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XK / 첫눈
2023 ㅇ님 연교
사람들의 생각이야 질리도록 다르다지만, 첫눈에 대해서라면 모두 비슷한 낭만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대기가 흐린듯하더니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를 걷자니 문득 그 생각이 났다. 무감각해지도록 살을 에는 시린 공기에 무게 하나 없다는 듯 살랑이며 두꺼운 옷 위에 착지하는 추위의 꺼풀들. 얼어버릴까 두려워 꽁꽁 싸맨 겹겹의 옷들에 마치 따뜻하기라도 하다는 듯 녹아드는 자그만 물방울들, 신이 난 아이들의 환호성, 그날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몇몇의 시선들과······.
K는 나오려던 말을 꾹 삼켰다. 평소라면 떠오르는 대로 바로 말해버렸을 테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지 모르는 고요하게 내리는 눈송이가 내려오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게 느껴졌다. 너무도 고요하고 안온해서 말을 얹을 필요도 없이, 맞잡은 두 손 위에 스미는 눈 결정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이렇게 보다 보면 정말이지 눈은 따뜻한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눈 소식이 있으면 매섭도록 추운 날이 풀리는 건 사실이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을까.
우리는 다만 추위를 피해서 손을 잡고 있는 걸까?
따스한 눈송이가 얽힌 손가락을 녹여주면, 그러면 닿을 일 없는 감정들인 걸까?
하릴없는 잡념이 흩날린다. 누군가의 손을 잡으며 이런 생각을 해본 건 처음인데. 가죽 장갑을 낀 J의 손은 아직 굳건해 보였다. 시장에서 떨이로 산 뜨개 장갑으로 겨울을 지내오다 입사 기념으로 큰맘 먹고 산 장갑도 저 매끈한 고급 장갑에 비하면 조금 우습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손가락이 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다. 조용한 가운데 J의 표정은 어떤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K가 그의 얼굴을 보려 고개를 드는데,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우와···타이밍. 마치 쌀쌀한 팀장님처럼 때맞춰 불어오는 바람이라니.
꼭 일 년 전이 생각난다. 꼭 오늘 같은 겨울 날씨에, 스치는 바람처럼 쌍방의 마음이 엇나가던 때. 변변찮은 장갑이 없어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걸었던 그날에도 J와 나란히 걸었지만 손을 잡고 있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때는 오늘처럼 춥지 않았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올해가 작년처럼 저물 때가. 그렇지만 올해와 작년은 완전히 달랐다. 분명 올해 빌었던 새해 소원이···. K가 떠올리다 말고 픽 웃었다. 변함없이 제게 붙들려 있는 J의 손이 새삼스럽게 좋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내내 조용한 K가 마음에 걸렸던 건지 J가 고개를 제 옆으로 돌렸다. 잡고 있던 손에도, 맞잡고 있던 걸 의식하고 있던 사람이나 눈치챌 수 있을 만큼의 힘이 미약하게 들어가고.
"아··· 뭐, 옛날 생각이요?"
"갑자기 웬 옛날 생각."
싱겁다는 듯 표정 풀어진 J가 재촉하기라도 하듯 K의 팔을 잡아당긴다.
"그건 됐고 이제 어디 갈지나 말해. 자네가 정하고 온다면서 지금까지 한 건 길거리에서 차 없는 서민처럼 돌아다니면서 다리 힘 낭비나 하기밖에 없다고."
"차가 없든 열 대가 있든 길거리를 함께 돌아다니는 건 서민의 낭만이거든요?"
"서민이 썰매 개도 아닌데 뭐하러 눈 오는 날에 똥개 훈련을 해? 그리고 열두 대야."
또 툴툴거리시기는. 그러면서도 일정을 상기하고 나니 다시금 표정 밝아지는 K다.
"그, 백화점 기억나세요? 이 거리 쭉 걷다 보면 광장 옆에 있는···."
"그게 뭐지? 기억 안 나는데."
"음··· 힌트를 드리자면 올해 초에 갔던 곳인데."
조금은 신경 써서 다시 고른 장소인데. 솔직히 한 번에 기억을 해내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워낙 이런저런 업무가 많으니 헷갈리실 법도 하고. 정확히 올해 삼월, 이라고 콕 집어 말하려다 뭉뚱그려 본다. 그래도 그 중에선 특별한 기억이라고 믿었으니까.
"시장조사 하러 명품관 돌았던 거기 말인가?"
"아니에요."
"그럼 궂은 날씨를 피해 급하게 헬기를 옥상에 착륙시켰는데 강풍 때문에 날아가서 유리 지붕을 박살 냈던 백화점?"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자네도 같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게 아니라면 아닐걸요···."
J는 한참 궁리하는 모양새다. K가 장갑 속의 맨손을 조금 꼼지락댄다. 삼 월 십사 일. X요일. 방금 지나쳐 온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꽃샘추위에 대해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다가 백화점 정문으로 들어갔었지. 꽤 시간이 지난 일임에도 같은 거리를 걷고 있자니 신기하게도 생생히 기억이 다 났다. K가 그날을 되짚어 보는 중 잠시 대화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아무래도 진짜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인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아세요?"
"글쎄. 첫눈 오는 날?"
"날씨는 기억하시네요···."
"기본 소양이지."
상대가 상대다 보니 기대는 좀 거두는 편이 나으려나. K가 자세를 곧바로 하고 힘차게 발걸음 내딛는다. 어차피 오늘의 목표는 단순했다. 그러니까··· 지난 화이트데이 때처럼 빼빼로 받기. 빼빼로 데이니까 그 정도는 기대할 수 있잖아. 뭐 그때도 깜짝 선물로 받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괜스레 설레는 게 기념일을 챙기는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진작에 십 대 때 그만두거나, 슬슬 민망하고 유치하다며 미뤄두고는 했다. 그래도 K에게는 받을 때마다 새삼스레 좋고 간질거리는 게 사탕이며 초콜릿 선물이고, 알록달록한 포장지만 봐도 가슴이 뛰곤 했으니까. 그래서 영 마음을 표현하는 법이 없는 그 팀장에게도 하나쯤 받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야 사귄 지도 얼마 안 된 나름 풋풋한··· 커플이고.
일부러 화이트데이에 데이트 약속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분명 그 전날에 꼭 시간을 비워달라며, 퇴근한 후에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며 당부해 두었건만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팀장님은 업무에 집중하느라 찌푸려진 미간을 펼 새를 못 찾았지. 가게가 문을 닫는 시간이 언제더라. 가려던 그 식당은 24시간이었나. 이러다 피곤하다며 먼저 들어가 버리시는 건 아닐까? 진작에 자질구레한 잡일들을 끝내놓고, 빈 바탕화면에 메모장만을 예의상 띄워놓은 K의 눈길이 모니터와 시계만을 바쁘게 오갔다. 급한 마음에 의미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들이 메모장에 역시 무의미한 흔적을 남긴다. [아ㅏㅏㅏ늦겠다]. [너무너무심심하다 난 그냥 퇴근하면 되는데 뭐하는 거람]. [돈 이미 충분히 많으시면서 뭘 또 버시겠다고 열심이시지]. ···갈수록 유치하고 초라해진다. ctrl+A를 누르면 싸잡히고 백스페이스를 누르면 손쉽게 지워지는 마음들이라서 다행이다.
J가 퇴근 준비를 마친 건 저녁 시간을 진작에 넘긴 후였다. 겉옷을 걸치며 복도로 걸어 나오는 발걸음은 누구를 기다리게 한 것치고는 여유가 넘쳐서, 엘리베이터 앞 벤치에 앉아 턱을 괴고 바닥만을 쳐다보던 K가 J리라고 빠르게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뻐근한 목을 붙잡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J가 먼저 K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 뭐하나?"
"아, 팀장님··· 네?"
멍하니 앉아있던 K가 퍼뜩 고개를 든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반가움이 앞섰고, 뒤늦게 의아하다는 J의 태도에 물음이 따라온다. 시간만 때우며 책상에 앉아있다가, 팀장님이 나오시자마자 나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자는 마음으로 짐을 싸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냐니.
"늦어질 것 같으니 그냥 먼저 들어가라고 문자를 보냈었는데. 못 본 건가?"
"그냥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고요?"
아니, 너무 늦으면 기다리라고 하기도 뭣하고. 이어지는 말에도 K의 표정 좋지 않자 J가 조용히 K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이라도 괜찮다면 가도록 하지. 때맞춰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소리로 도착을 알렸다.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은 벌써 열 시였다. 화이트데이는 큰 기념일로 안 치는 건지 바깥 거리는 장식이나 조명 하나 없이 어둑하기만 하다. 오늘 오붓한 시간 보내기엔 그른 건가. 청명하기만 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K 맥없이 웃었다. 요 앞에 있는 백화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좀 화이트데이 기분이 나겠지. 큰 데코는 아니어도 연인에게 선물하라며 색색깔의 사탕들을 팔고 있을 테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이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K는 은근슬쩍 그의 애인을 백화점으로 이끌었다.
J는 애초에 백화점에서 지하층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식품 코너나 푸드코트도 안 가보셨다고요? 신경 안 써서 몰랐네만. 아직도 배가 고픈 건가? 하긴 아까 간 그 식당에선 먹을 게 없긴 했지. 다른 곳을 내버려두고 지하를 먼저 간다는 K의 결정이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내내 J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다행히도, 에스컬레이터가 도달하는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사람 크기만한 입간판과 사탕이 가득 담긴 카트가 놓여있었다. 대문짝만하게 적힌 화이트데이 기념 특가 세일, 에 마음이 놓인 K가 가까이 다가서서 물건을 살펴본다. 조금 유치한 빨간 하트가 잔뜩 그려진 포장지에 싸인 사탕이 즐비하다.
"이거 귀엽지 않나요?"
"어떤 점에서 말인가?"
"연인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하트를 안고 있는 작은 곰인형을 사탕에 달아놓은 점에서요?"
"바보같군. 사탕보다 단가가 더 나가겠어."
곰인형이 달려있어서 더 선물하고 싶어지는 거라니까요, 설득하는 말에도 J는 싸구려 사탕이라며 K를 이끌고 나갔다. 정 사탕이 먹고 싶다면 차라리 프랑스 장인이 만든 사탕이 어떠냐며 도달한 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 간판이 달린 값비싸보이는 가게가 있었다. 무슨, 라, 라 몽드? K가 더듬거리며 영어 발음으로 프랑스어를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사이 J는 어느 새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가 제품을 하나 집어들고 있었다.
"이건 어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탕이 아니다. 제품을 빠르게 훑어본 K의 시선이 저절로 가격표로 내려가 꽂혔다.
"어··· 전 비싼 걸 원하는 게 아니라 그냥 화이트데이 사탕을,"
"···아까 것 같은 싸구려를 원한다는 건가?"
가격보다는 팀장님의 마음이 받고 싶다고나 할까요··· 어색하게 웃으며 K는 뒷걸음질 쳤다. 결국 아까의 상품들 속에서 사탕을 고른 것도 K였다. 이래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새어나오는 의문을 막아두고. 조금 못마땅하게 K가 집어든 사탕을 보던 J는 자네가 원한다면, 이라는 말만 남기곤 군말없이 계산을 했다.
조금 더 내려앉은 어둠이 막 백화점을 나선 둘을 감싼다. 일주일은 전부터 이 날이 오기를 기다려왔는데 딱히 한 것도 없이 몇 시간이면 화이트데이가 끝난다는 사실이 조금 허망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보며 손에 들린 가벼운 백화점 종이가방의 무게를 좀 더 느껴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팀장님이 사주신 화이트데이 사탕.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J가 툭 말을 건넨다.
"그 사탕이 그렇게 좋나?"
"선물받은 거니까 좋은 건 당연한 거 아닐까요?"
"말만 하면 더 좋은 걸 사줄 수도 있는데."
참 단순하기도 하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J가 곁에 붙어온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너무 늦어지는 것 아닐까 걱정하는 바람에 정작 K는 J의 얼굴을 살피고 있지 못했다. 일정을 소화할 생각만 하느라 별로 즐기지는 못한 거 같네. 그리 생각하며 옆을 보니 자신을 향하고 있던 J와 시선이 마주친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버리는 J의 모습에 일순 웃음이 터졌다.
"뭐가 그렇게 웃겨."
"시선은 왜 피하세요?"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뭐 하게."
글쎄요. 웃음기 머금은 K가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가까워진 기척에 J가 반사적으로 K를 바라봤다. 먼저 다가섰지만서도 떨리는 손으로 K가 J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서로의 하얀 입김이 맞부딪힌다. 팔에 걸린 가방 속 사탕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백화점 문을 밀고 들어가서 따스한 공기가 얼굴에 불어오고 나서야 K가 정신을 차렸다. 회상에 너무 푹 빠져 있느라 벌써 다다른 것도 잊고 있었다. 이러고 낭비하고 있을 시간 없는데, 하며 잠시 허둥대는 사이 J는 이미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 앞에 서 있었다.
"어··· 거기 가려는 거 알고 계셨네요?"
"왠지 익숙한 곳이라서 말이지. 멍 때리지 말고 제대로 따라오기나 하게."
기억하고 계셨구나. 내심 기쁜 마음을 감추고 K는 얼른 에스컬레이터에 몸 실었다. 그렇다는 건 오늘이 빼빼로데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는 걸까. 남들이 보면 소소한 일일지 몰라도 재벌들에겐 아무래도 좋을 작은 기념일을 기억해줬다는 것에 자꾸 미소가 새어 나왔다.
기대했던 대로, 그 백화점의 지하에서는 빼빼로데이 특선 행사를 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화이트데이와 다를 것도 없지만 오히려 몇 달이 지나고도 여전하다는 점이 더 좋은 거 아닐까. 그 때처럼 쪼르르 달려간 K가 냉큼 빼빼로 상자 하나를 집어들었다. 손 하나에 꽉 차는 거대빼빼로며 빼빼로 바구니같은 화려한 상품들 사이에서 소박하지만 눈에 띄는 포장이었다.
"그거 귀엽군."
"이거 어떠, 네? 귀엽다고요?"
K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수를 친 J는 의중 모를 표정이다. 저번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서민 취향이 생기셨나? 쉬이 허락이 떨어지니 K가 두리번거리다 옆의 또 다른 과자를 가리킨다. 그러자 망설임 없이 가볍게 고개 끄덕여 보이는 것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자네가 살 건데 뭘."
"···제가요?"
"이런 건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한 건 자네다만."
그런 말을 했었나? 재빨리 기억 되짚어보면 옛날에 그런 말을 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건 밸런타인과 화이트데이 얘기였다고. 그러나 설령 그렇다 쳐도 어째서인지 K는 J가 자신에게 빼빼로를 사주리라고만 기대했던 터다. 얻어먹기만 하다니··· 김 빠진 느낌과 부끄러운 감정이 뒤섞여 K는 어색하게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그때는 제가 거의 졸라서 사주신 거 아니었나요."
"그럼 내가 자네한테 사달라고 졸라야 하나?"
J가 눈썹 치켜올리고 가볍게 고개 절레절레 젓는다. 그 모습은 마치 그럴 일 없다는 듯, 왜 자신이 그래야 하느냐는 단순하게도 무게 없는 부정이다.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반응이지만. 그렇지만.
"···제가 사드리게 해달라고 졸라야 할까요?"
K가 조용히 집어들었던 빼빼로를 도로 내려놓았다. 과자를 보러 온 연인들이 떠드는 소리만 주변에 가득하다. 그냥 평소같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넘어가질 일인데 가시 돋힌 말 뱉어내고 보니 몸 속 온통이 까끌거린다.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한 J의 손길이 꼭 아득한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그냥 가죠."
한 마디 남기고 K 에스컬레이터로 걸어간다. 한 걸음마다 괜한 후회, 다만 감춰오기만 했던 의심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친다.
들어오기 전에는 가볍게 내리던 눈발이 거세져 있었다. 펑펑 내리는 눈에 가려 어둠과 추위가 내려앉은 하늘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쌓인 눈을 헤치고 걷는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연인들의 웃음 섞인 대화가 아니라 거센 바람만이 귓가를 스치니 좀 낫다. ···눈이 이렇게 와서야 당장 집에 가긴 힘들겠네. 그런 생각을 하니 뺨이 달아올라 물이 맺힌다.
"왜 갑자기 나가는데? 뭐 못마땅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만은 바람 소리보다 작더라도 생생하게 귀에 꽂힌다. K가 뒤를 돌았다.
"못마땅한 게 아니라 그냥 까먹고 있던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자릴 박차고 나가놓고 신경 쓰지 말라니,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됐으니까 이만 돌아가자고요. 어두워졌잖아요."
어쩌면, 아님 당연히 J는 K를 그리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 쪽이 매달리지 않으면 자연히 사라질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걸까? 이제야 이 생각을 해보는 건 자신이 더 좋아하는 쪽이라서?
"뭐때문에 그러는 건지 말도 않고 가면 남겨진 쪽은 어떻게 하라는 거고?"
"···집에 가시면 되죠. 헬기로든 자차로든."
"K."
"가세요."
"혹시 저 과자를 사주는 게 자네 기분 푸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가시라고요."
"지금 이러는 게 의미가 있는 거 같나?"
물론 없다는 걸 안다. 아니까 더 이러게 되는 거지. 대답을 삼키고 묵묵히 걸어나간다. 뒤에서 J가 뒤따라오는 소리를 듣고도 기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지금 이러는 거 애만도 못한 행동이네, 아나?"
J가 빠르게 눈을 가르고 다가오더니 K의 손을 낚아챘다. 홱 돌아간 시선이 시선과 맞닿았다. K는 일부러 고개를 떨군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야할 지도 몰랐으니까. 몇 초 후 J의 장갑 낀 손이 K의 뺨에 가닿았다.
"···빨개졌군. 일단 안에 들어가서 찬찬히 얘기하지."
"···백화점에는 됐어요."
"그럼 근처에 내 전용 카페에 가도록 할까."
전용 카페라니. 그칠 줄 모르는 눈발을 피해 들어온 한 카페는 평범해보이는 아담한 가게였다.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은 살을 감싸고 나서야 추위가 느껴진다. ···여기가 팀장님 카페라고요? 묻자 별거 아니라는 듯 이제부터 자기 전용이라고 하면 된다는 어이 없는 대답으로 답하는 J다. 근데 다른 손님들이 있는데요. 코 훌쩍이며 둘러보면 분명 너댓 명이 앉아있다.
"죄다 꺼지라고 하면 되겠군. 특히 빼빼로 받은 놈들은 싹 다 쫓아내는 걸세."
"그건 안 됩니다, 손님."
카운터 너머에 서 있던 알바생이 담담하게 끼어들었다.
"···안 된다는데. 빼빼로 선물의 가치만큼의 돈으로 매수해야 하나? 그 정도가 얼마지?"
"···됐어요."
속없이 또 먼저 웃음이 새나오는 건 K다. 팀장님 나름대로 빼빼로에 신경이 쓰여 저러고 있다고 생각하니 바보같이 맘이 풀렸다. 이렇게 보면 팀장님도 참···.
"저는 핫초코 마실게요."
"핫초코라. 여기서는 어디 초콜릿을 쓰시죠?"
"···미떼요."
미떼? 스위스의 지역 이름인가? 중얼거리는 J를 K가 쿡 찌르며 진정하고 고르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 J는 짧게 고민하다 같은 걸로, 말하고는 자신의 카드를 내민다.
둘이 자리를 잡은 곳은 흩날리는 눈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완연히 새까만 하늘에 내리는 눈은, 조명을 밝힌 따스한 카페 안에서 보니 아름다웠다. 공기를 가르는 건 입김이 아니라 핫초코에서 나오는 새햐얀 김이었고. K가 J에게 곁눈질하니 그 역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내려오는 걸 보려 하늘을 올려다본다니··· 바보같네요."
"하긴, 고층 빌딩 옥상에서 보면 올려다볼 필요가 없긴 하지."
"그게 아니라···. 첫눈을 함께 맞으면 사랑이 이뤄진다잖아요. 그러면 잡고 있는 사람의 손이나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보는 게··· 사람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그렇게는 생각 못 했는데."
"뭐 그럴 거 같았어요. 팀장님은 언제나 위를 향해 올려다보는 사람이니깐··· 하하."
"···함께 말이지."
"네?"
J가 뜨거운 핫초코를 불어 식히더니 한 모금 들이마신다.
"함께 위를 본다고. 애초에 둘이서 눈을 맞고 있는 건데 한 명만 올려다보면 이상하잖아."
"어··· 그런 기초 상식이 있으셨는지 몰랐는데요?"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바보같다고 자네가 먼저 말했네만. 언제부터 그게 기초 상식이었지?"
"말하자면 일 더하기 일 같은 거랄까?"
"자네 혹시 회계가 무슨 뜻인지 아나?"
"하지만 일 더하기 일만 모르는 것과 그것만 아는 건 좀 다르잖아요···."
"내 말 무시하는 데에는 도가 텄군."
기분 탓인지 평소처럼 대꾸하는 J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서린 것 같기도 하다. 아까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앗, 무시한 적은 없는데. 저는 오히려 팀장님만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더 긴걸요."
"···하늘을 보라니까."
"···보고 있어요."
K가 J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몇 초의 짧은 침묵 후 J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살짝 기울인다. 한 손이 K의 목을 가볍게 감싸고, K가 그것이 키스였다는 걸 깨달은 건 J가 제자리로 돌아간 후였다.
"···화이트데이 때의 보답이네. 빼빼로는 아니지만. 비즈니스의··· 기브 앤 테이크라고 할까."
"이게 비즈니스예요?"
짐짓 삐친 척, K가 맞받아치자 J가 아니라며, 빼빼로도 나중에 또 주겠다고 빠르게 덧붙인다. ···그런 소리가 아닌데. 그냥 웃어넘기는 K다.
"크리스마스도 있어요."
"내년 빼빼로데이도 있고?"
"벌써 그렇게 먼 미래를 생각하세요?"
"그럴 수도 있지."
연말. 내년. 내년 11월 11일. K가 입 안에서 그 단어들을 조용히 굴렸다. 머나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게 듣기 좋았다.
···
"그래서 그 백화점 지붕을 박살냈던 건 뭐였어요, 결국?"
"그게 올해 3월 16일인가. 정말 기억 안 나나?"
"왜 그건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시는 건데요··· 그런 일 정말 없었거든요?"
"···이상하군. 진짜 같이 있었던 거 같은데. 자네가 내 옆에 있었던 게 아니면··· 그 때 자네 생각을 계속···"
"제 생각을 계속 하고 계셨다고요?"
"···못 들은 걸로 해."
"왜 하셨는데요?"
J는 말이 없었다. 다만 입술을 좀 축이다가 꾹 물었다 놓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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