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後

2150. 3. 3. (월)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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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꿈을 꿨다. 그렇게 마냥 일축하기에는 제법 많은 것이기도 했고 짧은 것이기도 한 긴 꿈의 끝에서 울리는 휴대폰의 알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내 보이는 것이라곤 침대와 옷장 하나, 그리고 책상과 선반 몇개만 달랑 있는 제 방의 그저그런 풍경이라. 봄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몇 번 반복했다. 이곳은 제 집이다. 초유현에게 같이 히어로질이나 하자고 꼬셔진 제 모교의 옥상도 아니고, 걔가 죽던 날 함께 있었던 건물의 잔해 속도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긴 그 두 장소가 아니다. 여긴, 여긴, 제 집이고, 주소는.. 개인정보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누가 보면 안되니까.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물 한 컵을 마시고. 가볍게 손짓하는 봄의 움직임에 맞춰서 봄의 몸을 덮던 이불이 허공으로 올라 움직였다.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써버린 것을 보면서 아, 하고 탄식하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추락해서 다시 침대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는 수고가 들긴 했지만 상관 없었다. 능력을 사용하지 말자는 것은 걔가 죽은 날 이후로 세운 봄의 규칙이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깼네. 그런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눈을 부볐다. 안되지, 안돼, 오늘은.

봄의 눈이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3월 3일.

현의 기일이었다.

/

"오늘 네 꿈을 꿨어."

너를 잊지 말라고 농성이라도 하는 것도 아니고, 유치하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말을 걸기보다는 거진 혼잣말에 가까운 투로. 묘 앞에 놓아두는 꽃은 석산이었다. 흰 국화를 내다 놓기엔 현은 석산이 더 좋다고 했다. 진짜 힙스터도 아니고 뭐야, 이 경우에는 씹덕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그런 말과 함께 묘 위에 툭 던지듯 하는 것은 입에 물고 살던 담배사탕. 하나는 묘에 던지고 하나는 제가 물고. 이렇게 쪼그려 앉아 이 사탕까지 물고 보니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도 옥상에서 서로 이런거 물고 있었는데.

현아, 나 히어로 그만뒀다. 니가 죽고 난 다음날에 그냥 도망쳤어. 좆같은 일도 나눠 들어야 할만했는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합 맞추고 싶지도 않고. 그냥. 내가 이 얘기 했었나? 한번 들었으면 미안하지만 그냥 한번 더 들어라. 멋대로 죽어서 사라졌으니까 대가같은거라고 생각해. 근데 너 여기 없으면 어떡하지, 나 진짜 꼴값떠는거 같은데. 그러고보니 너 불교였지. 윤회전생같은거 해서 돌아오냐. 아니, 원래 이 말 하려던건 아닌데.

"미안, 멋대로 히어로 그만둬서."

사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오늘 꾼 꿈에서 끝까지 자신에게 사과하거나 후회의 말 한마디 남긴 것이 없는게 괘씸하기도 했고—그의 신조는 존중하는 편이지만 존중과 수용은 다르니까, 아마 영영 봄이 초유현의 신조대로 살아갈 일은 없을 테다—봄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피해자 역할도 겸하는 몸이기에.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차라리 봄은 현이 살았더라면 히어로 활동을 계속 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내가 왜 히어로 하는지 물었잖아."

그거 너 때문이야.

니가 하자고 해서 히어로 했고, 쓰레기같은 생활이라도 너랑 같이 살아있었으니까.

그런데 네가 죽었다.

"네가 없는 세상을 내가 왜 지켜."

따위의,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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