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저버렸다
마티베르 해적해군 AU (적 폐)
햇볕이 백사장을 찌른다. 거친 상흔을 입은 모래가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순간에 그녀는 그 자리에 있었다. 새하얗게 달궈진 파편들은 태양을 그대로 품어 공기 중으로 돌려주었다.
모래들의 숨결이 그녀를 붙잡아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 열기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라면 분명 이런 것을 말할 테다. 움직임 없이 숨만 붙어서는 하릴없이 바다로 쓸려가는 알갱이들을 동경했다. 바닷물과는 절대로 섞이지 못할 눈물을 머금고서 새빨갛게, 그녀는 그 자리에 있었다.
한 바다를 위해 싸웠던 이의 마지막이라면 하늘이 울어 준다던데, 저 녀석은 참으로 티 없이 맑다.
어쩌다 그녀가 친오빠의 검에 복부를 관통당해 대낮에 백사장에 쓰러졌는지 알아보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며칠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볼 시간이.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기이하여 한 번의 엇갈림으로 엮이는가 하면 한 번의 눈빛으로 비틀어지기도 하더라. 그래, 그건 지독한 눈빛이었다.
그녀와 높은 자리에 오른 그녀의 친오빠가 함께 바닷가를 순찰하기로 한 날이었다. 대강의 일과가 끝나고 그녀는 선실로 들어가 깨끗하게 청소된 침대에 무거운 외투를 의탁했다. 차갑게 일렁거리는 바다의 밤이 그날따라 무척이나 칠흑처럼 어두워서, 괜스레 감상에 젖어 창가를 내다보던 참이었다.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이한 마법을 쓰는 바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해군의 배에 몰래 탑승할 만큼 실력이 좋은 해적은, 적어도 이 근방에는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다. 그녀가 권총을 뽑아 들어 장전한 것은 희뿌연 숨결을 느낀 직후였다. 탁자 위에 대강 놓아둔 등불의 빛 아래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복식으로 보나 태도로 보나 같은 편은 아니었다.
"쏘지도 못할 거면서, 그거 내려놓지 그래?"
남자가 여유롭게 웃었다. 기다란 흉터가 얼굴을 가로와 세로로 나누고 있었다. 해적이다. 은은한 등불의 불꽃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따라 번쩍거렸다. 그 일렁거림을 좇아 그녀의 눈동자는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배를 잘못 탄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 덮은 남자의 눈을 마주 보려 애쓰며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감정을 읽을 수 없다고 하던가.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 전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놓여 있는 셈이었다. 분명히 장전된 권총을 쥐고 있는데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수를 써서 이곳에 들어왔으며,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니던가.
"배? 아, 아니야. 정확히 들어왔어."
희뿌연 연기가 남자의 발치에서부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내라면 있을 이유가 없는 그것은 안개였다. 습기를 머금은 방울들이 그녀를 붙들고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푸른 머리카락에 맺히는 물방울이 다분히 무겁게 느껴졌다.
"난 당신을 보러 왔거든."
고통이 극에 달하면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날카롭게 선 쇠붙이는 그녀의 복부에서 자리를 피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이대로 모래와 함께 관통당해 서서히 죽어갈 운명이구나. 아, 그저 이 끝자락에 바닷물과 함께 당신이 돌아온다면. 아마 이뤄지지 않을 소망을 끊임없이 되뇌며 무거운 눈꺼풀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시선이 다시 밝아지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눈물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시야에 남아 앞을 흐리고 있었지만, 조금 전과 같은 고통은 아니었다. 훨씬 덜했다. 노을이 드리워진 하늘,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이런 식으로 찾아온다던가. 그리움이 극에 달해 환각을 보는가 싶어, 되지도 않는 미신이나 끌어오고 있지만, 실은 현실이었다.
안타깝네, 공주님. 목소리를 잃어버렸잖아.
그런 속삭임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는 해적이었다. 독한 술에 젖어 하루하루 바다를 유영하는 범죄자들. 그의 행동은 씁쓸했으나 의도는 투명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그를 따른 자는 최소한 제 몫의 올리브 절임 하나쯤은 가져가게 되었기 때문에, 선원들은 그를 마티니라고 불렀다.
그 맑은 날에도 마티니는 해군들을 살피고 있었다. 망원경 같은 시시한 수단을 통한 감시는 아니었다. 마티니에게는 안개로 변할 힘이 있었다. 허공을 유영하며 해군들의 동태를 살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뒤통수를 치는 것이 그의 주특기였다. 오늘은 어쩐댔지, 저 높으신 분이 친히 동생과 함께 납신다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갑판에 얼굴을 비쳤다가, 생각도 못한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그녀의 눈은 공허했으나 비어 있지 않았다. 무언가로 꽉 차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시시한 정의 따위를 담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 터인 그 그릇은 타의에 의해 광이 나도록 닦여 전시되었다. 눈을 셋으로 나눈 푸른색과 노란색과 검은색. 그녀의 눈 안에 담긴 수평선은 더 멀리까지 나아가야 했다. 그녀 역시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흐릿한 시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에게 알려줄 차례였다. 그녀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베르트 루이제트..."
들리지 않게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면서, 보이지 않게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노을마저도 스러져가는 하늘. 베르는 몇 번이나 감았을지 모를 눈을 다시 떴다.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오지 않았으면 했어?"
힘없는 시선이었지만, 그 말에는 절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가 고개를 저었다.
"내 배는 조금 먼 곳에 매여 있어. 걱정하지 마, 공주님. 날아가면 금방이니까."
마티니의 발끝이 서서히 안개로 변했다. 방금까지 검에 관통당해 누워 있던 자리는 역시 상처를 치료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찾은 보물인데 잃을 수야 없지."
"보물..."
제대로 끝맺지 못한 목소리에 진한 만족감이 묻어났다. 마티니도 그것을 아는지 가만히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는 사람이라고 부르기에 다소 모호한 형상이었다.
"너무 공개적인 자리에서 죽인 것 아니야?"
"너에게 가지 못하게 했잖아..."
"좋아, 적어도 그 젊은 사령관 놈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네. 비록 공주님 오라버니 되는 분은 납득 못하신 것 같지만."
분노한 오빠의 표정을 생각하다가, 베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지 않았다. 몸이 공중에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었을까. 한순간 마티니의 앞머리가 들썩거렸다.
처음 그녀를 마주한 날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연스레 밤하늘에 등장한 달이 그러듯 그녀는 날아야 했다. 하지만 목적 없이 날 수는 없었다. 달은 무언가를 지표로 삼아 끊임없이 맴돌아야 했다. 그 지표가 자신이리라고 그는 감히 예상했다. 권총이 아무런 저항 없이 내려가던 순간 예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일렁거리는 등불의 빛을 따라 울렁이는 눈 안의 수평선.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아니라면 어떤 말이 어울릴까.
드러난 눈마저 안개로 변해버리기 전에, 베르가 손을 뻗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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