모 영화처럼 기억을 지우는 방법 외엔 쓱싹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시현을 보고 기조부장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똑똑해서 마음에 드네. 안에 든 건 자네가 그릴 그림의 밑그림이야.”

 

시현이 봉투를 뜯어보지 않은 채로 공손하게 다시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만 그림은 이미 절반 정도 그린 상태입니다.”

 

기조부장이 봉투를 받곤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4년간 형사부만 돌았습니다. 제가 검찰 내에서 인망도 있습니다. 딱 한…… 아니 두 명? 빼고요. 그리고 기조부장님 정도면 다 아실 것 같습니다만. 제 친가 말입니다.”

“친가와는 거의 연을 끊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이용하면 훨씬 효율적인데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안 쓰는 건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기조부장이 웃으면서 서류 봉투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정말 재밌네. 진심으로 성공하길 바라. 이번 일 성공하면 무조건 끌어 올려줄 테니까 힘내고.”

 

시현이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그래.”

“왜 저입니까? 그만두려던 저를 굳이 끌고 온 거라면, 단순히 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제가 필요했던 거 아닙니까?”

 

기조부장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이유는 세 개 있어.”

 

세 개나. 나 값어치 좀 있는 사람이네. 실없는 생각을 하는 중에도 시현의 표정은 변화 없이 싸늘한 무표정이었다.

 

“하나. 자네 친가.”

“그건 약점도 됩니다.”

“장점도 되네. 둘, 자네가 정의감이 없어.”

 

기조부장도 욕으로 한 말이 아니고, 시현도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그리고 마지막 셋. 자네가 이규희 차장검사를 들이받아서야.”

 

도대체 그 쓰레기 스폰서 검사는 정체가 뭘까? 시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4

 

 

 

부장검사가 시현이 내민 서류 봉투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류 봉투는 꽤 많은 양의 종이가 들어가 있는지 두툼했고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썩어가는 부장검사의 표정과는 달리 시현의 표정은 꽤 밝았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냐?”

“네, 그 수사계획서입니다.”

“봐도 되나?”

“안 보시는 게 부장님께는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부장검사는 시현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놈 빨리 다른 데로 안 가나……하고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다. 내가 너 믿고 그대로 전하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왜 이렇게 빨리 된 거냐?”

 

그 질문에 시현은 대답을 안 하고 그냥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퇴근 후 막 씻고 나와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올린 상태로 물을 마시던 시현이 짧게 진동하는 핸드폰을 발견하곤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이미지가 첨부된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미지는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 김희현의 명함.

이런 건 전화를 걸기 전에 ‘나는 이런 사람인데 이 번호로 전화 걸 거니 받아라’라는 의사표현이다.

 

“……밤 열한 시에?”

 

내일 하시면 안 되나. 투덜거리면서 소파에 앉아 전화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자마자 명함에 있던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떴다. 5초를 넘기기 전에 전화를 받고 핸드폰을 귀에 대었다.

 

“네, 최시현입니다.”

- 지금 대검으로 들어와.

 

지금 시간을 알고 있는 시현이 반사적으로 ‘지금이요?’라고 되물으려다 전화를 거신 분과의 기수 차이를 생각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애기는 할아버지가 까라면 까야지. 착하게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하자 대답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한숨을 내쉬고는 빠르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서 대검에 올 줄은 몰랐다. 대검조차도 이 시간에 불이 켜있고 퀭하게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불철주야 열심히 일하시는구나’와 ‘워라밸 어떻게 된 거야’가 동시에 떠오른다. 본관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 기획조정부장실 앞에 서서 정장 재킷의 단추를 채우곤 가볍게 노크 두 번을 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도 기조부장실 안엔 전에 식당에서 만났던 기조부장 혼자 앉아 있었고, 기조부장이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시현이 작성한 수사계획서 뭉치가 조금의 비뚤어짐도 없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올려져 있었다. 저건 검사들의 직업병이다. 서류의 칼각을 유지하는 것.

 

시현이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 허리를 굽혔다.

 

“앉아.”

 

그 말에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그의 맞은편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시현이 앉자마자 기조부장이 손으로 수사계획서를 톡톡 쳤다.

 

“이걸 하겠다고?”

“예.”

“자네 이거 감당 가능하겠어?”

 

기조부장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무표정한 얼굴로 마주하던 시현이 씨익 미소 지었다.

 

“기조부장님을 뵌 후 판을 더 키웠습니다.”

 

시현의 수사계획서에는 이쪽에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역으로 테스트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여 기조부장의 심기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맹랑하다더니 단순한 맹랑의 수준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질문에 대답 잘하면 이거 중앙지검 반부패2부로 간다.”

 

그 말에 ‘기획통인 기조부장이 특수부를…….’까지 생각하던 시현이 더 생각하다간 지금 이 자리에서 빈틈을 보일 것 같아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웠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묻자. 아무리 찾아봐도 계획서에서는 빠져 있어서 말이네. 자네가 이런 실수를 할 리는 없고, 의도적이겠지.”

 

기조부장이 다시 수사계획서를 손끝으로 몇 번 쳤다. 아까와는 달리 좀 더 감정이 섞인 듯 했다.

 

“이거 출처가 어디야.”

“제가 형사부…….”

“형사부에서 4년 있었고 검찰 내에서 인망도 있다? 이건 그런 걸로 얻을 수 있는 소스가 아냐. 현직 경찰서장 셋을 날려버릴 정보가 어디서 나왔냐고.”

 

좀 세게 나오시네, 생각하던 시현이 여상히 웃으며 답했다.

 

“걱정하시는,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는 아닙니다.”

“세팅은 한 거고?”

“검찰로의 역풍은 없을 겁니다.”

 

어쨌든 세팅이 들어갔고, 누구든 책은 잡힐 것이나 그게 검찰은 아니라는 그 대답에 기조부장이 뒷목을 잡았다. 욕이 턱밑까지 올라온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듯한 모양이다.

 

“여론전은?”

“할 겁니다.”

“……일단 나가보게. 나도 보고를 드려야겠으니까.”

 

일어나서 허리를 굽히는 시현을 보고 기조부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널 찍은 게 잘 판단한 건지 모르겠다.”

 

허리를 다시 세운 시현이 눈을 휘며 웃었다.

 

“겁도 없고 도덕성도 없는 칼이 휘두르기에는 최고지 않습니까?”

 

 

 

 

 

5.

 

 

지검장이 결재판 안에 있는 서류에 서명한 후 결재판을 시현에게 넘겨주었다. 지검장의 표정이 미묘했다. 한참을 빤히 바라보던 지검장이 한탄하듯 말했다.

 

“어쩌다 최 프로 같은 게 우리 지검에 왔을까.”

 

서부지검장은 시현이 시보일 때 신세를 졌던 김진문 검사, 현재 김진문 변호사의 직속 선배로 시현과는 친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시현이 ‘김진문의 새끼’이기 때문에 귀엽게 봐주는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주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시현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저 귀엽지 않습니까?”

“이 프로가 차장으로 있는데 최 프로까지 있으니까 골치 아프다. 둘은 절대 만나면 안 됐어.”

 

진심으로 진저리치는 지검장을 보고 시현이 미안하다는 듯 웃는다. 이규희 차장검사가 자신을 향해 하는 개지랄들을 지검장이 꽤 많이 막아주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 다행이고. 바쁠 텐데 이만 나가봐. 잘 다녀와.”

 

시현이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오늘은 시현이 짠 그림인 장학금 브로커를 수사하기 위해 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로 파견 나가는 날이었다.

 

 

 

 

 

 

 

분위기가 싸늘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이물질이 하나 낀 게 맞을 테지만. 회의실에 모인 반부패2부의 검사들이 시현을 노려보듯 하는 중에, 시현은 주눅 든 기색 없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런 분위기일 때엔 무언가를 행동하는 것 자체가 손해다. 뭘 어떻게 해도 호감도가 마이너스를 찍을 테니 아예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반부패2부의 부장검사가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둘러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부지검에는 반부패수사부가 없으니 이쪽으로 넘겨받았는데, 해당 사건에 대해 제보받은 서부지검의 최시현 검사다.”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인사하려는 찰나 부장의 말이 이어진다.

 

“다들 잘 알 텐데. 이프로스의 또라이. 그게 이 최 프로야.”

 

아니, 그걸 왜. 내심 당황한 시현이 표정에 티가 나지 않도록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부장을 바라봄과 동시에 순간 회의실이 술렁이더니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 쟤야? 와, 어린데? 어리니까 그게 가능했지. 눈치 없는 새끼 아니었어? 수군거림을 듣는 시현의 귀가 조금 빨개졌다. 시현을 향한 시선들이 호기심과 흥미로 바뀌었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최 프로.”

“……서부지검의 최시현입니다. 전, 현직 경찰서장들과 경찰 간부의 자녀를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형식을 이용하여 로비한 브로커 수사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다행히 약간 붉어진 귀를 제외하면 당황한 게 티가 안 났다.

 

 

 

 

회의가 끝나고 부장검사와 부부장검사들이 일어나 나가자 일부러 회의실에 남아있던 검사들이 시현에게 질문을 폭격했다. 이 회의실에서 시현이 가장 어렸기에 모두가 반말을 썼다.

 

“나 진짜 물어보고 싶었어. 최 프로, 그때 술 먹고 쓴 거야?”

“오타, 비문 하나 없었으니까 술은 아니다. 뭐 애인한테 차이고 쓴 거 아냐?”

 

미치겠네. 속으로 중얼거린 시현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때 구속영장 심사가 두 번 기각 됐는데 사람들이 이프로스 구경하느라 더 시간 낭비가 되는 바람에. 술 안 먹은 맨정신이었습니다. 다만 영장 심사가 열두 시간씩 걸려서 24시간 동안 못 잔 상태였으니 참작 부탁드립니다.”

“헐.”

“와. 그럼 눈치 없는 새끼가 아니라 일부러였네?”

 

검찰의 인트라넷인 이프로스에는 검찰 구성원들이라면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는 게시판이 존재했다. 그 당시 같은 지검 밑에 속한 지청 검사끼리 게시판에서 싸움이 났는데, 각 지청장까지 끼는 바람에 이프로스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국의 검찰 구성원이 전부 숨죽여 주목하고 있었다. 평소엔 조회 수가 세 자릿수면 엄청 많았다 쳤지만 그 사건 당시 조회 수가 천, 최대 만 단위까지 찍혔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과 싸움 구경인데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싸움이라서 마음 놓고 직관할 수 있기까지 하다. 다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엔 재밌었지만 점차 격앙되는 싸움에 여기저기서 걱정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대전지검에 있던 시현이 그 싸움판에 게시글을 하나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대전지검에 있는 임관 2년 차 검사입니다. 지금 보는 분이 많으시니 이 법리 해석에 대해 의견 있으신 분은 답변 부탁드립니다.’

 

게시글 끝에 덧붙인 말에서 사람들은 이게 의도한 것인지 그냥 눈치 없는 새끼인지를 토론하곤 했더란다.

 

‘지금 이프로스에 계신 지청장님들의 고견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마 싸우는 본인들도 자존심 때문에 그만두지 못했지 슬슬 이거 안 되겠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여서 시현이 올린 글을 문 것 같았다. 임관 2년 차가 뭘 알겠는가. 귀엽게 볼 수밖에 없는 시기인데. 그런 명분으로 싸움이 흐지부지되고 건설적인 법리 해석 토론으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검찰 내부의 치부라 검찰 내부에서 스스로 묻어버리고 이프로스의 또라이만 유명해졌다.

 

“지청장들이 자기 이름 걸고 일기토 뜨는데 누가 그 지뢰밭에 그런 걸 올릴 생각을 하냐고.”

“진짜 난 놈이다.”

 

흑역사를 지금 주목받는 시현만 죽을 맛이었다. 다만 그 일로 현재 호감을 산 건 큰 이득이었다. 잘 왔다, 브리핑은 잘 하더라, 여기서 잘 배워 가. 너도 내년에 이쪽으로 와야지. 반부패2부 검사들의 호의 섞인 말들을 듣는 시현이 될 대로 돼라, 하고 생각했다.

 

 

 

 

 

6.

 

부장검사가 회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약간 느슨해져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시현과 반부패2부 검사들의 시선을 받은 부장검사가 조용한 목소리로 묻는다.

 

“브로커 구속영장은 발부됐지?”

“네.”

“압수수색 영장은?”

“아직입니다.”

“몇 시간 지났지?”

“14시간쨉니다.”

 

영장 심사가 12시간 넘게 걸리면 기각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부장검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담당 판사가 누구였지?”

 

22시간 동안 쭉 깨어있는 상태인 시현이 약간 멍한 채로 대답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잘 티가 안 났다.

 

“한민석 부장판사입니다.”

“아, 하필이면 그 좆같은 새끼……. 이거 또 괜히 시간 끌고 있어. 기각되면 바로 다시 영장 쳐. 최 프로가 쳤나?”

 

눈을 뜬 채로 잠시 졸던 시현이 자신을 부르는 말에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티를 안 내고 예,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영장이 기각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고가 있어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수면 부족으로 멍해진 시현의 뇌가 느릿하게 자신의 수를 한 수 한 수 되짚어본다.

 

“그리고 최 프로랑 민 프로 둘은 좀 자고 오고. 안색이 말이 아니야. 일단 지금은 딱히 할 게 없으니 일어나자.”

 

다 같이 의자를 뒤로 빼며 일어나는 중에 시현의 업무용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을 느끼자마자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최시현입니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서늘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공손한 감사의 인사를 내뱉은 후 전화를 끊은 시현이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자신을 쳐다보는 검사들을 향해 말했다.

 

“영장 발부됐습니다.”

 

 

 

 

 

다음 날 오전 9시, 압수수색 대상과 장소가 많아 각 현장에 검사 한 명씩밖에 갈 수 없는데도, 시현은 엄밀히 말하자면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반부패2부 검사 한 명과 함께 배치되었다.

오래 자진 못했지만 몇 시간 정도는 수면을 취해 컨디션은 나름 괜찮았다. 제 몸 상태를 점검한 시현이 시선을 들었다. 오늘 같이 움직이는 김세진 검사가 함께 밴에 탄 사람들을 둘러보며 빠르게 말했다. 압수수색 전 항상 하는 말이었으므로 너무나도 익숙해 보였다.

 

“일단 영장에 표기된 범위의 물품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압수합니다. 이거 애매하다 싶은 건 저나 최시현 검사에게 확인하러 오십시오. 증거인멸의 기미가 보이거나 압수수색을 방해할 경우 긴급 체포하시고요. 장소가 장소인 만큼 방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 프로, 영장은?”

“챙겼습니다.”

“자, 신분증 패용합시다.”

 

밴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검은 정장을 입은 검사 둘이 먼저 내리고 뒤이어 수사관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시선을 끄는데 수사관 몇이 들고 있는 검찰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파란색 단프라 박스 때문에 소리 없는 경악이 퍼져나간다. 김세진 검사는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계단을 통해 강북경찰서 3층으로 빠르게 달려 올라가더니 망설임도 없이 서장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서장실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장실로 들이닥친 검사와 수사관을 쳐다본다.

 

“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 김세진 검사입니다. 지금 두 분 하던 일에서 즉시 손 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역시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만 모인 특수부답게 행동에 거침이 없고 빨랐다. 수사관들과 함께 그 뒤를 쫓아온 시현이 대단하네,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하곤 서늘한 얼굴을 한 채로 영장을 들어 보이며 김세진 검사의 말을 받아 그 뒤를 이었다.

 

“2023년 12월 21일자로 발부된 압수수색 영장 집행하겠습니다. 압수수색 범위는 서장실, 휴대전화입니다.”

 

 

 

 

 

강북경찰서장실을 싹 다 털어 중앙지검으로 복귀하자 시현의 핸드폰으로 엄청난 연락이 와 있었다. 시현이 이 수사에 참여한 걸 아는 사람은 대검 기조부장과 그 윗선, 그리고 서부지검장, 중앙지검장, 반부패수사2부밖에 없었지만, 오늘 경찰서에 들이닥친 검찰이라고 사진이 찍힌 모양이었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최프로 중앙지검 특수부랑 뭐해?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아니 씨발 난 휴가인줄 알았지

[김현진 수사관] 검사님...............ㅠㅠ...........또 무슨 사고를 치시는겁니까...........

[연민지 실무관] 검사님;우리지검난리났어요 왜저기에검사님이특수부랑있냐고;;;심지어 왜경찰을건드리냐고

[서부지검 이은택 부장검사님] 이게 그거야? 미쳤구나 너? 나 너 진짜 감당 안된다

 

 

강새빛 검사의 씨발이라는 단어를 읽고 얘는 돌아가면 응징하도록 하자, 하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구석으로 치웠다. 다른 곳으로 압수수색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검사와 수사관들이 올 때마다 박스 몇 개씩이 추가됐다. 모든 검사들이 복귀했을 때 박스 숫자를 세어보니 쉰여섯 개였다. 시현이 그걸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데, 반부패2부 검사들은 체념한 얼굴로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이거 딱 24일까지만 보고 25일 쉬고 26일부터 영장 치자.”

“와, 부부장검사님, 크리스마스도 챙겨주시는 겁니까?”

“부장검사님이 24일까지 다 보면 쉬자고 하셨다. 못 보면 짤없이 나와야 돼.”

“그럼 여기부터 제가 뜯어봅니다.”

“핸드폰은 다 이쪽으로 주세요.”

“계좌 내역도 왔나? 왔네. 최 프로, 숫자 전문이라며? 이거 같이 보자.”

 

이 양을 3일, 정확히는 2일하고 6시간만에 다 보고 유의미한 증거를 찾아내서 구속영장을 쓸 수 있다는 걸까? 이건 예상에 없었다.

역시 엘리트들만 오는 특수부 진짜 무섭네. 내가 언제까지 안 잘 수 있을까?

내심 한숨을 내쉰 시현이 두 뼘 높이의 A4용지 산 앞에 앉았다. 별말 없이 조용히 일을 시작하는 시현을, 검사들이 슬쩍 수군거리며 쳐다보았다.

 

 

 

 

 

 

 

7.

 

일하다 토할 것 같다는 느낌은 임관 후 꽤 자주 있었지만 진짜 토한 적은 처음이었다. 입을 헹구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피로 때문에 충혈되어 있던 눈이 속을 게워내느라 생리적으로 더 붉어져 완전히 새빨개져 있었다. 거울 속 파리한 안색의 자신과 시선을 맞대던 시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 특수부 진짜 무섭네.”

 

미성이었던 목소리도 쉬었다. 목이 따끔거리는 게 꽤 상한 느낌이다. 솔직히 제 능력에 대해 자신이 있었고, 특수부로 보내진다고 해도 충분히 잘할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 자신감이 살짝 꺾였다. 매 사건 때마다 이렇게 일한다면 단명의 수준이 아니라 40대가 되기도 전에 과로로 요절할 거라 확신한다.

 

화장실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검사들과 수사관들도 수면 부족으로 좀비 같은 꼴이 되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 압수 물품이 담겨 있던 박스는 모두 개봉되어 분류된 지는 한참 됐고, 분석도 어느 정도는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시작할 때 계획과는 달리 바로 구속영장은 무리고 참고인 조사를 거쳐야겠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바로 영장을 칠 수 있을 명확한 증거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건 시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자신은 ‘정해진 결과’가 나오기 위해 ‘과정’을 끼워서 맞추고 있으니까.

 

 

시현이 자신의 자리로 가서 정리가 끝난 자료들을 책상 위에 분류하여 정리하는 중에 자신에게 다가온 부부장검사에게 쉰 목소리로 설명했다.

 

“유신장학재단, 브로커 오 씨, 강북경찰서장 및 둘째 자녀, 금천경찰서장 및 첫째, 둘째 자녀, 중랑경찰서장 및 둘째, 셋째 자녀의 10년 치 계좌 기록 분석 및 대조 방금 끝났습니다. 여기 혐의점 요약과 ……이건 장학재단과 브로커의 계좌분석 중 장학재단에 기탁한 3개 기업에 대해 추가 압수수색이 필요한 것으로 보여 쳐본 영장입니다.”

 

어느새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부부장검사가 시현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려 함께 계좌 기록을 검토한 김세진 검사를 불렀다.

 

“김 프로! 이거 좀 봐봐.”

 

멀찍이서 다른 압수 서류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김세진 검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다가왔다.

 

“예.”

“이거 맞아?”

 

피로가 쌓인 낯으로 책상 위를 둘러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검토한 건 아니지만 표본 검사했을 때 본 건 다 맞습니다.”

“이걸 둘이, 9시간 만에 했다고?”

“저는 대부분 분류만 해 주었고, 분석은 최 프로가 다 했습니다. 제가 속도를 못 따라갔습니다.”

 

부부장검사가 시현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툭 내뱉었다.

 

“이거 미친놈이네. 이게 왜 지금 서부지검에 있어? 뭐 누구한테 밉보였어?”

 

며칠 치 일을 하루 만에 했고, 안색 보니 뒤질 것 같으니 들어가서 크리스마스 때까지 쭉 쉬다 오라며 등을 떠밀렸다. 시현과 비슷한 좀비 꼴을 하고 있는 검사들도 이의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이대로 운전하면 졸음운전으로 죽을까? 시현이 복도를 걸으며 핸드폰으로 주차장에 있는 제 차의 시동을 거는 중에 핸드폰의 화면이 까매지더니 전화가 왔다는 화면이 떴다. 일반적인 전화번호가 아니라 숫자가 훨씬 더 많은 이상한 번호다. 누구인지 짐작은 됐지만, 밖에서 받을 전화가 아니라서 수신 거절을 눌렀다.

주차장으로 가 미리 시동이 걸려 히터로 따뜻해진 차 안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조금만 자고 출발해야겠다 생각하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는 중에 다시 전화가 온다. 차와 블루투스 연결이 되어있는 상태라 눈을 뜨고 전면 터치스크린에 이상한 번호가 뜬 것을 확인했다. 잠깐 생각하다 핸들의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네.”

- 어디까지 됐나?

 

역시나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수사 중인 사건의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낮게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시현은 기분이 나빠져서 인상을 썼다.

 

“결정하셨습니까?”

- 건설의 주민호 사장.

“작은아버지에게 힘을 실어주시는 겁니까?”

- 왜. 경영에 관심이 생겼나?

“아뇨? 전혀요? 질문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시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2~3일 뒤에 영장칩니다. 그 전에 세팅 잘해두십시오.”

- 그래.

“이걸로 셈은 끝난 겁니다.”

- 어차피 널 위해서 손질한 재료들이었는데 그냥 받아도 됐던걸.

“싫습니다.”

 

다시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나서 그냥 전화를 끊어버릴까 고민하던 중에, 할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네 어미한테, 난 내 아들에게 흠집 낼 의향 없다고 전해.

 

시현의 어머니에게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소송을 걸어 시현을 사생아로 만들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사생아 신분보단 떳떳한 직계 손자의 신분이 나으니까.

순간 구역질이 나서 전화를 끊고 입을 틀어막은 채로 차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렸다. 차 뒤쪽 화단에 몸을 숙인 채로 헛구역질하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침을 뱉은 후 허리를 세운다. 끝까지 비위 상하게 하네, 미친 새끼가……. 낮게 읊조린 시현이 멍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했다.

 

요즘 정신이 마모되는 게 뚜렷하게 체감됐다. 괜히 시작했나 하는 후회는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는 생각은 든다. 뭔가 힐링할 게 필요하기도 하고. 윤성이네 집에 있는 하얀 털 뭉치 같은 두유라거나. 아니면.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에 울렁이던 속이 좀 가라앉았다. 만난다면 응석이나 잔뜩 부려야겠다.

한 번 몸이 놀라니 잠이 달아나서 운전할 수 있는 정신이 됐다. 다시 차에 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8.

 

 

한 손에 서류를 든 시현이 조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태유건설의 주민호 사장과 그의 변호인이 앉아 있었다. 변호인이 시현을 보자마자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눈을 마주쳐왔다. 그걸 무시한 시현이 서류를 책상 위로 올리고 의자를 빼 앉은 후 주민호 사장을 직시한다. 긴장한 듯 떨리는 시선과 차갑게 언 눈이 얽힌다.

 

“안녕하십니까, 검사 최시현입니다.”

 

……못 알아보네.

 

“조사에 출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표정 없이 서늘한 인상에 걸맞은 싸늘한 어조로 말한 시현이 자리에 있던 노트북을 조작하곤 서류로 잠깐 시선을 내렸다.

 

“태유건설에서는 2020년 11월, 동년 12월, 2021년 2월. 세 차례에 걸쳐 유신장학재단에 장학금을 기탁한 바 있습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익숙한 대답이었다. 시현은 태유건설의 법인통장 거래내역 사본 세 장을 그가 똑바로 볼 수 있게 방향을 돌려주며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액수는 각 5천만 원, 총 1억 5천입니다.”

“모릅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 신내동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에 경찰이 출동한 바 있습니다. 해당 아파트 시공사는 태유건설입니다. 이건 해당 건의 112 신고내역과 출동보고서입니다.”

“보고받은 바 없습니다.”

 

시현이 증거를 내밀며 질문하고, 주민호 사장은 기억에 없다느니 모르는 일이라느니 단조로운 말들을 반복했다. 서로 자신의 할 말만 내뱉고 있어 무의미한 행동 같지만 필요한 과정이었다. 시현이 다른 질문을 던지면서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은 변호인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제대로 조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겠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아예 대답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다짜고짜 부정하는 건 그리 좋은 전략이 아니다.

한동안 무의미한 대화가 이어진 후에, 시현이 노트북을 만졌다.

 

“오하영 씨를 아십니까?”

“모릅니다.”

“2020년 11월 10일 오후 8시경에는 뭘 하셨습니까?”

“검사님은 그런 옛날 일을 세세히 기억할 수 있습니까?”

“예.”

 

시현의 즉답에 주민호 사장이 할 말을 잃고 시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시현이 대답 없이 노트북을 돌려주어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일반 주택 같은 식당 앞을 비추고 있는 CCTV였다. 주민호 사장이 중년 여성과 악수한 후 자신의 차에 타서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이 중년 여성이 오하영 씨입니다. 기억나십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하영 씨는 유신장학재단을 운영하면서 장학재단 규정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특수한 지위를 가진 부모의 자녀에게만 장학금을 살포하였고 현재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되어 수사 중입니다.”

“……그건 그 장학재단의 일이 아닙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2020년 11월, 동년 12월, 2021년 2월.”

 

말을 잠시 멈춘 시현이 통장 거래내역 사본 여섯 장을 책상에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유신장학재단이 중랑경찰서장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시기입니다. 액수는 각 5천만 원. 총 1억 5천입니다.”

“…….”

 

주민호 사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걸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시현이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서류들을 정리하며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사실 내부는 녹화 및 녹음되어 말을 조심해야 했다.

 

“변호인께서는 오늘 한마디도 안 하시는군요.”

 

시현의 압박과 긴장감에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던 주민호 사장이 고개를 홱 돌려 변호인을 바라보았다. 서류를 모아 책상에 탁탁 두드려 정렬하며 주민호 사장의 시선을 끈 시현이 카메라가 촬영하는 각도를 피해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최인제.’

 

입 모양으로 전한, 시현의 아버지의 이름을 읽은 주민호 사장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손가락질하며 소리치려던 그를 보고 시현이 서류로 입가를 가리며 쉿, 하고 소리를 낸다. 그리곤 변호인을 바라보았다.

 

“변호인께서는 태유 법무팀에서 나오셨습니까?”

“……예.”

 

이 힌트들을 받아서야 이 대화의, 이 조사의 함의를 알아챈 주민호 사장이 입술을 떨었다.

시현과 시현의 할아버지 외엔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주민호 사장은 태유그룹 회장이 검찰에, 시현에게 던진 희생양이었다. 이걸로 만족하고, 더 타고 올라오지 말라고.

그리고 시현은 그 거래에 수응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주민호 사장이 모든 것을 시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사 마치겠습니다. 귀가하셔도 됩니다.”

 

고저 없는 어조로 말한 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사실을 나왔다. 조사실 밖에서 보고 있던 반부패2부 검사들을 보고 눈꼬리를 접어 휘며 예쁘게 웃었다.

 

“바로 사전구속영장 치겠습니다.”

 

 

 

 

 

 

 

영장을 치느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던 시현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주머니에서 개인용 핸드폰을 꺼냈다.

 

[물었습니다]

 

단 다섯 글자만 있는 메시지를 열자마자 삭제했다.

그리곤 내 신상은 몇 시간짜리일까를 생각하면서 화장실로 걸어간다.

 

 

한 시간 후, 포털사이트에 뉴스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단독] ‘장학금 게이트’, 檢, 경찰 겨냥한 함정수사 의혹

[단독] 경찰, “위법한 함정수사 중단하라”

 

 

 

 

 

 

 

 

 

9.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링크] [단독] “‘장학금 브로커’ 수사 중인 檢 반부패2부 수사팀 파견검사, 태유 회장 孫”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링크] 경찰, “태유 통한 함정수사로 경찰 기죽이기”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난 아닌거 앎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최프로가 이렇게 허술한 짓을 하겠어?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맞다면 최소한 일부러 퍼뜨렸겠지ㅋㅋ 화제성 모으려고

 

 

이 자식, 뒷걸음질로 정답 맞췄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아냐 니가 이정도로 마조일 리가 없음 너는 사디스트니까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근데 재벌3세였음? 심지어 태유? 근데 왜 제네시스탐?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야 왜 읽어놓고 말 안해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최프로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야야

[나] 누구보고 사디스트래? 그리고 제네시스가 어때서?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드디어대답하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재벌3세님 나 벤틀리 한 대만

[나] 꺼져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쟈갑다 쟈가워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아무튼 멀리 계신 최 프로의 멘탈에 도움이 되기 위해 우리 서부지검의 반응 알려드립니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최시현 검사님 은근 귀티났던 게 재벌 3세여서 그런가 보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그건 귀티가 아니라 그냥 조오온나 잘생긴 거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전혀 티를 안 내서 몰랐다. 그런데 집안이 어디인 게 중요한가?”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검사한테 집안은 중요하지 않지만, 신랑으로 삼으려면 중요하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역시 내가 최시현 검사님이랑 결혼해야”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내가 여자니까 여자 동료들 반응이 주야 ^^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그리고 우리 지검 검사 전원, 너 지키려고 머리에 빨간띠 맸음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심지어 평소 같았으면 태클 졸라 걸었을 차장도 입 닥치고 있더라니까?

 

 

맨 마지막 말 빼곤 영양가가 없다.

시현이 담배의 재를 털곤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와의 대화창을 닫고 자신의 사무실에 속해있는 김현진 수사관과의 대화창을 열었다.

 

 

[김현진 수사관] 검사님, 괜찮으십니까?

[김현진 수사관] 여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김현진 수사관] 다들 경찰이 자신의 허물을 조금이라도 감추려고 여론전을 거는 거로 생각합니다.

[김현진 수사관] 상식적으로 태유와 연이 있다면 가장 처음으로 태유건설 사장을 조사하진 않았을 거니까요.

[김현진 수사관] 그리고 애초에... 돈을 받은 것 자체가 문제 아닙니까?

[김현진 수사관] 지검에선 그러게 왜 돈을 받아서,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김현진 수사관] 이프로스에서는 반반 갈리긴 했지만... 그래도 무고하다는 여론이 좀 더 큽니다.

[나]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김현진 수사관] 날씨 추운데 핫팩 더 들고 다니시고요.

[김현진 수사관] 다른 정보 있으면 바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업무용, 개인용 핸드폰 둘 다 쉴 새 없이 알림이 떴다. 친구, 지인, 동료, 기자, 결혼정보회사 등등. 압수수색 당시 찍힌 사진 덕분에 더 빠르게 자신의 신상이 알려졌기 때문인지, 솔직히 화제가 될 거로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뜨거운 반응일 줄은 몰랐다. 상관없지만. 그런데 충전을 자주 해야 해서 귀찮았다.

연락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담배 연기를 내뱉다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에게서 알림이 와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중앙지검 조찬영 반부패2부장검사님] 잠깐 보자

 

 

곧바로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끄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등을 돌려 옥상을 빠져나간다.

 

 

 

 

 

 

시현이 반부패수사2부 부장검사실에 들어가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부장검사가 앉으라고 말하며 소파를 눈짓했다. 시현이 자리 잡고 앉자 그도 책상 앞에서 일어나 소파로 걸어와 앉았다.

 

“이렇게 대화하는 건 처음이지?”

“예.”

“나는 말뿐인 놈을 싫어해. 듣기로, 네가 입을 그렇게 잘 턴다기에 일부러 안 불렀었다.”

 

이 부장검사는 누구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걸까. 기조부장? 아니면 그와 비슷한 급의 부장검사? 혹은 자신이 시보 때부터의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는 차장검사들 중 하나?

화자에 따라 시현에 대한 평가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가 어떤 말을 들었는지 추측하고 그에 따른 태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려는데 부장검사가 그 틈을 주지 않고 웃었다.

 

“봐,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인다.”

“…….”

“숨긴다고 숨기겠지만, 너 아직 4년 차지? 경력도 짧아, 나이도 핏덩어리야. 산전수전 다 겪은 영감들한텐 다 보인다고.”

 

그래도 부장 선까지는 안 들킬 거라고 덧붙이며 허허 웃는다.

그 말에 시현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뻔뻔하게 턱을 들었다.

 

“그래서 다들 귀여워하십니다.”

“허허.”

“그리고, 제가 증명했으니까 지금 부르신 거 아닙니까. 이제 귀여워하시려고요.”

 

자신을 어리게 보는 사람에겐 치기 어린 당돌한 태도로. 하지만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부장검사가 크게 웃는다.

 

“그래. 빌려온 막둥이, 내 막둥이 만들려고 한다.”

 

순간적으로 아, 싫은데. 하고 생각해버렸다. 좋은 일이긴 한데 특수부 일이 너무 빡셌다…….

부장검사는 시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네가 여론전 할 거라고 미리 언질은 받았었다. 그럼 우리 공식 입장은, 불쾌하다는 발언 정도면 방해가 안 되겠나?”

 

그 말에 시현이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건 의도한 게 아니라 정말 당황한 거였다.

 

“저한테 그 정도의 권한을 주십니까? 어디 결정입니까?”

“어디긴, 우리 검찰총장님이지.”

 

시현의 무표정이 깨졌다. 식당에서 기조부장을 봤을 때부터 눈치챘지만 믿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부장검사가 단호히 짚어주었다. 크게 당황한 표정의 시현을 보고 부장검사가 무릎을 치며 웃는다.

 

“이번이 정말 특이 케이스야. 잘잘못이 뚜렷하니 정말 단순한 트집이고, 이 이상으로 가지 못해. 그래서 굳이 네가 이 사건으로 고른 거 아닌가?”

“……맞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사건 초기에 단순하게 태유 손자인 검사라서 주목받아 이름을 알리고 그로 인해 경찰의 공격을 받아 검찰 구성원들이 감히 경찰이 검사를 쳐? 하고 똘똘 뭉쳐 네 편을 드는 그림’을 짜기에 최적화된 사건이잖아. 내부에서 어떻든 밖에서 검사가 처맞고 오면 똘똘 뭉쳐 보호하는 검찰 조직의 특성을 생각해서, 그 특성을 극대화하려고 일부러 검찰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경찰을 상대로 찍고.”

“……네.”

“수사가 진행되면 자연스레 검찰은 빠지고 실제 돈을 준 놈과 돈을 받은 경찰이 맞붙게 판이 짜여 있고.”

“……네.”

“그래서 입만 다물고 있어도 되는데 굳이 노인네들이 심력을 쓰는 건 에너지 낭비지. 기자들 앞에서 ‘이건 사실 범의유발형 함정수사가 맞다’ 외치는 거 말곤 수사에 아무 영향 없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네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라는 지시도 있으셨다.”

 

이렇게까지 다 읽혔던 건가? 시현이 당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자 부장검사가 흐흐 웃음을 흘린다.

 

“네가 쓴 수사계획서를 봐서 이러는 거야. 거기엔 이렇게까지 쓰여 있진 않았지만 대충 흐름이 보이니까. 그래서 우리 부서에도 네가 쓴 수사계획서는 공유하지 않았어. 안 본 사람은 모를 거다.”

 

잠시 말을 끊은 부장검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네 개인이 이렇게 집중 받아도 괜찮나? 네 몸에 있던 아주 작은 먼지라도 털리면 역효과야. 재기 불능이 될 수 있어. 여기까지만 하더라도 널 키울 가치는 충분해서 물어보는 거야. 멈춰주려고.”

 

그제야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여유를 두른 시현이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어 보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피아를 식별할 수 있는 나이 때부터 준비해왔습니다. 단 한 톨의 먼지도 없음을 자신합니다.”

 

있어도 자신이 아끼는 핏줄에 흠집을 내기 싫어하는 누군가가 진작 다 털어줬을 거였다.

10

시현이 지친 기색으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로 파견됐었던 시현은 오늘 자정 시점에서 파견이 종료되고 다시 서부지검 소속이 된다. 시현이 먼저 청했다. 자신의 친가인 태유그룹이 도마 위에 올라 수사의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명분으로 수사 회피를 신청했고, 반부패수사2부 부장검사와 중앙지검장이 승인하여 장학금 브로커 수사에서 빠지기로 했다.

시현이 이 타이밍에서 수사에서 빠지는 건 애초부터 수사 개시 전, 시현이 작성했던 수사계획서에 기록되어 있었기에 문제가 되기는커녕 시현의 신분이 밝혀지는 것을 전제로 한 계획이라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다.

 

 

시현이 이 수사를 시작한 이유는 범법자를 처벌하려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였다. 상부의 인정과 검찰 내부에서의 이미지 메이킹. 이 두 가지 이유 중 한 가지, 상부의 인정은 해결됐고―중앙지검 특수부로의 이동이 확정되었다. 검찰총장과의 끈도 생겼다.― 남은 한 가지는 이제 더 이상 수사팀에 속해있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다. 직접 수사를 마무리한다면 성취감은 얻겠지만 잃을 게 더 많으니 미련은 없다. 자신보다 더 경험이 많고 유능한 특수부 선배 검사들이 잘 마무리해줄 거라고 믿었다.

 

 

경찰은 태유그룹과 시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시현이 보기엔 정말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 끌기의 수단이었다. 돈을 준 사람과 돈을 받은 사람이 명확했기 때문에 실제 뇌물을 받은 경찰서장들의 목이 날아가는 건 확정됐으나 경찰청장의 목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짠 판이라 충분히 예상한 바지만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좀 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아무 대응 없이 숙성기간을 두는 중이라서 지금 시점엔 이프로스에서도 “실적을 위해 친가인 재벌가에서 일부러 꾸민 비위 정보를 받아 짜고 친 것”이라는 여론이 좀 크다고 했다. 지금은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공격받고 있는 상황이다.

 

 

 

 

“……저. 지금 기분 진짜 좆같습니다.”

“안다.”

“씨발 이게 무슨 드라마예요? 아니, 드라마에서도 못 씁니다, 이거. 더러워서. 아버지는 저를 왜 키워주신 건데요? 아버지는 자기 호적에 올리는 갓난아이가 사실 자기 동생인 거 알았어요? 알고 돌아가셨어요? 하하, 이게 뭐야. 그 나이에 좆이 서긴 섰어요? 아, 역겨워. 아니, 그리고 호적 바로잡을 생각 없다면서요. 그런데 왜 알려주는 건데요? 저한테 아버지 소리가 듣고 싶어요?”

“너라면 이 사실을 잘 이용할 수 있으니까.”

“……하. 진짜. ……부정을 못 하겠어서 더 좆같아.”

“내 자식들 중 네가 날 가장 많이 닮았다. 그래서 잘 알아.”

“제발. 토할 것 같아요.”

“네가 로스쿨을 목표로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나름대로 준비해왔다.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널 위한 재료가 많아. 필요하다면 내부에도 손을 써주마.”

“재료는 무슨 씨발.”

“이왕 하는 거 높이 올라가야지.”

 

 

 

 

사실, 이프로스의 그 여론은 진실이다.

하지만 ‘최시현’이 살아온 삶이 진실을 거짓으로 바꿀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를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소중한 물건들만 챙기라고 자신의 작은 가방을 건네주었다. 시현의 눈이 정보를 읽어냈다. 시계에 표시된 시간, 어머니의 표정, 어머니의 캐리어. 그에 뒷받침하여 시현의 기억이 추가 정보를 추출한다.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태도, 가족들의 태도. 지금이 자신이 어머니와 친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이라고 판단한다. 머릿속의 천칭에 추를 하나하나 올렸다. 어머니와의 관계, 할아버지와의 관계, 주거 공간의 변동, 생활권의 변경, 자신의 미래. 추가 모두 올라갔을 때 천칭의 기울어짐을 확인하곤 작은 가방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보통 아이들보다 꽤 많이 명석했던 시현은 8살 때에도 계산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유 없이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한 급우를 보호하고 자기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다. 중학교 1학년 때, 좋지 못한 사고를 당한 사람을 외사촌 형들과 함께 보호해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친구를 붙잡아 안정시키고 원인이 된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려 노력했다. 살아오면서 선행이라 불릴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귀찮음’, ‘번거로움’, ‘자신의 시간’, ‘금전적 손해’보다 ‘평판’이 올라간 저울판 쪽이 더 아래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덕을 감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니 착하지 못하면 착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판’, ‘관계’, ‘반향’의 추의 무게를 다른 추보다 훨씬 무겁게 했다.

 

 

소파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무음으로 설정해두었는데 마침 전화가 오고 있을 때 발견했다. 자신의 오랜 친구였다. 자신이 ‘착한 척’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에 이 친구의 영향이 꽤 컸다. 정말 착한 놈이었으니까. 본심이 어떻든 ‘착한 척’을 실제로 행동하고 있으니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는 놈이다. 사실 그때 좀 감동 받았다.

천칭에 추가 올라간다. 안 받았을 때의 결과와 받았을 때의 결과. 전화를 받아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왜.”

- 괜찮아? 괜찮겠지. 내 생각엔 네가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 같은데.

“잘 알면서 왜 전화해.”

- 진짜였어? 그냥 걱정돼서 전화해봤어. 다음 건강검진 예약 언제로 잡아줄까? 슬슬 받을 시기야.

“나 일주일 동안 휴가야. 아무 때나 잡아.”

- 네가 아무 때나 와. 그렇게 얘기해둘게.

“호흡기내과 펠로우께서 그런 권력이 있으세요?”

- 권력은 아니지만 이런 부탁은 기꺼이 들어주시는 관계를 맺고 있지. 센터는 VIP 대비해서 항상 여력을 조금씩 두고 있으니까 어려운 부탁도 아닐 거야.

“우리 선생님 정말 대단하시네.”

 

비꼬는 말에도 하하 웃어넘긴다. 이러니까 내가 계속 제멋대로 굴지.

 

- 아무튼, 정말 괜찮아? 우리한테도 기자들 연락이 오고 있는데…….

“날 친구로 둔 죄라고 생각하고 감당해.”

- 그건 당연히 감당해야지. 사실 우리가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그래도 괜찮아? 네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시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권은재. 넌 나 알잖아.”

-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좋게’ 말하라는 거지? 알았어. 시현아, 다들 너 도와주겠다고 난리야. 안 그래도 바빠 보이는데 각자 연락하면 민폐일까 봐 내가 대표로 연락한 거고.

 

당연히 도와줘야지. 이 계획에 너희들의 반응이 필수인데. 하고 생각한 시현이 눈을 감고 대꾸했다.

 

“한 번씩 다 연락했으면 다 차단했을 뻔했다.”

- 하하. 그리고 지원이가 묻더라. 너 진짜 재벌 3세였냐고.

“아니라고 하면 믿게?”

- 아닐걸? 근데 같이 컵떡볶이 사 먹고, 같이 멀지만 싼 독서실에 다녔던 애가 재벌가 손자였다니 꽤 놀란 것 같더라. 아무튼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비밀까지 공개하는 거 보면 큰일이겠다. 힘들면 전화해. 고민이나 하소연하는 건 들어줄게.

“내가 너한테 내 고민을 말한 적이나 있어?”

- 알아. 우리 독립적인 시현이는 남한테 고민 같은 거 말 안 하지.

 

시현의 본성대로 지르는 까칠한 말에도 그저 부드러운 어조로 대꾸하는 걸 볼 때마다 이 자식 인성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면서 시현이라면 할 수 없는 그의 반응을 시현이 학습하고, 타인에게 이용했다.

용건이 끝났는지 간단한 인사말 후에 전화를 끊어서 핸드폰을 배 위에 올려두고 잠시 호흡했다. 머릿속으로 타이밍을 잰다. 수사의 진척, 자신의 신상, 친구들의 인터뷰가 퍼질 시기를 어림잡아 가장 효과적인 타이밍이 언제일지를 계산했다.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가져와 소파에 앉은 채 노트북을 조작했다. 오랜만에 이프로스에 접속한 시현이 턱을 괴고 화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언론사와 인터뷰해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안에서 밖으로 퍼지는 게 원래 목적에는 더 맞다. 검찰 내부에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알리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서울서부지검 형사3부 검사 최시현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에 휙 써 내려간 긴 글을, 2일 후로 예약게시 설정했다.

 

곧 제주도에 가니까.

11.

 

오전 11시 40분. 이프로스에 자신의 글이 올라갈 시간이었다. 일부러 점심시간 직전에 올라가게 설정했다. 점심 먹으면서 대화들 하시고, 소문 좀 내시라고.

오후 12시 30분, 충전기에 꽂혀있던 업무용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밀린 알림들이 우수수 뜨고, 현재 오는 알림들이 상단에 뜨기 시작했다.

 

 

 

- 존경하는 선배, 동료, 후배 검사 여러분. 저의 출신 하나 때문에 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가 진행한 수사의 공정성이 의심받는다는 것이, 그 노고가 폄하된 것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수사 기간 내내 늘 새벽녘까지 야근하면서 노력하신 선배 검사들을 봐왔기 때문입니다.

 

[중앙지검 강영아 검사님] 너 믿어

[중앙지검 김필형 검사님] 우리 아무도 네 탓 안했다? 휴가중에 굳이.. 푹 쉬다가 와라 막둥이

 

(중략) 저는 8살에 부친을 여의며 친가와 의절한 후 외가에 의탁하였고, 현재까지도 친가와의 교류는 없으므로 특정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평범한 검사입니다. 단순히 비위 제보를 받아 최선을 다해 소신껏 수사하였으며 범죄혐의가 있는 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검사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부패를 척결하는 사명 앞에 혐의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부지검 이은택 부장검사님] 너는 검사 안 했으면 사기꾼으로 대성했을거다

 

 

(중략) 저는 최시현이라는 개인 이전에 공익의 대표자로서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길지 않은 검사 생활이지만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 제 손으로 서명한 검사 선서 앞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놈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서부지검 강새빛 검사] 검사선서를 들먹이면서 최프로에 대한 공격을 검사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게 만들어버리는 기술 잘 보았습니다

 

 

(중략) 정도를 걷는 젊은 검사가 외압에 쓰러지지 않고 검사로서의 명예와 자긍심, 그리고 신념을 품고 계속 걸어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2023년 12월 29일, 서부지검 형사3부 검사 최시현.

 

[중앙지검 조찬영 반부패2부장검사님] 타이밍이 완벽해서 오히려 작위적이지만 외압 워딩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네. 수고했다.

[연민지 실무관] 친구분들 인터뷰나 검사님 평소에 하던 거로 태유랑 연관 없다는게 확실해보인다는 여론이에요 이프로스도 훑어보니까 완전히 검사님편 됨ㅎㅎ

 

 

함정수사 의혹 태유 孫 검사, “8살부터 친가와 의절상태. 외압에 쓰러지지 않게 도와달라”

태유 孫 검사의 이프로스 게시글, 응원한다는 댓글 줄이어 달려

檢, “장학금 브로커 수사절차는 모두 적법, 쓸데없는 트집 불쾌”

檢, ‘장학금 뇌물수수’ 경찰서장 모두 소환 조사

 

 

경찰 입장의 기사들이 묻히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 뜨기 시작한 뉴스 기사 몇 개의 제목을 확인한 후 완벽하게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낀 것도 잠시, 핸드폰에 뜬 이름에 표정을 굳혔다.

 

[대검 김희현 기조부장님]

 

받을까 말까 고민할 전화는 아니다. 무조건 받아야 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 없이 받으려니 자신답지 않게 약간 떨렸다. 전화를 받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네, 기조부장님.”

- 휴가는 잘 즐기고 있나?

“바다도 보고 잘 놀고 있습니다.”

- 서울로 돌아오면 대검으로 잠깐 들어오게.

“알겠습니다.”

 

이거 남은 휴가를 즐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마음속으로 불평하며 전화를 끊는다.

12.

 

 

오전 9시, 깔끔한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시현이 대검찰청 본관으로 들어갔다. 서울로 돌아온 후 자신을 부른 기조부장에게 연락하자 가능한 빠른 날, 이른 시간에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출근하는 대검 소속 직원들 사이에 껴서 방문증을 받은 후 곧장 7층으로 올라갔다. 저번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어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시현은 기획조정부장실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곤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 점검한 후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두 걸음 들어가 허리를 굽혔다.

 

“앉아.”

 

다시 허리를 세우고 소파에 앉았다. 기조부장의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보였다. 저도 모르게 탐색하다가 눈을 내리깔자 기조부장이 웃는다.

 

“수사 수고했다. 다 네 수사계획서대로 됐던데. 소름 끼치더군.”

“감사합니다.”

“얘기 시작하기 전에, 계획서에 없었던 내용부터 묻자. 태유는 어떻게 할 건가?”

 

시현이 검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언론에서 시현의 이름이 싹 사라졌다. 경찰이 시현과 태유를 같이 물고 늘어지며 함정수사라는 스탠스를 유지했다간 시현을 보호하기 위해 뭉친 검사들이 일제히 움직일 거고, 그렇게 되면 검경 갈등이 심화된다. 그 사태를 감당할 명분이 없던 경찰이 발을 뺐다. 지금은 실제 돈을 받은 경찰과 실제 돈을 준 태유의 이름만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실 시현이 일부러 경찰 쪽에 함정수사 운운하며 자신의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이런 구도로 흘러갔을 거였다.

 

“태유가 어떻게 되는지는 제 알 바 아닙니다. 그쪽에서 감당할 일이고, 각오도 했을 겁니다.”

 

정말 알 바 아니었다. 이용하라고 정보를 내준 건 태유였고, 친가에 애정 같은 것도 없고, 친가의 지분을 받을 생각도 없다. 시현이 감당할 몫은 없었다.

 

“태유가 검찰을 물고 늘어질 일은?”

“절대 없습니다.”

 

시현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호적상 할아버지인 태유 회장이 살아있는 한 태유는 검찰에 호의적일 것이었다. 그는 제 아들에게 흠집을 내기 싫어하니까.

시현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파악하려는 듯 시현의 서늘하게 식은 얼굴을 바라보던 기조부장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럼 됐다. 일어나자.”

 

‘나가봐’가 아니라 ‘일어나자’였다. 동행을 뜻하는 말이었다. 시현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기조부장이 말을 이었다.

 

“총장실 가자고.”

 

시현의 입가가 굳었다. 이렇게 갑자기? 검찰총장이 평검사를 직접 만나?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사태에 이걸 어떻게 대처할까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검찰총장실 앞에 서 있었다. 시현이 기조부장실로 들어가기 전에 했던 것처럼 기조부장이 총장실 문 앞에서 재킷 단추를 잠갔다. 그가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린다. 문이 열리자 시현은 기조부장의 한 걸음 뒤에 붙어 따라 들어가서 함께 허리를 굽혔다.

 

“이게 그 소문이 자자한 젊은 검사구만. 앉자.”

 

시현과 기조부장이 소파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검찰총장은 시현이 사진으로도 영상에서도 많이 봤던 사람이었다. 시현이 알기로 총장에 취임한 지 1년이 약간 넘었다. 아무리 뻔뻔한 시현이래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니 어느 정도는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차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 말에 총장이 직접 일어나 총장실 한쪽에 있던 커피포트에서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와 내어주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게 쳐다보던 시현이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자 다시 자리에 앉은 총장이 껄껄 웃었다.

 

“내가 주는 커피는 마실 수 있지? 아무것도 안 탔고, 탈 이유도 없다.”

 

뒷조사했다는 걸 이런 식으로 표현하다니.

과거 마약 수사 중 잠깐 시선이 떨어진 사이 소환했던 참고인이 물에 마약을 탔고, 시현이 그걸 마실 뻔했다는 일은 아는 사람이 몇 없는 정보였다. 자랑할 거리가 아니었으니까.

시현의 안색이 살짝 창백해지자 기조부장이 허허 웃는다.

 

“총장님, 너무 겁을 주십니다.”

“겁을 주긴, 귀여운 후배한테 직접 커피를 내준 것뿐인데.”

 

총장이 시현을 보고는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찼다.

 

“갑작스러워서 많이 놀란 눈치인데, 그럼 본론만 빨리 얘기하고 보내주겠네. 이렇게 직접 보자고 한 건 믿음을 주기 위해서야.”

 

시현은 자신을 끌어 올려준다는 약속에 대한 말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기조부장님으로도 충분했습니다만, 감사합니다.”

“기조부장이랑 총장이랑 급이 비교가 되나?”

 

총장의 장난스러운 말에 기조부장이 웃는다.

 

“그리고 궁금한 게 있지?”

 

시현이 한 호흡동안 생각하고 답했다.

 

“저를 어떻게 쓰실 겁니까?”

“송한명 대전고검장 알지?”

 

질문에 질문으로 답이 돌아와서 저절로 인상이 써지려는 얼굴근육을 막았다. 정보값을 받을 수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화법을 선호하진 않았다. 그리곤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아주 소문이 많은 사람이다.

 

“청렴하고 유능하여 존경받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 검찰총장으로 하마평에 오른 사람이다.”

 

기수도 그렇고 평판도 그렇고, 납득할 만한 인사였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시현이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총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김필수 인천지검장, 성진욱 고양지청장, 이규희 차장검사는?”

 

앞의 두 사람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다는 것만 알고 이규희 차장검사는 아주 잘 아는 사람이다. 시현이 들이받은 서부지검의 차장검사다. 정, 재계 사람들과 골프를 돌며 돈과 여러 가지 청탁받고 수사를 무마시키는 사람. 시현이 차장검사를 들이받은 것도 자신이 한 수사를 묻으라는 지시가 여러 번 내려오자 참지 못하고 터진 것이었다.

시현이 답하기 전에 총장이 말을 덧붙인다.

 

“이 셋은 송한명 대전고검장의 그림자야.”

 

그 말로 머릿속에서 정보가 다 짜 맞춰졌다. 왜 이규희 차장검사가 그렇게 날뛰는지 알겠고 비리를 알면서도 왜 사람들이 건드리지 못하는지 알았다. 뒤에 다음 총장이 확실시되고 있던 대전고검장이 있던 거였다. 기수도 높고 평판도 좋은 대전고검장을 적으로 돌릴 수가 없을 테니까. 시현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검찰총장의 의도도 이제 파악할 수 있다. 인천지검장, 고양지청장, 서부지검 차장검사가 송한명 대전고검장의 더러운 뒷일을 해주니, 대전고검장은 그저 깨끗한 채로 돋보이고 있는 이중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잘라내려 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총장에 오르면 검찰이란 조직에 손해만 될 거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지로 인한 긴장이 사라졌다. 계산을 할 수 있게 되자 여유를 약간 되찾은 시현이 엷게 미소 지었다.

 

“제가 이규희 차장검사를 썰면 되는 겁니까?”

“의욕은 충분하지?”

“네, 의욕은 아주 넘칩니다. 다만 이규희 차장검사가 저를 많이 경계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방이 아니라 중앙지검으로 이동한다면 뭔가 있다고 확신할 텐데요.”

“내가 칼이 자네 하나뿐인 건 아니야.”

 

옆에서 기조부장이 말을 이었다.

 

“네가 이규희 차장검사의 시선을 끌면 다른 검사의 운신이 좀 쉬워진다. 그리고 다른 둘은 다른 칼이 붙을 거고.”

“저와 함께 할 다른 칼은 누굽니까?”

“중앙지검 김세진 검사.”

 

반부패수사2부에서 같이 압수수색도 한 그 검사였다. 그래서 시현이 기획한 수사를 그곳에서 한 거였다고 뒤늦게 깨달았다.

 

“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어. 반년 안에 셋을 다 치고, 대전고검장을 잡아야 한다.”

 

시현이 약간 미간을 좁혔다. 누군지도 다 아는 상황이라면 제일 먼저 둘 수는 이간질인데. 이런 수를 쓴다는 건 안 통했다는 거다. 왜 이간질하지 않냐는 말을 바꿔 다른 질문을 했다.

 

“넷이 어떻게 엮여있습니까? 기획할 때 참고하려 합니다.”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다더군. 어느 하나가 터지면 넷이 함께 다 죽는다고 해. 그게 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 이것까지만 알아내는데도 내 칼 하나가 날아갔다.”

 

그걸 공략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절할 수 없는 일인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11.

 

 

이프로스에 상반기 인사발령 공고가 떴다. 시현이 그걸 확인하기도 전에 형사3부 단톡방이 송별회 하자는 메시지로 도배됐다. 저 반응을 보면 확인할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 이프로스에 접속해서 공고를 확인했다. 제 이름이 어디 있는지 확인한 후 별 감흥 없이 사건 배정 개수를 확인한다. 그사이 선배 검사들이 부장검사까지 질려할 정도로 징징거리기에 그 송별회 오늘 해버리자고 했다. 시현이 보기에 송별회는 핑계고 그냥 부장검사 카드를 뜯어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검사님, 조만간 저희 방끼리도 한 잔 하시죠.”

 

김현진 수사관의 말에 시현이 살짝 웃었다.

 

“네. 날짜는 내일 지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일 제가 죽을지 살지 가늠이 안 되네요.”

 

가만히 듣던 연민지 실무관이 허공을 쳐다보며 생각하다 말한다.

 

“강새빛 검사님이 검사님 죽여버리겠다고 벼르는 걸 언뜻 들었어요.”

“아, 제가 강 프로는 이깁니다.”

“……검사님, 주량으로는 지잖아요?”

“완력으로요.”

“술자리에서 완력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짧은 잡담 후에 오늘 저녁 송별회 시간을 생각하고 오늘 할 일의 양을 가늠하면서 개인용 핸드폰을 들어 제 애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나] 오늘 회식입니다. 오후 7시 시작, 식당은 공덕역 쪽 OO. 명목이 제 송별회라 중간에 못 빠집니다.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핸드폰을 엎어두고 일을 시작했다. 이번 사건 기록은…… 927페이지. 천 페이지를 안 넘는다는 것에 감사해하며 종이 뭉치를 시야에 맞춰 몸쪽으로 끌어오고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일하다 보니 어깨가 결려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제 연인과 같이 맞춘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927페이지짜리 사건 기록은 이미 다 읽었고, 들춰보던 다른 사건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하러 가시죠.”

 

공무원증을 챙겨 검사실 식구들과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면서 개인용 핸드폰을 확인했다.

 

[테디] 확인

[테디] 적당히 마시고

[테디] 끝날 때쯤 전화나 톡

 

피식 웃곤 긴 손가락으로 핸드폰 위를 톡톡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나] 네

 

그리고 구내식당 앞에서 형사1부 부장검사와 함께 있는 그를 마주쳤다. 순간 근처를 걷던 사람 중 지검 소속이라 공무원증을 착용한 사람들 모두가 멈칫했다.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다. 단순하게 식사하러 온 일반인들만 무슨 일인지 몰라 기웃거린다. 한 걸음 앞에서 걷던 김현진 수사관이 시현의 앞을 살짝 막고, 연민지 실무관이 시현의 소매를 잡는다. 시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차장검사님, 식사하셨습니까?”

 

아무리 시현이라도 일반인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규희 차장검사를 들이받을 생각은 없다. 그도 마찬가지인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현을 노려보았다.

 

“식사했지. 오늘 메뉴가 무거워서 그런가, 속이 더부룩하네.”

“이상하네요. 오늘 콩나물국 아닙니까? 아, 혹시 아침부터 속이 거북하진 않으셨습니까?”

 

옆에서 연민지 실무관이 ‘검사님 컷컷컷컷컷!!!’하고 입 모양으로 열심히 어필하는 게 보였지만 무시했다. 제 인사발령 공고를 보지 않았냐는 뜻이 담긴 시현의 물음에 이규희 차장검사가 미간을 좁힌다.

 

“아니. 아무렇지 않았어. 그나저나 축하한다. 날개 달았네. 우리 최 프로가 아직 어려서 그런가. 혈기가 왕성해서 걱정되긴 해. ―밀랍이 녹지 않도록 조심하고.”

“감사합니다. ―글쎄요, 태양의 고삐를 잡은 사람이 에리다누스로 떨어지는 게 먼저 아닐까 싶습니다.”

 

겉으로야 화기애애했지만, 슬슬 대화의 함의가 무시무시해지고 있었다. 형사1부 부장검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차장님. 시선이 너무 모였습니다.”

 

이규희 차장검사가 가만히 시현을 노려보다가 말없이 그를 지나쳐 걸었다. 형사1부 부장검사가 그 뒤를 쫓아 사라지자 시현이 픽 웃으면서 옆에 있는 두 사람에게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저 정말로 인사만 하려 했습니다?”

“……검사님이 선빵쳤잖아요.”

“맞아서 받아친 겁니다.”

 

 

 

 

 

 

 

회식 장소로 갈 땐 강새빛 검사의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새로 뽑은 차 자랑하겠다며 태워주겠다더라. BMW 520i다. 이 차는 얼마 만에 바뀔까. 시현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시현은 3개월 만에 바뀐 차에 대한 관심을 끄고 조수석에 타서 벨트를 매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늘 많이 달릴 거냐?”

 

핸드폰으로 노래를 고르던 강새빛 검사가 히죽 웃는다.

 

“당연하지. 우리 최 프로 죽여버려야지.”

“나 부장검사님 옆으로 도망간다?”

“상사를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야.”

 

내비게이션에 식당을 찍은 그녀가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 먼 곳은 아니라서 이동 거리는 짧았다.

 

“서부지검 발령 1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동 발령이라니, 그것도 특수부로. 무슨 끈 잡았는진 몰라도 최시현 검사 출세하네.”

 

그녀의 말에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시현이 피식 웃었다.

 

“내가 왜 출세하는 것 같아?”

“이규희 잡으려고? 아. 오늘 점심에 식당에서 만났다며?”

“어. 밥 먹기 전에 얼굴 보니까 식욕 싹 사라지더라. 사진 한 장 찍어가서 살 뺄 때 쓰려고.”

“미친놈.”

 

강새빛 검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반쯤은 진심이었던 시현이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손등으로 뺨을 괴었다. 잠깐 침묵이 흐르고, 주차 자리를 찾아 주차한 강새빛 검사가 진지한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시현아.”

 

그 호칭 변화에 시현도 응해주었다. ‘동료 검사’가 아니라 ‘친구’의 입장으로 대답했다.

 

“편하게 말해.”

“도움 필요하면 말해. 이규희 좆같아 하는 거 너뿐 아니니까. 부장검사님도 차장실 들어가면 널려있는 골프채로 대가리 갈기고 싶다고 하더라. 아무튼 경력도 얼마 안 되는 너 총대 세우는 것 같아서 좀 찝찝하긴 한데, 우린 평범하잖아. 기수가 두 자릿수 차이 나는 상급자한테 덤비기 힘들어.”

“나도 평범해.”

“지랄.”

 

어이없다는 듯 웃은 강새빛이 다시 표정을 굳혔다.

 

“정말로. 나뿐 아니라 형사3부 다 똑같은 심정이야. 그리고 너 죽었을 때 나왔던 얘긴데 네가 와서 우리 형사3부 사건 해결률이랑 해결 기간 같은 수치 전부 좋아진 거, 은혜 갚고 싶어 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시현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런 좋은 얘기를 왜 내가 뻗었을 때 해?”

“그건 술 약한 놈 잘못이지. 아무튼, 그렇다고. 한 번 동료는 영원한 동료다? 다른 곳 가도 편하게 말해.”

 

한 호흡 동안 생각한 시현이 눈을 휘며 해맑게 웃는다.

 

“알았어. 편하게 이용해 먹을게.”

“미친놈아, 이용하란 얘기는 아니야.”

“태워줘서 고맙다.”

 

시현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 눈에 익은 외제차가 가득하다. 날이 추워 코트 깃을 여미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불판 위엔 고기들이 올라가 있었다.

 

“최 프로, 강 프로. 왜 이렇게 늦었어?”

“강 프로가 운전이 미숙해서요.”

“와, 최 프로가 모함해요.”

 

서부지검 형사3부 이은택 부장검사가 소주병을 왼손에 든 채로 오른손으로 시현을 향해 손짓했다.

 

“오늘의 주인공, 빨리 와. 한 번 죽어보자.”

 

 

 

 

[나] 2차 갑니다. 옆에 OOOO. 오후 9시20분

[테디] 많이 마셨어? 오후 9시22분

[나] 한 번 뻗었다가 깼어요. 3차 갑니다. OO노래방. 오전 12시38분

[테디] 괜찮아? 언제 끝나? 오전 12시38분

[나] ㅇ제ㄱ긑나ㅛ 와요 오전2시26분

 

 

 

 

제 연인을 데리러 온 테디가 마주한 건 아예 의식이 없어 보이는 시현과, 그 시현의 양 팔을 잡은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였다. 셋 다 술에 꼴아 보였다. ……검사들 진짜 무섭게 노네.

시현의 팔을 붙잡아 지탱해주던 강새빛 검사가 시현을 빤히 바라보는 중년 남자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쪽도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군데 쳐다봐요?”

“……시현이가 데리러 오라고 해서.”

 

연인 사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댈 수밖에 없다. 강새빛 검사가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다가 시현의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려 그의 핸드폰을 꺼냈다.

 

“얘한테 전화해봐요.”

 

그녀가 꺼내든 건 시현의 개인용 핸드폰이 아닌 업무용 핸드폰이었다. 똑같은 기종인데 케이스가 다르다. 개인용은 투명 실리콘 케이스를 쓰지만, 업무용은 케이스 없이 사용한다. 테디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시현의 업무용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손을 움직이자 올라간 소매 밑, 그의 손목에 시현과 같은 시계가 채워져 있는 것을 강새빛 검사가 포착했다.

 

“…….”

 

업무용 핸드폰엔 번호 저장이 되어있지 않아 그냥 핸드폰 번호가 떴다. 강새빛 검사가 핸드폰 액정을 힐끗, 그리곤 테디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핸드폰을 시현의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데려가요.”

 

테디가 시현을 받아들었다. 의식 없는 사람의, 그것도 키가 180이 넘는 남성의 몸은 아주 무거웠으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팔을 어깨에 걸치고 허리를 감싸 안은 채로, 바로 앞에 비상깜박이를 켜둔 채 세워둔 자신의 차로 데려가 조수석에 시현을 밀어 넣었다. 운전석에 앉아 몸을 옆으로 돌려 시현의 얼굴을 살폈다. 빨개져선 밭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취한 건 처음 봤다. 손을 들어 그날처럼 눈 위를 덮는다. 차가운 제 손이 화상을 입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혀를 한 번 차곤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그때 시현의 코트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한 번이 아니라 계속 진동한다. 그는 시현이 개인용 핸드폰은 무음 설정으로, 업무용 핸드폰은 진동 설정으로 해둔 것을 알고 있다. 업무용 핸드폰으로 오는 연락은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 그걸 아는 테디가 잠깐 머뭇거렸다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받을 수 있는 전화라면 대신 받아서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중앙지검 김세진 검사님]

 

테디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살짝 미간을 좁힌다. 그리곤 전화를 받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시현 씨 핸드폰입니다.”

 

 

 

 

 

 

 

그리고 아침, 시현이 택시를 타고 출근하면서 김세진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에 온 전화를 테디가 대신 받아줬다고 들었다. 별말은 없었다고 했지만 받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서 별말을 못 한 것이 분명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죽을 것 같아 창문에 머리를 박은 채, 하지만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새벽에 전화하셨습니까? 아, 저 택시입니다.”

 

듣는 사람이 있으니 말을 아끼겠다는 뜻이다.

 

- 할 말 있으니 잠깐 보자. 언제 시간 돼?

“언제든 됩니다.”

- 오늘 점심시간? 내가 서부지검으로 갈게. 식사까지 할 시간은 없고 짧게 얘기할 거야.

“네, 도착하시면 연락주세요.”

 

전화를 끊고 서부지검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자신이 이 정도라면 형사3부는 초토화됐을 거였다. 지검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위기를 감지했다. 걷는데 머리가 울려 죽는 줄 알았다. 가까스로 검사실 근처까지 도달했을 때 형사3부 검사들이 반 시체 상태로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걸 무시하고 자신의 검사실로 들어갔다.

 

“검사님…… 괜찮으시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괜찮아 보이십니다.”

“머리만 좀 지끈거립니다. 저 숙취 없는 타입인데도요. 이거 오늘 일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두통 때문에 집중이 안 될 게 분명하지만 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억지로 꾸역꾸역 글자들을 머리에 쑤셔 넣고 판단하고 그에 맞는 서류를 작성한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자 식사하고 오라고 검사실 식구들을 내보냈다.

한 십 분쯤 기다렸을까, 업무용 핸드폰에 김세진 검사의 이름이 떴다.

 

“네. 도착하셨습니까?”

-지하 주차장 제일 안쪽이야. 내려와. 벤츠 3611.

“바로 가겠습니다.”

 

정장 위로 코트를 걸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종을 먼저 찾고 번호를 확인한다. 조수석 문을 열고 안에 탄다.

 

“오랜만입니다. 별일 없으셨죠?”

 

얇은 은테안경을 낀 김세진 검사가 시현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리곤 골치 아프다는 듯 살짝 미간을 좁힌다.

 

“나는 없는데, 너한테 별일이 생겼어.”

“……?”

“주변 정리 좀 해야겠다, 너.”

 

시현의 주변에 문제 될 사람은 없다. 그렇게 되도록 관리해왔다. 새삼 핏줄을 문제 삼진 않을 거고. 아,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제 연인.

김세진 검사가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선 서류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낸다. 어떤 이미지가 인쇄된 종이였다.

 

“내사 초기 단계라 아직 그럴듯한 증거는 없지만.”

 

이규희 차장검사가 5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와 함께 있는 CCTV 캡쳐다. 시현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시현아. 그렇게 궁금해하던 비위. 말해줄게.’

 

 

―서울경찰청 이재희 차장.

 

다른 종이를 보니 차량 블랙박스 캡쳐본이었다. 이재희 차장과…… 정장을 입은 테디가 함께 있는.

 

“새벽에 내 전화 받았던 사람이지?”

 

시현의 머리가 정보들을 조합한다. 자신과 함께 이규희 차장검사를 치는 칼인 김세진 검사. 검사가 검사를 치는 건 밖에서도 안에서도 보기 좋은 꼴이 아니니 연막을 쳐서 다른 사람의 혐의를 통해 타고 올라가 엮고 치려는 계획일 것이다. 이건 위에서 특별히 지시하지 않았어도 당연히 이렇게 해야 했다. 그렇게 이규희 차장검사의 주변을 살피다 서울경찰청 이재희 차장을 발견했고, 슬쩍 들춰보니 뭔가 있는 것 같아 조사해봤을 거다. 반부패수사부에서 이렇게까지 작업이 시작됐으면 반드시 무슨 혐의라도 씌울 수 있다는 뜻이다.

 

잠깐 눈앞이 아득해졌다. 검찰총장은 이미 자신의 뒷조사를 끝냈다. 테디의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김세진 검사가 이걸 자신에게 들고 왔다는 것 자체가 그 증명이다. 자신이 이재희 차장과 연결된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책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성적인 최시현이라면 제 연인을 잘라내는 결론을 내야 했다.

 

“……검사님. 내사 초기라 하셨죠. 그럼 아직 부장검사님께도 보고되지 않은 항목일 테고요.”

 

시현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김세진 검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맞아.”

“검사님과, 이걸 조사한 수사관들만 알고 있을 거고요.”

“나랑 수사관 한 명. 그리고 너. 이 셋만 알아.”

 

시현이 한 번 호흡하고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새 차갑게 언 눈으로 김세진 검사와 시선을 맞췄다.

 

“절 시험하시려는 겁니까?”

 

김세진 검사가 씨익 웃는다.

 

“맞아. 장학금 브로커 수사 때 수사 능력은 확인했어. 그런데 네가…… 어디까지 손을 더럽힐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고 싶어. 이건 상부와 관련 없어. 내 판단이야. 나와 같이 손발을 맞출 사람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

 

시현이 손안의 종이를 구겼다.

 

“어디까지 묵인하실 겁니까?”

“상부의 뜻에 방해되지 않는 선까지.”

“시험이 아니라 기회 같은데, 감사의 말을 드려야겠습니다.”

 

시현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다.

 

“제가 중앙지검으로 출근할 때까지만 시간 주십시오. 손이고 발이고 전부 구정물에 담가보죠.”

12.

 

김세진 검사는 정말 제 할 말만 하고 가버렸다. 매정하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시현은 별생각이 없었다. 딱히 뭔갈 기대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지금 다른 일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김세진 검사의 벤츠가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곤 뛰듯이 제 차로 걸어갔다. 급한 구두 소리가 지하 주차장을 울린다. 시현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그답지 않은 여유 없는 모습에 놀랄 게 분명했다.

검은색 G80의 운전석에 타 곧장 차 문을 잠그고 글로브박스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걸 쓸 일이 또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숨이 폐부까지 들이차도록 깊게 한 번 호흡하곤 직접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다섯 번. 생각보다 긴 시간에 점차 이성이 돌아온다.

 

-웬일이냐.

“오늘 저녁, 시간 내주시죠.”

 

인사도 생략하고 다짜고짜 꺼낸 말에 전화 상대가 껄껄 웃었다. 제 할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듣자 시현의 인상이 점차 구겨진다. 지금 재롱이라도 부리는 줄 아나. 심사가 꼬여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려던 찰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할아버지는 시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시간도, 장소도 말하지 않았으나 암묵적으로 약속된 바가 있었다.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할 건 많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다시 핸드폰을 글로브박스에 넣고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묵은 서류들이 잠들어있는 철제 캐비닛의 문을 열어 뒤적거리는 사이, 점심 식사를 마친 수사관과 실무관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검사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서류 관리는 실무관의 몫이었기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야당 국회의원 아들 음주운전 사건, OO제약 삼남 폭행 사건, 시청 공무원 자녀 방화 사건 서류 어딨는지 아십니까?”

 

시현이 수사하던, 하지만 이규희 차장검사가 손수 뭉갠 사건들을 읊었다. 실무관은 시현의 의도를 추측하고 잠깐 멈칫하더니 다른 캐비닛을 열었다.

 

“찾아드릴게요. 앉아 계세요.”

 

시현이 자신이 뒤적거리던 캐비닛 문을 닫고 허리를 폈다. 시계를 힐끗 보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니까 강새빛도 돌아와 있겠지. 지검에서 가장 발이 넓은 그녀가 해줄 일이 있었다. 짧게 생각하곤 자신의 책상이 아닌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잠깐 강 프로 방에 다녀옵니다. 핸드폰 다 두고 가요.”

“다녀오세요.”

“다녀오십시오.”

 

아직도 문에 달린 드라이플라워 리스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문을 열고 검사실을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옆의 문 앞에 서서 예의상 노크 두 번 후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안에 있던 정민훈 수사관, 송지혜 실무관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시현을 확인하곤 잠깐 놀란 듯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더니 그 후 별 반응 없이 제 할 일을 계속한다. 시현이 강새빛의 검사실에 온 건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시현과 강새빛이 친한 만큼 양쪽 식구들도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최 프로?”

 

검사실 가장 안쪽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강새빛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웬일이람.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강새빛이 핸드폰만을 챙겨 시현을 따라 나왔다. 평소였다면 특유의 너스레를 부리며 장난을 걸어왔겠지만, 시현의 낯빛을 보고 조용히 힐긋거리며 옆에서 걷는다.

둘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땐 비상계단에서 핸드폰을 이용한 필담을 하거나 둘의 차까지 가곤 했다. 열린 공간에선 누군가가 어디서 엿듣거나 도청할 수 있다고 의심하는 시현 때문이었다. 이번엔 할 이야기가 길어서 주차장으로 걸어간다. 다시 제 차로 온 시현이 운전석에, 강새빛이 조수석에 탔다. 문을 닫자마자 그녀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부탁할 일이 있어.”

“말해.”

“이규희가 뭉갠 사건들이 필요해. 지금 단계에선 완벽한 수사 기록까지는 필요 없어. 그 사건에 누가 엮여있는지와 대략적인 사건 개요만 있으면 돼.”

 

시현의 말에 강새빛이 잠깐 미간을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서부지검에서만? 아니면 이전에 부산 동부지청까지? 그 이전 중앙지검도?”

“일단 서부지검만.”

 

강새빛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휴, 오백만 검사한테 다 연락할 뻔했네. 다른 곳에 발령 간 사람들도 물어봐도 돼? 보안은 어느 정도로 할까.”

“내가 드러나면 안 돼. 그러니 나랑 친한 너도 조심히 움직여야 하고. 가능한 이프로스 외의 수단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연락해. 나중엔 일부러 정보를 흘릴 생각이지만 지금은 아냐.”

“알겠어. 기한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평소 뻔뻔한 시현답지 않게 조금 망설였다.

 

“가능하다면 내일까지. ……늦어도 모레.”

 

잠시 침묵한 강새빛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탄식했다. 

 

 

 

 

퇴근 후 저녁 9시, 시현은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어느 산속에 있는 별장 앞에 차를 세웠다. 주변에 이 별장 외엔 아무것도 없는 데다 길이 험해 누가 뒤를 밟는다면 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미행당하는 게 뻔히 보이는 곳이다. 산으로 들어오는 길마다 출입을 촬영하는 장비가 깔린 사유지라 누군가가 쉽게 들어올 수도 없다. 실질적인 소유주는 제 할아버지지만 아무 연관 없는 제 3자의 명의로 등기된 땅이다.

운전석에서 내리자 몸에 닿는 찬 공기에 몸을 떨었다. 자연스레 제 연인이 떠올라 의식적으로 뇌리에서 지웠다. 별장의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무척 따뜻했다. 자신이 추위를 잘 타는 걸 아는 사람들만 있으니 당연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현관 근처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을 입고 체격 좋은 60대의 남자가 고개를 숙여왔다. 할아버지의 수족이었다. 어렸을 때야 아저씨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장 실장이라고 부른다.

 

“안쪽?”

 

시현의 건방지게 짧은 말에도 그는 표정 변화 없이 몸을 돌려 별장 안쪽으로 시현을 안내했다. 1층 안쪽의 넓은 방, 넓은 탁자 뒤쪽으로 할아버지, 최연흠 회장이 앉아 있었다. 90대지만 그 나이대로는 보이지 않게 정정하다.

 

“노구를 꽤 자주 부르는구나.”

“이용할 건 다 이용해야죠.”

 

장 실장이 시현의 뒤에서 코트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시현은 코트를 벗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바로 뒤를 따라온 중년의 여성이 쟁반에 컵을 올려 들어와 시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김이 올라오는 율무차였다. 아직도 내가 애새끼인 줄 아나. 컵을 내려다본 시현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는다. 실제로 애새끼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짓거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이들에게 시현은 본가에서 나갈 때, 그 8살 때의 최시현으로 멈춰 있었다.

중년 여성과 장 실장이 함께 나가려 하자 시현이 제지했다.

 

“장 실장은 나갈 필요 없습니다.”

 

장 실장이 허락을 구하듯 최 회장을 바라보았고, 최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문 옆에 섰다.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았으나 기척으로 느낀 시현이 최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는 채로 입을 열었다.

 

“피차 시간 없으니 본론만 빠르게 말하죠. 거래합시다. 냄새를 잘 맡는 개를 원합니다. 기간은 한 달.”

 

시현의 서늘한 표정과 말투에도 최 회장은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시현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어떤 개? 마약 훈련을 받은 개는 마약 냄새를 잘 맡을 것이고, 구조 훈련을 받은 개는 사람 냄새를 잘 맡을 것인데.”

“할 일이 많습니다. 뭐든 잘하는 똑똑한 개면 좋겠습니다.”

 

최 회장이 껄껄 웃었다. 시현이 장 실장을 내보내지 않았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던 거라 대답은 바로 나왔다.

 

“그래. 장 실장을 빌려주마. 그럼 시현아, 너는 뭘 내줄 거냐.”

“작은아버지께 힘을 실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최 회장이 또 웃는다.

 

“시현아. 지금 네 천칭이 수평인지 봐라.”

 

시현이 아랫입술을 잠깐 깨물었다가 노려보듯 시선을 맞췄다.

 

“원하는 걸 말씀하십시오.”

 

최 회장이 제 앞에 놓인 쌍화차를 여유 있는 몸짓으로 한 모금 마셨다. 만남을 먼저 청한 시점에서 시현이 을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시현이 네 호흡을 한 후에야 최 회장이 입을 열었다.

 

“네가 힘을 실어줘도 둘째가 질 경우, 대신 네가 해. 나도 이 정도 보험은 들어둬야겠다.”

 

시현은 딱히 검사라는 직업에 큰 애정은 없었으나 그런 식으로 그만두는 건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아버지가 지지만 않으면 문제없어질 일이다. 정 안 되면 큰아버지를 어떤 식으로든 죽이면 될 일이고. 짧게 생각해 결론을 내리곤 곧장 몸을 일으켰다.

 

“장 실장, 따라 나오세요.”

 

그리곤 인사도 없이 방 밖으로 걸어 나간다. 등 뒤로 최 회장의 웃음소리가, 장 실장의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다른 방으로 들어간 시현이 탁자 앞에 앉자 장 실장이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시현이 높낮이 없는 어조로 툭 내뱉었다.

 

“서울청 이재희 공공안전차장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출생부터 현재까지. 사흘 내.”

 

장 실장이 잠깐 고민하는 듯 하다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시현의 시선이 순간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조용팔 씨를 조사한 내용입니다. 이걸 보시면 이재희 차장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아실 수 있습니다.”

 

순간 뒷목을 저릿하게 하는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에 두 호흡을 써야 했다. 당연히 뒷조사했을 거다. 자신이 할아버지 입장이었어도 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진 말아야지. 그리고 자신이 이걸 볼 거라 여기는 것도 화가 났다.

 

“그렇다면 기간을 단축할 수 있겠습니다. 이틀. 대략적인 정보 말고 자세한 정보를 물어오십시오. 그리고 이거, 없애세요.”

 

싸늘한 어조에 장 실장이 사죄하듯 말없이 고개를 숙이곤 USB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부쉈다. 그것을 보고 시현은 분노를 가라앉히려 다시 호흡했다. 어딘가에 백업본이 있을 게 확실했지만 모든 데이터를 지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명령만을 듣는 개였다. 없애도 되는 사본이었고, 시현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한 퍼포먼스라는 것을 피차 뻔히 알았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다 보이게끔 행동하는 게 화가 났다. 이래서 친가와 엮이기 싫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뿐이어서, 그 행동들이 다 이해가 돼서.

더 있다간 화를 터뜨릴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꼭 필요한 연락만 하십시오.”

 

시현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씹어 내뱉듯 말하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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