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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ㄷ님 연교 2
여름이었다, 또. 숨마다 날벌레가 들끓고 음식물 쓰레기 봉투 주름마다 악취가 고이는 계절이 끈적하게 발목을 낚아챈다. H는 멍하니 새하얀 불빛을 향해 바둥거리며 기어들어오는 갖가지 곤충을 바라본다. 꺾인 날개와 휜 다리로 미끄러운 타일 바닥을 방향도 없이 걷는 무리들. 그들이 힘겹게 넘은 경계선을 몇 인간이 성큼 내딛고 들어왔다. 악, 벌레! 무더운 공기를 찢고 새된 비명이 고막에 박혔다. H가 빗자루를 들고 벌떡 일어난다. 아··· 죄송합니다. 재빠른 비질에 벌레 무더기가 쓸려간다. 무엇에 죄송한지 그도 잘 알 수 없었다.
일은 새벽 세네 시면 끝나는 것으로 분명 되어 있지만, 그 날도 다음 타임 알바는 지각 십 분을 넘기고 있었다. 진즉 할 일을 마치고 시계와 창밖을 번갈아 보는 H의 시야에 W가 들어온다. 턱을 괴고 책장을 넘기는 모양새는 동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가 아니라 어디 한강 풀밭에라도 앉아있는 듯한데. 서두르지도 않는 다음 타임이 옷을 추스르며 자기 앞을 지나쳐 등장하자 W가 바로 눈을 맞춰왔다. 이제 가자. H는 폐기가 든 검은 봉지 챙겨 일어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을텐데도 입모양으로 기다렸단 듯. 눈 아픈 형광등 대신 희끄무레한 달빛과 오렌지색 가로등불이 빼곡한 시멘트계단을 내리쬔다. 묵묵히 오르는 두 쌍의 발들은 불행히 닮아있다. 해진 슬리퍼에 끼워맞춘 발걸음이 한 발짝 나아가면 뒷창이 나달거리고. 그 날도 H는 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주한 교무실 한복판, 자기가 내딛은 좁디 좁은 면적을 직시하는 건 딱 죽기보다는 나은 괴로움이라 그렇게 보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제 옆에 서 있는 흐린 기억 속의 같은 반 남자애 얼굴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희 둘, 집안 사정이··· 귓가에서 흩어지는 소음에도 그 애는 꿋꿋했고. 참고 있는 것으로만 보여 더 떨떠름했다. ···아무튼,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이거 사인 받아와. 드밀어진 종이를 낚아채듯 잡고 교무실을 막 나설 때였나, 아님 가방에 구겨넣고 하교할 때였나. H에게 그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
우리도 이름이 있는데. 수급자니 뭐니 사회적 위치 말고.
H는 그제사 고개를 들었다. 꼭 공상하듯 시선을 비스듬히 올린 그 애가 이어 말한다.
넌 이름이 뭐야?
기억을 더듬다 보면 같은 반 애의 이름 정도는 유추할 수 있을텐데, 그보다 무슨 이유로 이름을 묻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H는 툭 뱉었다. 없어.
없는 존재. 없어지지 않길 바란 건 자꾸 손아귀에서 빠져나갔었는데. 새삼스레 H가 손을 쥐어보았다. 비닐 봉지가 바스락거린다. 안에는 고작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 또 바나나우유네. 옅게 한숨 쉬자 W가 그럼 내가 먹을게, 하며 가져갔다. 그러지 말고 김밥도 먹어. 비닐봉지 쥐어준 손 그대로 우유에 빨대 꽂은 W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근데 바나나는 참 이상하지.
H가 군말 없이 고갤 끄덕이자 W 작게 웃었다.
얘도 열대과일인데 이역만리 한국 땅에 흔해 빠져서 천 원, 이렇게 팔리고 말이야.
천 사백 원인데··· 그래서?
음··· 그래서 다른 열대과일도 흔해졌으면 좋겠다. 바나나는 먹을 때 이국의 느낌이 안 나거든.
열대의 여름은 여기 여름과 다를까. 답신 없는 질문이 허공을 잠시 떠돌다 사라진다. 시끄럽던 매미 소리도 함께 사그라든다. 어느 새 H의 집 앞이었다. 우뚝 선 둘 사이 애매한 거리가 여실히 공허하다. 떨어진 발과 발, 열대가 아닌데도 섬 같아. H가 시선 올리면 W는 손을 흔든다. 안녕, 짤막한 작별과 함께 돌아서려 하고. 네가 떠나면 공백일 고립을 생각한다. 네가 무엇을 채워넣었는지는 모르지만 비어있을 새벽을 생각해.
자고 갈래?
H는 비닐 봉지를 들고 있던 손마디에 찬 땀을 만지작거린다. 무엇이 있었냐는듯 단숨에 증발하더라. 그러니까···
혼자 있기 싫어.
순전히 못된 말이었다. 정직하면서 정직할 줄 모르는 H는 그 말 내뱉으면 W가 손을 잡아줄 것을, 그대로 따라 들어와줄 것을 알았으니까. 좁디 좁은 방에 두 명분의 생명이 들어선다. 습해. 벽지가 우는 벽을 어루만진다. 서늘하다. 그래, 춥다···. 가난한 언어가 그를 이해해줄 낭만을 찾는다. 살갗이 달라붙는 바닥에서 연속해서 서로의 어깨를 떼어내고, 초라한 숨을 막아. 지난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자그만 심장이 여기 두 개란 사실만을 절절히 느끼기 위해, 약속한 듯 나는 너를 동정하고 너는 나를 사랑해. 깜박이는 불빛 아래 H는 W에게 손을 뻗는다. 이곳이 좁아터진 달동네가 아니라 망망대해라 해도 덮쳐올 것만 같은 새벽을 피하게 해준다면. 허황되도록 안락한 품은 거짓같다. 혼자 있기 싫어. 가만 속삭이는 나의 목소리도 거짓같고 스며오는 너의 손길도 거짓같아. 우리 언젠가 도망가자. W가 느리게 발음한다. 나도 너밖에 없어. 낭만 없이 지극히 사실인 말이지만, 꼭 사랑인 것처럼 들리도록 H가 답한다. 언젠가 끝날 밤을 영원할 것처럼 끌어안는다. 그렇게 살아남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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