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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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말 by 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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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님 커미션입니다. (27,000자)


줄기차게 울어대는 이른 매미 소리에도 그토록 사랑하는 이의 음성은 어찌나 잘 들려오던지. 이별에 익숙한 줄 알았던 제 손끝이 떨려오는 걸 살그머니 감춘 S는 이유를 물을 수조차 없었다. A가 곤란하다면 그저 감정을 누르고 그의 안녕과 행복을 빌어줄 수밖에.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기뻤어요.”

살짝 떨리는 음성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 건, 눈에 고인 눈물 탓일까.

그렇게 봄이 온다

“형수님, 형수님!”

“이렇게 가시는 게 어딨습니까? 보스하고 말씀 한 번만 나눠보세요, 제발. 예?”

“보스도 제발 무슨 말씀이라도 해보십시오. 정말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캐리어를 들고 현관에 선 S의 모습에 A보다 난리인 건 그의 조직원들이었다. A는 그들의 한 발자국 뒤에서 그저 표정을 지운 채 S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서로 무척 닮아있다고 생각한 눈과 그토록 사랑스러운 입가의 점까지. 그는 연기처럼 흩어질 무용한 인사 대신 그녀의 얼굴을 하나하나 제 기억 속에 새겨넣었다. 매달리는 조직원들에게 미안하다며 난감한 듯 웃는 그 찡그린 미소조차 가져갈 셈이었다. 문득 제게로 향하는 시선에도 A는 흔들림 없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미 각오한바, 쉽게 무너질 마음이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지.

“잘 있어요, A씨.”

그토록 마음을 다잡았건만, 그 한 마디에 그만 발밑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영영 무채색이던 세상에 찾아들었던 찬란한 색감이 사라져가는 걸 바라보며 A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S가 떠난 뒤 할아버지와 마주앉은 A는 격자무늬가 빼곡한 바둑판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막 바둑판 위에 백색 돌 하나를 올려놓던 G가 A의 지친 눈빛에 깊은숨을 토해냈다.

“S는 강한 아이다.”

“…알고 있습니다.”

G가 깊이 침음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손주를 다독이긴 했지만, 이미 S의 존재는 이 집안사람 모두에게 특별했다. S를 피신시켜야겠다는 의견 역시 G의 것이었다. 멀리 떠나면 지킬 수 없으니 구태여 근처의 오피스텔을 내어준 것도 그 탓이었다. 언제까지고 손이 닿는 곳에서 사태가 진정 될 때까지 지켜줄 셈이었다. 조직원을 풀어 그 일대는 언제나 철저히 감시하고 있으니 마음을 못 놓을 것도 없었다.

S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고요히 숨죽인 채 집안에 칩거하는 날이 늘었고 A는 그녀를 만나기 전처럼 그저 일에만 전념했다. 마치 생기를 잃은 것처럼 목적만을 위해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G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원한 밤이란 건 없다, A. 새벽이 깊어지는 건, 태양이 곧 떠오른다는 징조란다.”

흑돌을 쥔 A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했다. 탁. 대답 없이 자그마한 바둑돌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렇게 가족에게조차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젊은 보스의 모습에 조직원들은 정말 그가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오히려 저희가 더 그녀를 걱정하는 것 같다며 푸념을 늘어놨다. 얼마간은 A에게 직접 S의 일상에 관해 보고서를 올린다거나 구두로 전달하는 등 그녀의 안위를 전달했지만, 그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다음 안건.”하고 넘길 뿐이었다. 자연스레 S에 관한 보고 횟수는 줄어들고 외출을 일절 삼가는 그녀의 행동반경 탓에 감시자들 역시 나태해지고 있었다.

A의 무정한 반응에 A 가家의 젊은 보스와 그의 연인이 헤어졌다는 소식이 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어디든 말 옮기기 좋아하는 이는 존재했고 A는 제 의도대로 굴러가는 상황을 관전하면서도 그리 유쾌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보스.”

R의 음성에 A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가느다랗게 쭉 찢어진 눈가는 요 며칠 잠을 설치고도 벼려낸 날처럼 매섭게 번득였다.

“스미하라와 우메타가 결탁했습니다. 코마츠가와는 먼저 보낸 선발대에 항복했으니 연합 조직을 우선 해결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군.”

A는 천장을 바라본 채 고요히 대답했다. 주머니 속에서 나오지 않는 손은 그날 이후 손가락에서 빼버린 반지를 어루만지는 채였다. 마치 반지가 S라도 되는 양,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반지의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손끝으로 덧그렸다.

“저… 그런데, 보스.”

R가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한동안 전달받지 못한 S의 소식이 그에게 막 도착한 참이었다. A에게 말해봐야 영 시원찮은 반응만 돌아오니, 그녀가 걱정된 조직의 식구들은 이제 그의 오른팔을 통해서라도 S의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한동안 똑같은 내용만 전달되었는데 이번만은 조금 달랐다. 예전부터 호시탐탐 A를 칠 기회를 노리던 스미하라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말에 R는 께름칙한 상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최근 S씨가 머물고 있는 자택 근처에 이상한 놈들이 어슬렁거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상한 놈들?”

“혹시 몰라 뒷조사를 시켰는데…. 스미하라 놈들이라고 합니다.”

R의 불길한 예감은 A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그가 의자에 걸쳐둔 윗옷을 잡아챘다.

“차 대기 시켜.”

희번득이는 눈으로 걷는 A의 걸음이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R의 손짓 한 번에 복도에 서 있던 이들이 우르르 달려나가 A의 출정 준비를 서둘렀다.

“어디로 모실까요?”

백미러를 통해 차에 오른 보스의 눈치를 살피던 조직원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동안 본 적 없던 살벌한 기운에 그만 핸들을 쥔 손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스미하라로 간다.”

*

쿠당탕!

요란하게 넘어가는 의자와 함께 스미하라의 보스가 뒤로 나뒹굴었다. 이미 피떡이 된 얼굴로 정신을 못 차리는 그의 머리채를 꽉 그러쥔 A 역시 이리저리 터지고 찢어져 피투성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스미하라의 얼굴로 다시 한 번 주먹을 내리꽂았다.

A의 손에 묻어나는 피는 이제 누구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제 보스의 모습에 스미하라의 조직원들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이미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장소에는 A의 조직원들이 그들을 제압한 뒤였다.

“우리 구역에 발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낮게 으르렁대는 소리에 스미하라가 터진 입가를 혀로 훑었다.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큭…크흣. 크큭…. 그 계집 때문이냐?”

A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스미하라는 정곡을 찌른 제 촉에 기뻤는지 피를 줄줄 흐르는 입으로 게걸스레 웃어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메타는 못 봤나 보지? 큭큭….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군.”

스미하라의 말에 A의 얼굴 근육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스미하라와 결탁했다더 우메타.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던 A의 눈에 S의 집 주변을 지키고 있다던 조직원의 얼굴이 들어온 순간, 스미하라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A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려는 듯 바르작거리는 스미하라를 구둣발로 걷어차자, ‘뻐억!’ 턱뼈 돌아가는 소리가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보스의 모습에 스미하라 가는 물론, A 산하의 조직원들의 어깨까지 움츠러들었다.

“R, 처리해.”

“예, 보스.”

R에게 뒷일을 맡긴 A가 검지를 까딱여 K를 부르자, 그가 잽싸게 보스의 곁으로 다가섰다. 흐르는 피를 대충 손으로 훑어 닦아낸 그가 “그곳으로 간다.” 작게 속삭이자, K는 주변을 살핀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A가 말하는 ‘그곳’은 단 한 곳일 게 뻔했다. K 역시 S의 안위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거칠게 타이어를 태워가며 차를 몬 K는 제 보스가 오피스텔로 들어서는 동안 함께 데려 온 몇몇 조직원에게 주변을 샅샅이 살피라 일렀다.

‘양동작전이었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워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S가 머무는 곳까지 단숨에 오른 A가 잇새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숨을 쉴 때마다 뻐근하게 아려오는 건 갈비뼈가 아닌 보다 그 깊은 곳의 어딘가였다. 중력이 잡아끄는 듯 온몸이 무거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S의 안전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제발…. 제발, S.’

쾅! 쾅!

초인종을 누르고 작게 두드려봐도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부수고 들어서자 익숙한 향이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방심하고 있던 A는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S의 체취에 그만 현관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한 번 풀려버린 긴장에 스미하라에게 당한 상처로 머리가 텅텅 울리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생각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려가며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선 A는 그저 고요한 S의 방을 보고 의아할 따름이었다.

‘물건은 모두 그대로군. …누군가 뒤지거나 반항한 흔적도 없어.’

마치 애초에 이곳에 없던 사람처럼.

멍하니 S의 방을 탐색하던 그때, 저 아래층에서 K가 큰 소리로 A를 불렀다. 창문으로 흘끗 내려다보니 우메타 일가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붙잡은 K가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놈들, 이제 막 도착했대요. 멍청하게 스미하라 쪽하고 소통이 잘 안 된 모양이에요. 다행히 시간에 맞춰 온 것 같은데…. 안에 형수님은 계셨어요?”

한시름 덜었는지 밝은 목소리로 묻는 K를 향해 A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비어있어.”

“예?”

“끌려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일단 돌아가지. 상황 정리한 뒤에 R와 함께 내 사무실로 오도록 해.”

“…예, 보스.”

상황을 정리한 뒤 사무실로 돌아온 A는 피범벅이 된 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이리저리 터진 상처에 거즈를 올렸다. 숨을 크게 쉴 때마다 고통이 엄습했다. 억눌린 신음을 내는 그의 뒤로 K와 R가 걱정을 덕지덕지 단 눈길로 사무실에 들어섰다.

“보스, 괜찮으십니까?”

“우선 치R 먼저 받으세요. 그러다 보스까지 쓰러지면….”

“난 괜찮다. 너희 둘은 S의 행방을 찾아봐. 조직원들한테 알리지 말고 둘이서만.”

피를 무겁게 머금은 거즈를 바닥에 던져버린 그가 쾅 소리나게 책상을 짚었다. 그의 힘으로 책상 위의 펜이나 컵 따위가 덜그럭거리며 몸을 떨었다. 분노와 걱정으로 들썩이는 그의 성난 등을 바라보며 K와 R의 기분 역시 바닥으로 무겁게 침잠할 뿐이었다.

“스미하라와 우메타 뿐만이 아닐 수 있어. 코마츠가와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해.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국…. 그래, 한국으로 돌아갔을지 모르니 그쪽도 조사하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휘청이는 제 몸을 서둘러 부축한 두 사람이 급하게 조직원을 부르는 외침을 들으며 A의 눈앞이 흐려졌다. 어두워져 가는 시야 속에서 S의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그렇게 S의 모습을 환상처럼 좇은 게 무색하게 거리 가득 우거져있던 녹음은 어느덧 옷을 갈아입고 가을을 맞이했다. S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고 A의 모습은 날을 거듭할수록 초췌해져 보고 있는 사람이 더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보스, S씨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분 헤어지는 거 말릴 걸 그랬다고요.”

“K. 그만해.”

“이렇게 힘들어하실 거면 왜 헤어지신 거예요, 대체.”

R의 만류에도 K는 꿋꿋했다. 누구보다 S와 A를 좋아했으니 그에게도 재난과 같은 일이었다. 존경하는 A가 무너져내리는 게 무엇보다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둘을 헤어지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는 그의 말에 차마 R도 반박할 수 없었다.

거뭇거뭇하게 눈 아래가 짙어진 A는 부하들의 걱정어린 힐난에도 묵묵부답이었다. S의 묘연해진 행방은 조직원들에게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날을 더할수록 예민하고 살벌해지는 A의 모습에 그 누구도 쉽게 다가설 수 없었다. S를 만나기 전에도 언제나 남다른 아우라가 있어 다가서기 어려운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흉포한 맹수와 다를 바 없이 변한 보스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는 집에 돌아가는 대신 그저 사무실에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일에만 몰두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과 흐트러진 머리로 그저 기계처럼 주어진 업무를 반복해 수행할 뿐이었다. 종종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찰나에 모두가 아는 A로 돌아올 뿐, 다시금 제 철옹성에 틀어박힌 그는 목을 옥죄는 넥타이도 모두 풀어헤친 채 그저 살아있는 시체처럼 움직였다.

종종 K와 R가 S의 정보를 얻어 올 때면 그는 반짝 생기가 도는 눈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내내 허탕만 쳤어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변기를 끌어안고도 더는 게워낼 게 없어 어느새 노란 위액을 토해내거나, 몸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수액을 느끼면서도 그는 쉴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틈이 생기면 머릿속으로 S의 생각이 흘러들어와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극한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그의 앞에 S의 환상이 나타나 지독한 아드레날린을 줬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몇 번째의 입원을 마치고 밖으로 걸어나온 A는 불현듯 불어오는 찬 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S의 생각으로 보낸 날들이 거리에 떨어진 무수히 많은 낙엽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

“잘 있어요, A씨.”

S는 저를 바라보는 무감한 눈길에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을 벗어나면 곧장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아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고 참아냈다. 여기서 운다면 A를 곤란하게 할 테니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전날, 이별 소식을 들었다던 G의 연락을 받고 S는 끌어안고 앉아있던 발끝을 오므렸다. 그날 A는 별채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가, 네가 불편하지만 않다면 내 오피스텔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니?]

“아….”

S는 잠시 답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조직의 약점이란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의 조건 없는 애정에 기대어 살았던 기간이 오래된 영화의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G에게 들키지 않으려 뜸을 들인 뒤, 언제나처럼 크게 고저 없는 음성으로 그의 호의에 답했다.

“그럴게요, 할아버지.”

[그래. 잘 생각했다. 갈 곳도 마땅치 않은데 그곳이 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있거라.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얘기하고.]

“아니에요. 이렇게 뒤를 봐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 걸요.”

그리 많지 않은 짐을 챙기던 S의 시선이 문득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닿았다. 몸에 닿는 건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이 반지만은 예외였다. 닳고 닳을 때까지 어루만져 이제는 제 몸처럼 느껴지는 그 반지. S는 조심스럽게 제 약지에서 빼낸 반지를 케이스 안에 넣고 쏟아져 내리는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허전해진 손가락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그토록 보고 싶던 A는 다음날 현관을 나서는 순간까지 S에게 그 어떤 말 한마디 없었다.

G의 배려로 미리 준비된 오피스텔은 S의 취향에 알맞았다. 향 좋은 잎차와 찻잔 같은 것들을 미리 구비해둔 그의 마음씨에 그나마 작게 미소가 나왔다.

따끈한 차를 우려 온전히 혼자 지내게 된 오피스텔에 앉아 차를 머금고 있던 S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급히 손등으로 훑어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멎지 않았다. 이별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와의 이별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가슴이 터져버리면 좋으련만, 소리 내서 우는 법도 잊은 어른은 그저 텅 빈 오피스텔에서 홀로 울음을 삼켜낼 뿐이었다.

이제 A와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S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곳을 떠나면 그걸로 A와의 연결고리가 모두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다. 차라리 이곳에서 지내며 A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위안 삼아 살아갈 생각이었지만, S는 그 생각마저 잘못된 것임을 머지않아 깨달았다.

“또 만나네요.”

“형수님, 안녕하십니까! …앗.”

오피스텔 주변을 지키고 있는 조직원들은 숨는다고 숨었지만, 종종 눈을 마주치기도 해서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허리를 꾸벅 숙이곤 아차 싶어 황급히 도망치고는 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긴 했지만, A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 A씨에게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축복해줄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 이토록 숨이 막히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에게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항상 침착하고 사리분별이 뛰어난 S라도 A 앞에서는 그 모든 게 무용할 따름이었다. 사랑보다 앞선 단어가 A였다. 그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희미한 불안이 자라난다.

영영 이곳에 머문다면 언젠가 마주 해야 할지 모를 두려운 미래에 마음이 불안했다. 차라리 이곳을 떠나 새롭게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집 주변을 지키고 있는 조직원들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 행방을 아는 조직원이 남아있게 된다면, 결국 다시 A 가문에 폐를 끼치게 될 테니.

되도록 몰래 집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던 S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칩거하던 터라 감시가 소홀해져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별안간 호출을 받고 급히 달려가는 조직원들의 모습에 S는 서둘러 최소한의 짐을 꾸렸다.

택시를 타고 누군가 볼세라 좌석 아래로 최대한 몸을 낮춘 S는 그 곁을 스치는 검은 세단을 보지 못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오피스텔로 향하는 남자를.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의 물음에 S가 두 눈을 깜박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목적지마저 없는 제 모습에 자조했다. 그녀에게 돌아올 곳은 언제나 A의 곁이었으니까.

“…최대한 멀리 가주세요.”

*

황혼을 바라보는 노하라 부부가 운영하는 근교의 찻집은 아는 사람만 아는 맛 좋은 곳이었는데 최근 새로운 단골이 한 명 늘었다. 아침 일찍 문을 열면 찾아와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젊은 아가씨였다. 항상 조용한 그녀는 색이 옅은 수채화 같은 인상으로 가끔 노부부를 향해 “차가 향이 좋아요.”하고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무척 다정해 보여 인상 깊었다.

다만, 주인 내외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슬픔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엇이 그녀를 이 먼 근교까지 떠밀어 홀로 슬픔에 잠기게 하는지.

“어서 와요, 아가씨.”

푸근한 인상의 안주인인 하루코의 따스한 인사에 S가 슬며시 고개를 주억이곤 미소 지었다. 점심 무렵부터는 붐빈다지만, 보통 이른 아침에 방문하는 S는 정오 무렵까지 혼자 가게에 앉아있기 일쑤였는데 이날은 드물게도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바쁘시네요?”

“으응. 어느 손님이 다녀온 후기를 남기겠다고 사진을 잔뜩 찍어갔는데 그 이후로 손님이 부쩍 늘고 있어요.”

하루코와 잠시 담소를 나누던 S는 순간 컵이 깨지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뒤돌았다. 하루코의 남편인 지로가 차를 내오던 중 그만 발을 헛디뎠는지 깨진 잔에서 흘러넘친 찻물로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들어 가는 게 보였다.

웅성웅성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손님들 사이에서 S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는 S의 모습에 노하라 부부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녀를 만류했지만, S는 개의치 않고 깨진 잔마저 깔끔하게 정리해냈다.

“향이 좋네요. 우롱차 맞죠?”

생긋 웃으며 차 종류까지 짚어내는 그녀의 모습에 그만 노하라 부부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노하라 부부와 S의 대화가 깊어지고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그들은 그녀의 이름이 S라는 것과 한국에서 왔다는 것, 홀로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됐다. 꺼져있는 휴대폰을 남몰래 들여다보는 일이 잦고 종종 슬픈 표정을 짓는 S를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던 그들은 어느 날 넌지시 이곳에서 일해줄 것을 제안해왔다.

“일이 많이 바빠졌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늙어서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S가 도와주면 고마울 텐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일해볼 생각이 없니?”

눈을 동그랗게 뜬 S의 손을 꼭 쥐어오는 하루코의 주름진 손은 퍽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S, 너만 괜찮으면 게스트하우스도 나와서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면 어떨까?”

“…제가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이 찻집 바로 뒤야. 출퇴근하기에도 아주 좋지?”

지로가 내온 따뜻한 찻잔을 꼭 쥔 S가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건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코는 그런 S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이제 얼굴도 희미한 과거의 잔상을 그렸다.

“우린 옛날에 딸아이를 잃었단다.”

“…따님을요?”

“사고였어. 누구나 겪고 싶지 않은 그런 사고. …살아있다면 딱 S 너와 비슷한 또래였을 거야. 그러니 내 딸 같은 아이가 홀로 힘들어하는데 혼자 두고 싶지가 않더구나. 네가 부담스럽다면 거절해도 괜찮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우리에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할 건 없어. 알겠니?”

제 생각을 모두 들킨 것 같아 S가 테이블 아래서 손을 꼭 말아쥐었다. 언젠가 흘리듯 제 가족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 혼자 남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노하라 부부에게 저와 같은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던지라 S는 내내 그들이 마음에 밟혔다.

남겨진 자의 상실감을 이해한다는 건 진정 남겨졌던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S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마음씨 좋은 주인 내외는 주름진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S에게 넉넉히 돈까지 얹어주는 그들은 “딸아이한테 용돈도 못 주면 부모가 아니지.”하고 한사코 월급을 명목으로 용돈을 쥐여줬다.

그렇게 가을의 문턱에서 시작된 인연은 겨울을 알리는 세찬 바람이 불어올 무렵까지 이어졌다. 겨울의 밤은 무척 길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났을 뿐인데 노랗게 물드는 하늘을 보고 S가 빈 가게를 둘러봤다. 노부부의 운영 철칙에 맞게 찻집은 항상 3시에는 문을 닫았기에 S는 제법 넉넉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제가 정리할 테니까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정리할 것도 없는데 같이 들어가지, 왜.”

“아니에요. 추워지기 전에 들어가 계세요.”

S의 배려에 푸근하게 웃은 노하라 부부는 곧 집에서 보자는 인사와 함께 찻집을 나섰다. 정리에 박차를 가하려 소매를 걷어붙인 S는 뒤에서 들려오는 차임벨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렸다.

“놓고 가신 거 있으세요?”

당연히 주인 내외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이런 곳에 있었던 거야? S.”

“…E씨.”

S의 말에 E가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여전히 정 없게 부르기는. 오빠라고 부르래도 그러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어떻게 알고….”

E의 눈이 작지만 아늑한 찻집을 훑었다. 회색빛 사무실에서 망가져 가는 A를 떠올린 그가 작게 한숨을 토해냈다.

부모님으로부터 그동안의 패권 다툼으로 S가 떠났다는 것과 그로 인해 A가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귀국을 결심했다. R와 K의 안내로 도착한 곳에서 A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 제 형을 반겼다. 팔뚝이며 손등 가득 링거를 맞느라 피멍과 작은 바늘구멍이 가득한 채로.

이렇게 망가져 버린 A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미 일본 전역을 수색하는 것쯤이야 A가 해봤을 테니 똑같은 짓을 하는 건 옳지 않았다. E는 반대로 집안의 구역을 안쪽에서부터 바깥으로 수색해 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흔적을 모두 지운 채 증발한 사람을 찾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E 역시 지쳐 포기할 마음이 들 무렵, 근교의 작은 찻집에 관한 소문이 들려왔다. 찻집보다는 그곳에 새로 왔다는 직원의 이야기가. 어디서 왔는지, 뭘 하는지 모르는 여자가 주인 내외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찻집 일을 돕는다는 이야기는 E의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모 아니면 도.

겨울을 알리는 바람과 함께 찾아든 E는 방긋 웃으며 “난 원래 모르는 게 없잖아.”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S는 더 캐묻는 대신 그가 좋아하던 차를 내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향긋한 찻잔을 쥔 그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미소 짓는 S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잘 지냈어요?”

“글쎄. 나는 잘 지냈지.”

“언제 일본으로 온 거예요? 얼마 만에 온 거였죠? 날이 추워서 비행기가 잘 떴나 모르겠네요. 저번에는 남미에 계셨죠? 거긴 따뜻했을 텐데 여긴 추워서 적응하기 어렵겠어요.”

평소와 다르게 들뜬 S가 재잘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들어주던 E가 가만히 찻잔을 어루만졌다. 언제나 떠드는 건 제 몫이고 가만히 들어주던 건 S였는데, 지금 이토록 반전된 상황에 그간 S가 느꼈을 외로움이 전해져 E는 그만 가슴 한 켠이 쓰렸다.

“숨넘어가겠어, S. 으음. 일단 온 지는 2주 됐나? 춥긴 한데, 더운 것보다 나은 것 같아.”

“아무래도 더우면 힘드니까요.”

“하하.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이렇게 빨리 돌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우리 Y씨가 요즘 걱정이 많더라고.”

E는 쓴 입안을 차로 헹궈냈다.

“…그런 모습 처음 봤어.”

제 몫의 찻잔으로 손을 옮기던 S가 흠칫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머리에 오직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반년이 지나도록 눈을 감아도 떠도 그려지는 그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시선에도 E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S, 나한테 빚진 거 있지?”

개구지게 웃는 E의 얼굴에 S는 언젠가의 약속을 떠올렸다. E의 도움을 받았던 그날 언젠가 자신이 어려운 일에 처하면 도와달라던 그 장난스러운 말에 S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E는 그 다정한 마음을 이용할 속셈은 아니었지만, 다 죽어가는 제 동생의 모습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어 오랜만에 형 노릇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진짜 그러다 죽을 것 같아서 그래.”

곤란한 듯 웃는 E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내 동생 한 번만 살려주라, S쨩.”

3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에 E는 다 식은 차를 한 번에 들이켜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생각이 많아진 S의 머리에 E의 손이 툭 올라왔다. 예전처럼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강요할 생각은 없어. 오히려 S가 더 곤란할 테니까. …그렇지만 혹시라도 아직 A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면 재고해줘.”

“그렇지만….”

“어어?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하지 말고 A한테 할 것!”

장난스럽게 으름장을 놓은 E가 씩 웃었다. 예전과 같은 미소에 S는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은 좀 놓이네. 오빠 간다.”

홀로 꿋꿋하게 오빠라고 칭하는 E가 가게의 명함 한 장을 챙겨서 떠나는 모습에 S는 작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A의 소식을 전해 들은 것만으로 심장이 경주하듯 내달렸다. 요란하게 뛰는 가슴을 붙잡고 카운터 아래로 주저앉은 S는 저로 인해 망가져 간다는 A를 떠올리고 얼굴을 붉혔다. 걱정만큼이나 그가 그리웠다.

*

“A, 네 얼굴 좀 봐. 야수가 따로 없다, 정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동틀 무렵에 집에 들어선 A는 익숙한 음성에 넥타이 풀던 손을 멈췄다. 드레스룸의 문을 등지고 선 E가 제 동생의 흉악해진 인상에 무섭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E의 장난을 받아줄 기운도 정신도 없는 A가 그를 무시하자, E는 그럴 줄 알았다며 어깨를 한 번 털고 말았다.

“S 말인데.”

콰앙!

E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A는 쥐고 있던 옷걸이를 부술 듯 내던졌다. 산산이 조각난 채 제 옆에서 나뒹구는 옷걸이의 파편을 흘끗 내려다본 E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잘 지내는 것 같더라.”하고 말을 이었다.

순간 어깨의 힘이 축 빠졌던 A가 E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제 형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손끝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렸다.

“…만났어?”

“그래.”

“어디서…. 아니, 아니야. 다친 곳은 없어 보여? 아파 보이거나…. 많이 고생했을 것 같은데, 잘…. 잘 지내는 것 같아?”

“어깨 부러지겠다, A.”

피식 웃은 E가 A의 손을 떨쳐냈다. 언제나 강인하던 제 동생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는 걸 본 그가 제 머리를 벅벅 긁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품에서 꺼낸 명함 한 장을 A의 손에 들려준 그가 “다녀와. 네가 직접.” 내뱉고는 드레스룸을 나섰다.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의 가벼운 종이 한 장.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찻집의 이름과 주소를 보고 A가 입술을 짓씹었다. 살면서 무언가를 후회해본 적 없는 인생이었다. 언제든 선택과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A는 후회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S로 인해 그의 세상이 한층 더 넓어졌다. 후회의 쓴맛이 이리도 독한 줄 몰랐다. 지킬 수 없다면 강해지면 될 뿐이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 왜 도망치게 했을까.

명함을 소중히 품에 넣은 A는 그 길로 홀로 차를 몰았다.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한 거리인데 마치 S를 보지 못한 날만큼이나 길게만 느껴졌다. 이른 새벽의 도로는 막히는 일 없이 A를 위해 뻥 뚫려 있었다. 기분 좋은 겨울의 찬 바람을 맞으며 도착한 그곳에서, A는 그저 가만히 찻집을 응시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등지고 불 꺼진 찻집을 바라보던 A의 동공이 커다랗게 열렸다가 순식간에 크기를 줄였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는 그녀였다. 조금 야위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제 유일한 사랑. 처음 느껴보는 울렁이는 감정에 숨을 크게 몰아쉰 A는 비로소 제가 온전히 호흡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S가 집을 떠나던 그날부터 이미 제 인생은 제 것이 아니었음을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

이쪽으로 향한 것 같은 S의 시선에 A는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황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슬그머니 고개만 내밀어 S의 동향을 살피던 A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하늘하늘 공중을 부유하다 살포시 떨어져 녹아내리는 차가운 감촉에 A가 몸을 움찔 떨었다. 손을 내밀어 그 눈송이를 받아들고 옅게 웃는 S의 그 미소에 A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올해 첫눈을 그녀와 볼 수 있다니, 운이 좋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오직 S 앞에서만 나오는 제 이런 모습에 A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 동안 허공에 흩날리는 눈발을 구경하던 S의 뒤로 인상 좋은 노부부가 다가오는 걸 마지막으로 A는 차에 올랐다. 그래도 그녀 곁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인 것 같아 안심이라며, 그는 액셀을 밟아 서둘러 그 장소를 벗어났다.

“무슨 일 있니?”

“…아뇨. 방금 저기에 누가 있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

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S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착각했나 봐요.”

그가 이곳에 올 리 없는데.

“추우니까 어서 들어가세요.”

*

요즘 조직 내에 보스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안절부절 사무실 안을 불안한 듯 배회하거나, 본인이 밤잠 설쳐가며 일에만 몰두한 탓에 처리할 게 없는데도 일을 만들어서라도 오라며 성화인 탓에 모두 입을 모아 힘들다고 투정이었다. 일이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그 길로 차를 끌고 사라지지를 않나, 따라나서는 조직원들을 굳이 물려가면서 외출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나름대로 부쩍 외무에 신경을 쓰는 A를 보며 E만 웃음을 삼켰다. 분명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저희끼리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조직원들만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 S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매번 새롭게 떨렸다. 핸들을 쥔 손이 답지 않게 리듬을 탄다거나, 괜히 백미러에 비치는 머리를 매만지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A의 마음을 흔들어놨다. 애석하게도 S의 앞에 당당히 나서지는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제 입으로 이별을 고하고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퍼 보이던 S의 눈빛을 봐버렸다. 제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S에게 말도 안 되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다는 사실이 그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그저 조금만 더 마음의 준비가 되면 그녀 앞에 나서겠다는 변명을 하며 A는 요 며칠 동안 멀리서 S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가, 너라도 들어가라니까.”

“아니에요. 안에서 언 것 같은데…. 차라리 제가 열어볼게요.”

“아유. 다친대도!”

웬일로 소란스러운 찻집 앞의 풍경에 A가 그들의 동향을 살폈다.

쉬는 날이었는지 양손 가득 장을 보고 온 세 사람은 한파에 얼어버린 문 앞에서 곤란해하는 참인 듯했다. 한사코 먼저 들어가라는 노하라 부부의 만류에도 S는 단호히 고개를 젓고는 오히려 씩씩하게 문고리를 잡고 씨름 중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점점 빨갛게 얼어가는 손을 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주인 내외와 S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문고리를 힘껏 잡아돌리자 빠지직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꼼짝도 않던 문이 활짝 열려 가족을 맞이했다.

깜짝 놀란 눈으로 손의 주인을 살핀 노하라 부부는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경탄했지만, 그 손의 주인을 마주한 S는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날 마음은 없었지만, 인생은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차마 S를 먼저 바라볼 용기가 없어 그녀의 곁에 서있는 노부부와 눈을 맞추고 있던 A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채 저를 올려다보는 S와 눈이 마주쳤다. 허공에서 얽히는 시선에 S는 내내 참던 눈물을 결국 터진 둑처럼 쏟아내고 말았다.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에 당황한 A가 붙잡을 새도 없이 S는 당황한 노부부를 끌고 가게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쾅 닫히는 문이 마치 제게 향하는 마음 같아서 A는 옥죄는 가슴께를 꾹 쥘 수밖에 없었다.

“얘, 아가. 왜 그리 울어? 무슨 일이니? 아는 사이야?”

“흐윽…. 흡, 흑. 으흑….”

문을 등지고 주르륵 미끄러져 앉은 S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제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입을 틀어막았다. 문밖에서 이마를 대고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던 A는 아주 조금씩 새어나오는 S의 울음소리에 입술을 씹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기회에 그는 오늘도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뱉어내지 못한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오는 지로의 친절함에 어느 정도 진정한 S는 두 사람에게 그간 숨겨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냈다. 커다랗게 뭉친 이야기의 실타래가 꼬이지 않게끔 아주 조심스럽게 풀어내는 S의 이야기를 들은 노부부는 비로소 그 친절하고 잘생긴 남자가 S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S야.”

“…네.”

여전히 코를 훌쩍이는 S를 말없이 꼭 안아준 하루코는 눈물로 짓무른 S의 얼굴을 아주 소중하게 어루만져 닦아주었다.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을 먹자꾸나.”

그 다정한 한 마디에 S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저녁을 준비하러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S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듣던 대로 엉망이잖아….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노부부의 눈에는 멀끔하게 보였을지 몰라도 S만큼은 알 수 있었다.

‘헤어지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그럼 잘 지내기라도 해야지, 왜 본인이 엉망이어서…!’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S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이미 A가 돌아가고 없는 공간을 공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왜 원망도 못하게 만드는 건데….”

그토록 울었던 일이 거짓말 같은 정도로 그날 이후 A는 매일 같이 찻집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꽃다발, 어느 날은 고급 과자, 또 어느 날은 와인 따위의 비싼 선물이 늘어갔다. 노하라 부부는 저희에게도 전해지는 선물에 한사코 거절했지만, 필요 없다면 버리셔도 좋다는 으름장에 그만 선물을 안아 들고 곤란해했다.

“오늘도 S는 안 보고 가나요?”

“…예. 그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물만 불쑥 안긴 채 홀연히 사라지는 A의 모습에 노부부는 “이제 이런 선물은 안 가져와도 좋으니 S가 있는 시간에 찾아와 주지 않을래요?”하고 넌지시 물어왔다. 의외의 제안에 눈썹을 휙 치켜드는 그의 모습에 노부부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S가 쉬고 있을 집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가 이쯤 살아보니까 알겠어요.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충분하지 않았겠지.”

“…아.”

정곡을 찔린 A가 말을 얼버무리자, 그들은 다 안다는 듯 입을 가리고 웃었다.

“대화는 아주 중요해요. 그것도 사랑하는 사이에는 더더욱. 대화 하나로 없던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풀리기도 하거든.”

잠시 생각에 잠긴 A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준 상처를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두려워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마음을 열고 얘기해봐요. 당신이 아는 S라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열어줄 것 같은지.”

두 사람의 조언이 통했는지 다음날부터 A는 평소 찾아오던 시간이 아닌 S의 근무시간에 맞춰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직접 고른 화려한 꽃다발은 S의 취향에 맞춘 것이었다. S는 그에게로 시선이 향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지만, 어느샌가 그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날이면 서운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조금씩 제가 그어놓은 선을 허물고 다가오는 그를 내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원망보다 큰 사랑을 이겨낼 리 만무했다.

어느새 S의 곁까지 다가서는 것에 성공한 A는 문득 다른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누군가의 휴대폰에 시선이 닿았다. 최근, S를 다시 만나게 된 이후로 그녀에게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닿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충전하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S, 휴대폰이 꺼져 있더군.”

“아.”

은근슬쩍 나누는 대화가 늘었다. S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살짝 꾸벅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거리가 느껴지는 인사였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지는 거리에 A는 쓰린 마음을 달랬다.

그날 밤, 긴 충전 끝에 비로소 휴대폰의 전원을 켠 S는 쏟아지는 지난 연락들에 어쩔 줄 모르고 입을 틀어막았다. G, T, Y, R, K, E는 물론이고 그밖에 친하게 지냈던 조직원 모두가 그녀를 걱정하는 내용의 문자를 여러 통 남겨놓은 탓이었다.

[S씨, 괜찮은 건지 걱정됩니다.]

[형수님! 진짜 나가신 거 아니죠? 저희가 보스 혼내 드릴게요! 제발요…. 형수님 없는 집이 허전합니다. 돌아오세요.]

[S, 요즘 보스 상태가 말이 아니야. 말 한마디 못 붙이겠다니까? 어디에 있는 거야, 도대체.]

차고 넘치는 걱정의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는 사이 최근 연락 목록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액정 가득 들어찼다. 

A씨.

부재중 전화는 물론이고 수 십 통의 문자가 그의 마음을 대신해 날아와 눈처럼 소복이 쌓여있었다.

[날 보고 싶지 않겠지만 난 오늘 기뻤다. 조금 야위었더군. 밥을 더 잘 챙겨 먹는 게 좋겠다.]

[S, 날이 춥다. 옷 따뜻하게 입도록 해.]

[하루코씨가 맛 좋은 차를 내주셨다. 좋은 분이라 다행이군.]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그날을 떠올리고 네게 준 상처를 곱씹으면 미쳐버릴 것 같더군. …내가 미안하다, S.]

[보고 싶다.]

*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 평소 오던 시간보다 조금 늦은 A는 창문 안쪽에서 홀로 바삐 움직이는 S를 보고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주인 내외가 일이 있었는지 혼자 가게를 보는 모습이 낯설면서 새로웠다. 천천히 가게로 다가가던 A의 몸이 우뚝 멎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끝나고 한가하잖아. 평소에 바로 퇴근하는 거 자주 봤다고.”

“아뇨. 죄송하지만, 아직 일하는 중이어서요. 놔주실래요?”

“이름이 뭐야? 그것만 알려줘.”

차를 내주고 떠나려던 S의 손목을 움켜쥔 남자가 끈질기게 구애하는 모습에 A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남자의 손목을 비틀어쥐자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뭐야?”

“A씨!”

마치 서로에게 관계를 묶어주는 이름이 없던 시절과 같은 부름에 A의 손이 무뎌졌다. 그러나 그는 제 손안에서 바르작거리는 남자의 모습에 제가 자초한 일에 슬퍼할 시간은 없다는 사실에 이를 꽉 깨물었다.

“이거 안 놔!”

“내 뒤로 와.”

S를 제 등 뒤로 숨긴 A가 치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자 꾸욱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A의 손을 뿌리치려던 그가 되려 A의 힘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항했다. 그를 도우려던 주변의 남자들은 제 멍청한 친구의 손목을 틀어쥔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하얗게 질려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아… A?”

“뭐?”

“A 잖아!”

“이런, 미친…!”

쥐고 있던 손목을 내던지자, 남자들은 정신을 못 차리는 제 친구를 양쪽에서 들어 올린 뒤 허겁지겁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다고 연신 소리친 그들이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가는 걸 바라본 A가 서둘러 S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요. 저기, 그보다… 이거.”

조심스러운 그녀의 음성에 A는 그제야 자신이 S의 손을 여지껏 잡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미안하군. 정신이 없었어. 오늘은 이만….”

A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가게를 나서려 할 때, 제 옷자락을 쥐는 작은 힘에 우뚝 멈춰 섰다. 돌아본 곳에는 예전처럼 작게 미소 짓는 S가 있었다.

“차 한잔하고 가세요.”

김이 올라오는 차를 사이에 둔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그저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그 자체로 편하게 차를 마실 뿐이었다.

A가 차를 머금고 넘기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을 끌어보려는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S가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제 꼼짝없이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A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그런 A를 바라보는 S의 눈길이 따스했다.

“…이만 돌아가지.”

“저.”

S의 단 한 마디에 A의 움직임이 멎었다. 가만히 서서 듣고 있다는 내색을 하자, S가 빙긋 웃었다.

“D씨가 만든 쿠키가 먹고 싶어요.”

단 걸 그리 즐기지 않던 S가 유독 맛있게 먹던 쿠키였다. D는 형수님이 인정해주셨으니 이제 카페를 차려야겠다며 너스레를 떨고는 했는데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날의 기억에 A는 그저 “다음에 꼭 가져오도록 하지.” 대답하고는 자리를 떴다. S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 같은 건 그의 사전에 있을 수 없었다. 그게 설령 부하에게 쿠키를 구워달라 부탁하는 일이라도.

“…예? 쿠키요?”

D는 제 보스의 명령에 두 귀를 의심했다. 베이킹을 취미로 둔 지 오래된 D가 부엌에 베이킹 도구를 잔뜩 꾸려놔도 찢어진 처음으로 부탁했던 날 외에는 단 한 번도 쿠키 따위를 요구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떨떠름했지만, 보스의 명령을 거부할 리 없는 그가 알겠다며 반죽 기계 앞에 섰다. 그 이질적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A가 한 마디 덧붙였다.

“D.”

“예?”

“…덜 달게 부탁한다.”

D가 뜨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즐길 거리가 부족한 조직은 소문이 금방 퍼진다. 하물며 보스에게 여자가 생긴 것 같다는 불미스러운 소문은 더욱 빨랐다. 조직 내에서는 단체로 반발이 거셌다.

“형수님을 벌써 잊으신 거야?”

“쉿! 들으시면 어쩌려고.”

“으으. 형수님…. 대체 어디 계신 거예요.”

“D도 그걸 알겠다고 바로 만들어주면 어떡해? 젠장.”

“그럼 D가 보스 명령에 불복이라도 하라는 거야?”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상황을 관전하던 K가 슬그머니 R의 옆에 붙었다.

“보스가 이전보다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인데…. 설마 정말로 다른 여자가 생긴 걸까요?”

“글쎄. 보스가 누굴 만나든 우리하고는 상관없지.”

“뭐…. 그건 그렇지만.”

입술을 삐죽이는 K는 김 샜다고 툴툴대며 멀어졌다. 혼란의 속에서도 R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굳게 닫힌 A의 사무실을 바라봤다.

A의 오른팔이기 전에 오랜 친구로서 그가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설마 A가 S를 잊고 다른 여자를 만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더욱 걱정이었다.

‘대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거야, A.’

*

D의 쿠키와 제 취향에 꼭 맞는 책을 예쁘게 포장까지 해온 A의 모습에 S가 작게 웃고 말았다.

“쿠키도 있는데 우리 잠깐 걸을래요?”

“…일은 괜찮은 건가?”

“저번에 혼자 일했으니까 오늘은 푹 쉬라고 하셨어요.”

“그렇군. 좋아.”

찻집 주변을 걸으며 주제에 닿지 못한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갔다. 두 사람이 걸을 때마다 뽀득뽀득 쌓인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S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없는 A는 그저 그녀의 모든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거, 기억나요?”

내내 말이 없던 A도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의 존재에는 탄식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의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는 언젠가 제가 선물했던 약속의 증표. 영원히 변치 않겠다던 맹세의 언약을 나눈 것이었다.

설마 지금까지 가지고 있을 줄 몰랐던 A의 표정이 점점 무너지는 걸 바라보며 S는 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소중히 감싸 가슴 앞으로 끌어안았다.

“버릴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못 버리겠더라구요. 이걸 가지고 있으면 정말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아서…. 차마 못 버렸어요.”

“S.”

“그래서 A씨 입으로 꼭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버린 이유, 그렇게 힘들어한 이유, 나를 다시 찾아온 이유.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다.”

S의 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놓칠 리 없는 A가 언제나처럼 그녀를 안으려 벌렸던 팔을 도로 감췄다. 제겐 아직 자격이 없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수 십 번도 넘게 고민하고 연습한 말들이 그녀 앞에서 무용해진다. 그럴싸하게 꾸며낸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S를 향한 A의 진심만이 남아 언어를 빚어냈다.

“널 언제까지고 위험하게 둘 수 없었다. 우리는…. 아니, 난 항상 노려졌으니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어. 모두가 보는 눈앞에서 완벽히 속여내면 적어도 네게 갈 위험은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 변명이겠지만, 널 상처 주면서 감수할 일이었다면 하지 말았어야 했어.”

S는 그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단 한 번도 제게 거짓을 말한 적 없던 A의 거짓말에 상처받은 날이 떠올라 가슴 한 켠이 시렸다. 그때 그의 눈빛이 불안해 보이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이별의 이유를 들을 셈이었다.

이토록 홀로 불안과 후회를 끌어안고 살고 있을 줄 알았다면 적어도 저를 의지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S는 그 모든 원망을 묻기로 했다. 원망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저 눈앞의 이 남자가 사무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저는 A씨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냥, 보고 싶었어요.”

비어있던 마지막 퍼즐 조각이 완벽히 맞춰지는 것처럼 둘 사이에 공간이 사라졌다. 두 팔을 가득 벌린 S를 와락 끌어안은 A의 눈에서 평생 마른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 터졌다. 그저 두 눈을 꾹 누른 채 눈물을 쏟아내는 A의 모습에 S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들의 발아래 쌓인 눈이 툭툭 떨어진 눈물로 동그랗게 녹아내렸다.

“보고 싶어서 미쳐버린다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어. 사랑해, S.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목이 터지게 외치고 싶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알았다면, 널 그토록 상처입힐 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겠지.”

“흐윽, 흑…. 바보 아니에요? 그렇게 쫓아냈으면 잘 지내고 있기라도 하지, 흡…. 왜 이렇게 마르고 다크서클은 또 이게 뭐예요? 헤어지자고 해도 다신 안 헤어져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잘생긴 얼굴 이게 뭐냐고 훌쩍이는 S의 모습에 A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웃기냐고 아프지 않게 제 어깨를 찰싹찰싹 두드리는 손길마저 기분 좋았다.

S의 허리를 안아 들자 비명이 터졌다. 내려달라는 S의 말에도 그녀를 차까지 안고 간 A는 그대로 G의 오피스텔로 차를 몰았다.

먼지 한 톨도 없이 깨끗하게 예전 모습 그대로 관리되고 있던 오피스텔의 모습에 S는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리고 그날 밤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저 밀린 이야기를 나눴다.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해도 좋았다. 잠시나마 서로의 사이에 공백이 생긴 것을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로 메우고 싶었다.

다음날 늦지 않게 S를 찻집에 데려다 준 A가 집으로 돌아오자, 집안은 한바탕 난리였다. 그 A가 외박까지 불사했다는 사실에 E가 음흉한 웃음을 지은 게 원흉이었다.

“보스께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게 사실일까요? 형님께서는 아시죠?”

“글쎄에?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저희가 어떻게 보스한테 물어봅니까!”

“하하!”

제 행방을 모르는 조직원들이 어떤 오해를 품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찻집 일에 열중하는 S도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항상 슬픈 눈빛을 품고 있던 아이가 밝게 웃는 날이 늘어감에 따라 노하라 부부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그간 몰래 세워왔던 계획을 시행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A씨를 불렀어요.”

어느덧 A의 이름까지 알게 된 노하라 부부는 눈앞의 이 훤칠한 남자야말로 S의 ‘돌아갈 곳임’이란 걸 확신했다. A는 할 이야기가 있다는 찻집 주인 내외의 부름에 영문도 모른 채 그들 앞에 앉았다. A의 곁에는 예전처럼 S가 함께였다.

테이블 아래서 손을 꼭 잡은 채 앉아있는 두 사람을 보며 하루코가 주름진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우린 이제 늙어서 이렇게 유명해진 찻집을 이어가기엔 영 힘에 부치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S도 잘 듣거라. 우리는 이제 찻집을 닫을 거야.”

두 사람의 이야기에 S는 놀란 눈치였지만, A는 묵묵히 노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걱정하지 말렴. 힘에 부치는 게 일을 하기가 힘든 거지, 놀러 다니기엔 또 이만한 나이가 없거든.”

“어머. 이이도.”

“우리는 이제부터 세계 이곳저곳 젊어서 못 가본 곳을 돌아보고 살아가련다. 그러니 S도 이제 갈 곳을 찾아가야겠지.”

“아….”

S와 A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돌아갈 곳. 잠시 떠나있었지만, S가 돌아갈 곳은 오로지 하나였다.

“그러니 A씨가 우리 S를 어서 데려가 주면 좋겠네요. 정든 가게를 닫을 때는 오붓하게 우리 둘이 있고 싶거든.”

“충분히 이해합니다.”

“A씨!”

“S, 잠깐 나가서 기다려주겠어? 따로 드릴 말씀이 남았다.”

“그치만….”

A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S는 괜찮다는 노하라 부부의 배려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나가지 않으려는 S에게 A가 괜찮다 타이르니 그녀는 별수 없이 가게로 나가 대화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A는 노하라 부부의 앞에 긴 말 대신 가방 하나를 내밀어 왔다.

“그동안 S의 양부모님이 되어주시고 돌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건 아니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담았습니다.”

“정성?”

철컥.

열리는 가방 안에 가득한 지폐를 보고 노부부는 그만 아연실색했다. 당장 가지고 돌아가라며 성화인 그들에게 고개를 숙인 A는 “그럴 수 없습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여행 경비에 부디 보태시라는 말을 꺾지 못한 노하라 부부는 대신 그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누군가에게 안기는 게 썩 익숙하진 않지만, S를 돌봐준 분들의 은혜라 생각하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S의 많지 않은 짐을 챙겨 저택으로 향하는 사이, A의 전화를 받은 조직원들은 또 한바탕 난리였다.

“별관을 싹 청소해놓으라는데?”

“보스가 드디어 다른 여자를 들이려고…?”

“우리 형수님은 지금 행방도 묘연하신데!”

“이건 아닌 것 같아. 나 오늘은 보스한테 따끔하게 말씀드릴 거야. 다들 그렇게 알아!”

“…죽어도 난 모른다.”

씩씩 거리면서도 별관 청소에 열을 올리던 조직원들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A 뒤의 인물에 집중했다. 감히 형수님을 대신한 여자가 누군가 얼굴이나 봐주자는 심산이었는데, 무척 익숙한 얼굴이 빼꼼 나오는 걸 본 장정들은 체통도 잊은 채 순식간에 눈물 콧물을 죄다 흘려가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형수니임!”

“어허엉…. 어디 갔다가 이제 오시는 거예요오. 이게 어떻게 된 일인데요, 도대체?”

“형수님,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마르신 것 좀 봐. 당분간 식사는 진수성찬으로만…. 야! 밀지 마!”

“형수님!”

“제가 연락 드린 건 보셨어요? 답장이라도 해주시지!”

달려드는 장정들의 환영인사에 S도 실로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S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본채에도 전해져 T와 Y는 물론 G까지 버선발로 뛰쳐나와 그토록 보고 싶던 S의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S의 뒤를 가장 많이 봐주면서 걱정도 많았던 G는 주름진 눈가에 슬며시 고인 눈물을 훔치고는 S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A 그 녀석은 내가 많이 혼내두마. 아가, 너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게 아니었는데…. 못난 손주와 이 할애비를 용서해다오.”

“…아니에요, 할아버지.”

“어서 오렴.”

“네. 다녀왔습니다.”

울먹이는 S의 모습에 A는 다시금 명치부터 가슴이 따끔따끔 아렸지만, 애써 티 내지 않았다. E는 한층 더 성숙해진 동생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누구보다 애써줬던 제 형의 손길에 A가 드물게도 멋쩍은 표정이 됐다.

“S! 돌아온 게 확실해? 이제 어디 안 가는 거지? 도대체 뭐가 뭔지 난 하나도 모르겠어!”

“오빠, 잘 지냈어? 나 괜찮아. 걱정 많이 했구나.”

“당연하지!”

제 존재를 까맣게 잊은 K를 슬쩍 노려볼 뿐 오늘만큼은 제재하지 않는 A의 모습에 R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S씨.”

“R씨도 잘 지내셨죠?”

“덕분에요.”

엉엉 우는 K를 달래주는 S의 곁으로 다가선 R가 가족들의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그를 끌어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실로 오랜만이었다.

S는 마치 축제 같은 집안의 분위기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미소를 띠고 제 곁에 선 A의 손에 살그머니 깍지를 끼워 잡았다. 다신 놓지 않겠다는 듯 되려 강하게 잡아오는 A의 손길에 그녀가 작게 웃자, 영문을 모르는 모두 어리둥절한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더 강해진다.

지키기 위해 떠나보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게.

그저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되는 것뿐이다.

A의 생각을 알 리 없는 S는 한동안 제 곁을 떠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좋으면서도 걱정스러웠지만, 당분간은 응석을 부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투정 어린 욕심이 싹을 틔웠다.

이토록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 그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잠시나마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마저도 S를 무척 좋아하는 조직원들의 구애에 항상 A가 지고 말았지만, 어찌 됐든 즐겁게 웃는 S의 얼굴을 보면 그는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곳에 S가 존재한다는 것. 제 곁에 S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살아있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오랜만에 둘만의 작은 정원으로 산책 나온 두 사람은 정원에도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으며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곤 했다. 흰 눈을 두 손 가득 담아 큰 눈사람과 작은 눈사람 두 개를 나란히 세워놓은 S가 그 앞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겼다.

A씨. S.

“어릴 때 이후로 오랜만이에요. 눈사람 만드는 거.”

“그런가.”

“A씨랑 있어서 그런가. 어리광을 부리게 되네요.”

“상관없다. 그런 널 사랑하는 거니까.”

“후후. 제가 더 사랑하는 걸요.”

“의미가 없는 비교로군.”

“그러네요. 우리는 항상 같은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살며시 웃는 그녀의 입술에 A의 입술이 겹쳤다. 두 쌍의 발자국이 한 쌍으로 줄어들었다. S를 안아 들고 별채로 들어서는 A의 걸음에 눈사람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서로 의지해 버티고 서있는 눈사람 아래가 동그랗게 녹고 있었다. 눈 아래로 봄을 기다리는 녹음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말이 있다.

조금 더 이르게 찾아온 두 사람의 봄이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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