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Blue Someday

219 by 219
13
0
0

해는 원하든 원치 않든, 뜨기 마련이다. 간절히 빌어도 날은 밝고, 어제는 가고, 내일은 찾아온다. 가끔 그런 불변하는 것이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그렇다. 아무리 애를 쓰고 간절히 바라도 시간은 언제나 일정하게, 얌체 같은 소리, 재깍재깍, 소리처럼 재깍재깍 움직인다. 시간의 법칙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누가, 제멋대로 멈추고 바꾸고 할 수가 없는 거다. 그게 맞다. 시간은 어느 알 수 없는 하늘 위의 신이 관리할 법한 미지의 것이고, 함부로 관여할 수 없는 것……. 그러니 그것은 응당 꿈이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 시간 사이를 거닐고 뜀박질하던 짧은 나날들. 꿈 혹은 몽상과 망상에 빠져 살던 그때. 나는 누구였나. 분명 지금과는 다를진대 그럼 그때의 나는. 그리고 또 너는. 또는 시간은 무엇이었나.

고요한 새벽, 문득 일어났다. 열린 창문 틈새로 어슴푸레한 하늘빛이 달빛처럼 다락방 바닥을 비춘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찾다가 서늘한 새벽 공기 탓에 정신이 든 한은 침대 옆 작은 탁자에서 자명종을 집어 시간을 확인한다.

현재 시각은 새벽 04시 26분.

좀 더 밝아지는 5시까진 시간이 좀 남았지만 잠도 깼으니 한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다. 어디서 부엉이 한 마리가 재빨리 의뭉스러운 울음소릴 토해내며 날개를 퍼덕였다.

부우우-

부엉이는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환해지자 금세 어딘가로 날아간다. 저 부엉이는 어디로 가나?



                               



한은 한 달 전 이곳으로 왔다. 아빠와 큰 누나는 외국으로 일하러 가고 엄마는 편찮으신 외할머니를 데리고 시골로 요양을 가셨다. 작은 누나도 캐나다로 유학을 간 상태였다. 그 탓에 혼자 남게 된 한은 어쩌다 먼 친척의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한은 평소 허약한 편이라, 일부러 도시가 아닌 공기가 좋은 곳으로 보낸 거라고 부모는 변명하였다. 그래 봤자 한은 공기 별로 마실 일도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유럽에나 있을 법한 하얀 벽과 파란 지붕의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가족들은 자신이 여기 살고 싶다며 유난이었지만 한은 별로 감흥이 없었다. 이 집엔 또래는커녕 아이 한 명 안 보였고 마을에도 어울리고 싶은 아이는 없었다. 할 일은, 유일하게 한이 마음에 들어 한 자신의 방으로 마련된 다락방에서 하늘을 바라보거나 마을에서 혼자 노는 게 다였다. 50대의 끝 무렵에 접어드는 중년 부부와 10대인 한 사이에 볼썽사납게 시들 마른, 가엾은 분위기. 부부는 한을 모르고 한은 부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다. 한은 그저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지금의 애매하고 어정쩡한 상태를 조금 꾸며내어 가장 걸맞게 표현하는 길이라 믿었다.

가끔, 그는 책을 찢어 손을 접다가 간혹 자신이 단단히 미친 거라고 단정 지었다. 손은 이따금 소릴 질렀고 그러면 한은 수백 개의 접은 책장이 쌓인 침대 밑으로 던져 넣었다. 그 종잇장은 날이 갈수록 범람해서 침대와 한을 잡아 삼키고 있었다.

해는 나오는데 우매한 집들의 불은 켜질 줄을 모른다. 한참을 창밖을 보고 있자니 지루했다. 그때 짙은 푸른색 너머로 바로 맞은 편의 집 다락방 창문이 열렸다. 오래되어 보이는 외관에도 삐걱거리는 소리 없이 그냥 유리를 녹이고 나온 듯, 보는 이에게 '창문 열었다'만 알려주고 천연덕스럽게 거기 있는 것이다. 녹은 창문 사이로 미처 집주인을 보기도 전에 방 안의 그을음 따위가 자욱하게 퍼져 나왔다. 따뜻한 주황색 불빛 속에서 눈이 한과 마주친 이, 다락방 먼지 속에는 한 비둘기이다. 그 새는 거대한 날개를 쉴 새 없이 퍼득이면서 한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이제는 우주먼지 쯤으로 보이는 먼지들은 비둘기에게 달라붙었다. 반 정도 뜬 해는 비둘기가 든 집의 바로 뒤로 안녕, 하니 비둘기는 깃이 빠져라 날개를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증발하듯 부엉이처럼 사라졌다. 한은 천천히 해를 따라 했다. 마치 그 말을 몰랐던 것처럼, 안녕. 비둘기는 물론 부엉이도 돌아오지 않았다. 안녕하지 않아서인가 보다, 하고 넘긴 건 한이었고.




우스운 꼴로 접힌 온갖 논문들과 과학서들이 한의 침대를 꾸역꾸역 삼킨다. 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느 날, 한이 서둘러 어색한 식탁을 벗어나기 위해 뜨거운 국을 아닌 척 단숨에 마셨을 때의 이른 아침 식사가 있던 날. 그가 그의 방에 막 다다라 새벽 기가 가시지 않은 창문을 열었을 때의 이웃집 사이에는 높은 담이 쳐져 있었다. 발 하나 딛기도 부족한 얇고 하얀 담이. 하도 하얗고 사부작거릴 것만 같아서 새벽안개 아니면 구름인 것 같았다. 창문을 타고 올라가 파란 지붕을 잡았다. 한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담 위를 걸어가는 동안 한은 멈칫거리지 않았다. 휘청이지도 않았다. 비록 보이기는 위태로웠고 낭창낭창했지만 맨발로 담을 밟고 이웃집 근처에 걸터앉았다.

누구 있나?

어둠이 창문을, 눈앞이 텁텁하게 닦고 있었다. 어둠은 비둘기? 한은 살며시 창문을 밀어보았다. 비둘기가 단단히 막고 있었다. 들창인가 싶어 손잡이를 찾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먼지가 가득 쌓인 창틀과 검정에 가깝다시피한 색 유리. 한은 흥미를 잃었다. 언제 태양 속에서 날아간 비둘기가 있었기라도 했다는 양 창문은 그저 한을 보고 있었으니까. 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키가 몇 곱절은 커졌는지 이웃집의 지붕을 넘어 넘실거리는, 거대한 태양과 아직 조금 어두운 하늘이 어지럽게 한의 앞으로 들이닥쳤다. 지구가 둥근 게 맞긴 한 건지 한은 유리구슬 안의 작은 조형물인 양 둥글게 둘러싼 하늘 아치를 바라본다.

담은 어느 한구석으로 쭉 연결되어 있었다. 한은 발끝에 발뒤꿈치를 밀어 넣으며 천천히 동네 어디 외진 곳으로 걸어간다. 아침이라 한산한 바다 위를 걸어간다. 해가 풀로 고정한 듯 저 끄트머리에 계속 매달려있는 곳도 지나고, 부엉이가 앉았던 나무를 건너 이어지는 담을 기어오른다.
해는 뜨고 있지 않다. 새벽 6시 34분.


벌써 몇 시간째 걷고 있고, 동네를 벗어난 지도 오래였다. 발엔 물집 하나 없으며 딱히 힘이 들지도, 허기지거나 목마르지도 않음. 한은 아마 이렇게 몇 천 년은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짐도 없이 몸뚱어리만으로도, 어째 하늘색으로 변해가는 담을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4시간째, 담은 푸른 빛을 띠기 시작해 발을 헛디딜는지도 모르겠다. 한은 비로소 고찰한다, 해는 밝게 떠오르지 않으며 장소는 바뀌지만 장소는 장소답지 않고, 무엇보다 한은 4시간째 걷고 있다. 산을 올랐다가, 바다를 한참 건넜다가, 마을이 내려다보였다가……. 한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은 아닌지 고찰한다. 그리고 그 속을 걸을지를.

담은 거의 파래졌다. 파래진다는 게 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 대충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옅푸른 빛이 돌았다. 한은 하늘을 걷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다운 생각을 몇 번 했고 지금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생각들은 짓궂은 남색을 하고 시도때도없이 한에게 맹렬히 달라붙었다. 그러면 한의 발걸음은 조금 비척거렸다. 발가락이 꺾여 비틀거리기도 하고 발톱에 뒤꿈치가 까지기도, 제 발에 채이기도 했다. 이제 떨어지나, 이제 떨어지나 하면서도 한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면 담이 거의 하늘과 같아져 제가 서 있는 곳과 낭떠러지가 구별이 안 되어서일 수도 있다. 한은 하늘이 아니라 담일 뿐이라는 걸 상기시켰다. 한은 몸의 반이 구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아차렸다. 발밑은 가슴께의 구름들 탓에 보이지 않았고, 구름을 헤친 한은 비로소 '아래'를 되찾았다.그리고 잔뜩 낀 구름 탓에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벼랑을 내가 달리는 게 아니라 내가 달리는데 옆이 시원하게 패인 거야, 했다. 담 위를 걷는 것에 익숙해진 발이 알아서 좀 하도록, 한은 천천히 나아간다. 몇 시간째인지 알 수 없다.

담은 중간중간 끊긴 것처럼 보였다. 볼 수는 없었지만, 묘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맑은 물이 고인 것처럼 보이는, 발가락이라도 담글라치면 뼛속까지 아릿하게 녹여버릴 것 같은 하늘. 한은 하늘마저 담인 걸까, 궁금했다.



                             



걷는 일에 빠져 거의 모르고 있었지만, 이따금 알 수 없는 잿빛 형체들이 한의 위를 스르륵 지나다녔다. 그의 머리꼭지를 간간이 스치도록 나부끼는 그것들은, 딱히 흥미를 가질 구석이 없을 정도로 조용했으며, 서늘한 기만 섬뜩 사부작거리며 그들 나름대로 갈 길을 갔다. 다만 그들이 한을 스쳐 가는 느낌이라는 게 무해하기는 하지만 영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 그들이 떼를 지어 나다닐 땐 한은 잠시 쪼그려서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가끔 발이 저리기도 해서, 뼈가 녹을까 과도한 걱정까지 했던 그 담장에 털썩 앉아 발을 구름 너머로 내밀기도 했다. 그러면 정말 구름 같은 몽글거리고 시원축축한 것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것 같기도 하고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쾌감도 한을 스슷 스쳐 갔다. 나름 허공 발장구를 하며 한은, 분주히 지나가는 위의 것들을 '잿빛 유령'이라고 제멋대로 부르기로 했다. 잿빛 유령들은, 한 생각처럼 마냥 표정 없이 어딘가로 떠가고 어딘가서 떠왔다.



지금이 언제지?

한은 가끔씩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다급히 달력이나 시계 따위를 찾았다. 그의 핸드폰은 방에 두고 왔으니 있는 편이 오히려 기기괴괴한 것이련만 그는 일정한 주기로 그것을 찾았다. 한은 그것들로 시간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제는 밤에 이 담을 걷기 시작했는지, 그가 이 담을 만든 건지 부질없는 질문들까지 하염없이 던지기 시작했다. 날은 밝지도 않고, 저물지도 않는 채로 그냥 거기 있었다. 한은 이러다 자신이 어느 날 전처럼 걷다가, 별안간 옆으로 뚝 떨어져 노을을 마주하게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시계가 오도 가도 못하고 애매한 곳 어디에 끼어버린 건 아닌지 한은 생각할 것이다. 한은 생각했다.







누군가 한이 걷고 있는 방향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엔 어렴풋이 가른 하늘 사이로 아른거리더니, 잿빛 유령이라 하기도 모호하고 그렇다고 뭐 다른 것도 아닌 것 같은, 사뿐거리는 걸음걸이가 나타났다. 한은 잠시 멈춰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여태까지 유령들 빼고는 다른 존재라곤 일절 한가로이 떠다니지 않던 담이었어서, 한은 쪼그리려고 할 뻔했다. 그러나 그 흐릿한 발걸음은 자못 빠르게 한의 앞에 섰다. 그리고 한은 그게 사람처럼 생겼다는 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건 소년이었다. 한 말고 또 다른 소년.

- 누구야?
- 한. 너는……?
- 윤이야.
- '윤이야'?
- 그냥 윤.

윤은 담과 닮아있었다. 한은 그 때문인지 소년을 별로 쳐다보는 게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내키는 대로 녀석을 뜯어보고 싶은 욕심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하늘을 따다 놓은 것 같은 머리칼이, 만져보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녹을 것 같아 꺼려진다. 사람이 이렇게 생겼었나 싶어 약간 의구심도 들었다. 윤은 아무렇지 않게, 기다렸다는 듯 뒤를 돌아 앞장서서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어디 가?
- 글쎄. 너 찾으러? 찾고 있어.
- 따라가도 될,
- 따라와.

한은 조금 마른, 코앞에 있는 윤의 등을 새삼스럽게 쳐다보며 천천히 따라 걸었다. 언제 갑자기 윤이 증발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급기야 윤의 뒷목이 잿빛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성급히 윤의 등에 손을 갖다 대었다. 뼈가 툭 튀어나왔지만 자신만큼이나, 자신보다 따뜻한 좁은 등. 한은 등을 쓰다듬는 것도 아닌, 모호하게 굴은 뒤 안 그런 척 손을 뗐다. 윤은 기척 없이 나아갔다. 한도 조용히 따라갔다.


그곳은 뭔가 알 수 없는 공기주머니? 어느새 그런 곳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곳은 동그랬다. 멋모르는 우주비행사의 거대한 유리구같기도, 혹은 잠자리의 날개만큼이나 얇기도 했고 질긴 비눗방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 그것은, 겉보기엔 숲이면서 무언가 약간 달랐다. 이를테면 마치……마치 이건. 공기가 너무 가벼워서 없는 듯했다. 숨 쉬어도 공기가 안 들어오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들' '/날' '. 먼지만 그저 희뿌옇게 떠다니는데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은 더럭 겁이 나서 윤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윤은 그냥 걸었다. 정말이지 이를 데 없이, 그렇게 고요해서 한은 정적을 깰 수도 없었다. 유일한 먼지들이 그를 험담하는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받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풍의 눈이나 우주 혹은 혼돈의 한가운데 같을까. 기묘하게도 평화롭고 조용한 곳. 곳이라 하기도 아리송했다. 그 숲은, 기억도 아니고 기억보다 더 멀지만, 저 먼 시공간을 당분간 끌어다 놓고 거기 있는 것 같다. 윤은 태연하게, 오래 묵은 고목의 나이테들을 거스르듯 걸었다. 풀이 말없이 발밑에서 사그락거렸다.

한은 문득 자신을 찾으러 간다는 윤을 떠올렸다. 그러고 이 크나큰 숲이 나인가, 싶어서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두 발로 풀밭을 탕탕 딛으면서 그는 뱅글뱅글, 갖가지 먼지들이 그 돌음을 천천히 감싸오면서 위로 올라갔다. 사탕 뽑기 기계처럼, 느긋하고 일정하게. 마침내 어떤 충동에 멈춘 한의 머리꼭지에 먼지들이 반짝거리며 쌓였다. 윤은 한의 먼지들만큼이나 천천히 뒤를 돌아서 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공기란 자체의 존재도 희미한 이곳에서 숨을 쉬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한은 못내 차분한 숨을 쉬었다. 그의 폐까지 아주 작은 먼지들이 들어차 간질였다. 제대로 숨, 쉬었다고 판단하기도 전에 먼지 섞인 재채기를 한 번 한 한은 먼발치에서 가만히 서 있는 윤과 나란히 발을 떼었다. 한이 재채기를 한 곳에서는 여전히 먼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숲의 우주 먼지들이.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걸어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윤을 만난 후로는 담이 바뀌는 일은 없었으며, 잿빛 유령들도 꼬랑지를 감추고는 지나가지를 않았다.
다소 심심했을까?

몇 날 며칠 동안 한은 윤을 따라 걸었다. 둘은 이름 이상으로 서로에 대해 묻지 않았고, 어딜, 왜 가는지, 혹은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지도 않았다. 신기하게도 윤의 말은 뜬금없고 전혀 맞지 않는데도 한은 다 알아듣고 그만큼이나 묘하게 대답할 줄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위선적이라던가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윤은 알 수 없이 자상하고, 한은 그와 대화하면 좀 미쳐서 손을 씹어먹는다던가의 짓거리를 할 수 없어 다행이었다. 벌써, 얼마나 지났을까……?

몇십 년에 걸쳐, 아니면 더 오래 이 빌어먹을 담을 걸은 걸지도 몰랐다. 어지럼증이 닥쳐오거나 발이 굉장히 부어버려 뼈가 사방으로 퍼져버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래 걸었다는 윤이나 한이나 젠장맞게도 정상처럼 보였다. 담이 대신 미친 걸까.


어느 날, 윤이 돌아본 날, 한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발가락을 자못 구물거리면서 담에 손바닥을 쫙 펴서 갖다 대고는 손가락까지 꼼질이면서 그러모아 담의 어느 부분을 움켜쥐었다. 윤이 쪼그려 앉아 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은 원래 그렇게 하기로 한 것처럼 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반쯤 물인 줄, 담이 또 다른 물에 가만히 파원을 그려나갔다. 윤은 언제나처럼 말없이, 자세를 고쳐서 다릴 벌려 앉았다. 윤의 발가락에 흘러가던 구름 가락이 끼었다. 윤과 한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한쪽은 다른 쪽을 그저 보았고 다른 쪽은 눈물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윤은 한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이내 물 수백 방울이 윤의 손등에 쏟아졌다. 한의 등이 땀으로 뜨끈해지고, 윤은 한의 등께를 머뭇머뭇 어루만졌다.
그건 그렇고 한은 갑작스럽게 손을 뜯어먹고 있었다.

- 나 미친 것 같아?
- 나도 미쳤어.
- 그래?

한은 다리를 모아서 윤을 지지대 삼아 일어섰다. 윤도 일어났을 무렵, 눈물 탓인지 담이 아래로 푹 꺼져있었다. 그리고 눈물인지 하늘인지 모를, 둘의 발 근처에 찰박거리는 것이 고여있었다. 한이 엄지발가락을 살짝 가져다대자 파원이 사방으로 생겨나 퍼지더니 물결이 발가락을 감쌌다. 그냥 건너도 되는 건가 - 윤이 끄덕이고 한과 함께 조용히 물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평범한 동네 수영장을 걷는 것처럼인, 다만 옆의 벽이 없는 물웅덩이였다. 물은 이렇다 할 수 없는, 존재할 수도 없는 것 같은 온도였고, 어째 평소에 담을 걷는 것처럼 수월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들이 걷는 동안 물 - 하늘인가 - 는 전혀 요동이나 물결도 치지 않아서 한은 팔을 물에서 빼내보기도 했다. 물은 미동도 없었고 신기하게도 팔은 얇은 물이 막처럼 둘러싸서 떨어지거나 마르지도 않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꽤 길었지만, 한과 윤은 곧 반대편으로 기어나왔다. 혹 뒤를 돌아보면 사라질 물이 아닌가 싶은 한은 흘낏 뒤를 보았지만 물웅덩이도 그저 한을 흘낏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은 사실 입때껏 잠을 자는 것은 물론, 피로도 존재하지 않았고 먹는다거나 마시는 것 역시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눈물을 막 빠져나오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여러 기본적인 욕구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와서 그는 당장 하늘에라도 몸을 던져버려야 좀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한을 눈치챘는지 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한을 바라보았다.

- 말 안 해도 알겠다…….
- 그래?
- 나도 이랬거든.
- 그 말은 너도 전에,
- 거기 가자. 가면 그런 걸 느낄 새도 없거든.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네가 알면 알게 될 거야.

윤은 어딘가로 또 갔다. 걷고 또 걸어서, 왠지 하늘이고 담이고 우중충함으로 덮인 유원지, 공허하고 또 슬쩍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었을까. 윤과 한이 그곳에 천천히 들어감으로, 거대하고 앙상한 그 유원지가 그들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오므라들었다. 가루가 날아다니는 유리구의 문을 열고 제멋대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아니 애초에 그런 색깔이었을 것만 같은 흑과 잿빛의 놀이기구들이 자못 웅장하게 널려 있었다.
한은 정말이지 그것들을 살피느라, 또는 이상한 기분에 압도되느라 이전의 욕구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곳은 정말 이상하지 않으면서 이상한 것들로 차있었다.

- 뭐 탈래?
- 저거.
- 저거?

롤러코스터? 윤이 묻자 한은 제도 잘 모르겠다는, 헷갈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 환상특급일까. 그러나 꾸밈없이 뼈대만 간신히 남은 철로들과 의자는 그다지 환상이랄 것도 없어보였다. 그런데 끌린 이유는 뭘까…….

윤은 익숙하게 흔들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관제박스에 들어가 스피커를 켰다. 스피커는 삑삑거리는 잡음도 없이, 다만 어딘가 낡아진 것만 같은 퇴색한 소릴 냈다. 그 소리로 윤은, 환상특급, 몇백 년 만의 운행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뛰어나와 한의 손을 잡아채, 기구에 앉았다.
떨어지거나 고장 나지는 않을까……. 윤은 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한은 자신이 작아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구마구 작아져 없어져 버릴까 하는 두려움 탓인지, 다른 쪽 손으로 둘이 잡은 손을 감싸잡았다.
환상특급은 절정에, 맨 꼭대기에 올랐다. 팔방이 옛날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흑백이고, 흐릿했다.

-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니.
- ……글쎄.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둘이 탄 것은 마치 지금까지 묶여 있던 한을 풀려는 것처럼, 어느 곳이든 달려갈 기세였다. 꼬꼬마 한은 저 멀리로 날아갈 것 같았고 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거의 기적적으로 멈춰서서, 윤은 가뿐히 일어났다. 한은 무언가에 휩싸여서, 기묘한 기분에 천천히 윤을 따라갔다. 윤은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 왜 네가 나랑 같은 모습으로 내 뒤를 따라 걷는지 알아?
- 모르겠는데.

마저 걷기 시작했다. 둘은 또 워터슬라이드에 가서, 잿빛의 파도에 덮어졌다. 그 파도가 한의 눈앞에 닥치고 부드럽게 한을 감쌀 때, 한은 이유 모를 고즈넉함과 슬픔을 느꼈다. 그런 류의 것들은 느껴본 지 아주 오래된 것 같아서, 파도까지도 케케묵게 만들었다. 한은 슬펐다. 그리운 것, 같기도, 했, 을까. 윤은 그리워보였다.

그다음으로 탄 것은 대관람차였다. 회색 하늘에서도 새까만 검은빛으로 그 존재가 빛나고 있었다. 그 유원지의 대장이 자기라는 걸 뽐내는 듯 안 뽐내는 듯, 서울 구경한 시골쥐의 위풍당당함을 닮아있었다. 카메라 속에나 있을 법한 옛날 것이……. 윤은 하나의 조잡한 문을 열었다. 유리창도 없고, 의자에 쿠션도 없는 그냥 철제였다. 까닥하다가는 뭐든, 사람이든 떨어뜨릴 것 같았다. 타도 되나 싶었을 즈음에 윤이 또 한을 이끌고 탄 후 문을 닫았다. 그러자 그것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여서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살짝 바람이 불어 흔들리고, 회색 바람이……. 한에게 문득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렸을 때의 기분이 스쳐갔다.

- 알겠어?
- 조금.

대관람차는 한가롭게 내려갔다.







유원지를 나온 후, 밖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찬란한 주홍빛, 보랏빛, 지긋지긋했던 하늘빛까지 녹아들어 해는 버터처럼 뭉근히 져갔다. 한과 윤은 담에 걸터앉아서 말없이, 얼마 간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이제 밤이 시작될 거고, 이 지겨운 담도 사라지겠지.
윤은 한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 끝, 별이 반짝거리기 시작한 저 밤으로 뜀박질해 사라졌다. 한은 언제나처럼 윤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내 뒤를 돌았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저쪽은 윤이 온 곳, 이곳은 한이 온 곳. 그는 넘어질 듯 달려갔다. 사방의 유령들이 한을 해치려 들듯 달려들 때, 옆으로 넘어질 듯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갔다.
하얀 벽에 푸른 지붕이 있는, 집의, 담의 끝. 한은 천천히 창을 넘어갔다. 창틀은 차가웠고, 비둘기가 잠들어있었던 것 같은 맞은편 집은 여전히 먼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침대도, 삐죽 삐져나온 접힌 종이도. 그리고 자명종이 놓여 있는 탁자, 어 - 탁자에는 한 장의 종잇장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한이 끝없이 접어대던 기괴한 어떤 것도 아니었고, 그냥 노트에서 찢은 것 같은 종이였다. 한은 그 종이를 가져다 침대에 풀썩 앉았다.

『 나에게. 』

한이 한에게 쓴 편지일까.

『 나에게.

안녕, 한아. 지금은 날도 지고, 나와도 헤어졌겠지. 그리고 시각도 네가 기억하던 시각일 거야. 』

현재 시각은 새벽 04시 26분. 한은 밤 내내 달린 거였다. 분명 아주 조금 전에 해가 저물었는데.

『 그거 기억나? 네가 접었던 종이들이 우리 있는 데까지 따라온 거……. 네 다릴 뜯어먹으려고 했잖아. 나도 그런 거 했었는데, 너는 모르겠지만. 그것 말고도 너는 나랑 많이 닮았을 거야. 너는 내가 얘기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

『 또 뭐 기억난다. 한참 걷고 있을 때, 우리 이렇게 말했었지.
-우리 뭐하는 거야?
-걷고 있잖아.
맞다, 걷고 있었지-.
그거 웃겼는데, 너는 이상하게 웃었는데, 나는 안 웃었어. 그냥 너무 슬퍼져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너무 슬퍼져서. 차차 있으면, 그러니까 천 년 정도……. 너는 알게 되겠지. 』

『 그 숲 기억나니. 자꾸 기억나느냐는 질문만 해서 미안하지만, 딱히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이것 역시 미안. 어리둥절했을 거야. 사실 너에겐 그저 생소한 것들이고, 나에게나 일종의 추억여행인 셈이니. 그렇지만 네가, 처음 그곳에 갔던 나처럼 행동해주어서, 기뻤어. 내색은 안 했지만 말이야. 어째 반복하는 것 같지만, 천 년 정도 지나면, 완벽히 알게 될 거니까 네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정도만 말해줄게. 사실 지금 쓰는 것도 적절한지 아닌지 모르겠다. 』

『 그 놀이공원도 물론 기억하겠지. 이건 너의 삶. 네가 놀았던 유원지. 몇천 년 전의 네가 알려준 것. 뭔가를 주체할 수 없을 때 가면 기분이 묘해졌어. 그래서 데리고 간 거야. 그러니 기억하겠지. 하지만 나는 좀전의 기억보다, 더 오래된 너의 기억을 꺼내줬으면 해. 정말 옛날의, 네가 미처 남아있는 기억이라고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낡디낡은 기억. 네가 이것도 생각해낼 수 있을까? 내가 어렸을 때처럼, 너의 어렸을 때도 여기 와서 놀지 않았을까 -? 』

유원지. 한은 문득 워터슬라이드와 환상특급, 뭐 그런 류의 놀이기구를 떠올렸다. 낡아서 글씨도 흐릿하던 그 유원지……. 한이 네 살 때 갔던 곳이었다. 혹은 몇천 년은 더 전에. 윤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한은 자그맣게 속삭였다. 때마침 어떤 부엉이가 한의 방 창문을 지나쳐가며 울음소리를 냈다. 부우우, 비슷하게. 그때가 반복되고 있는 건지. 한은 혹시나 해서 시각을 확인했다. 멈춰있지 않았다.

『 너는 어디로 가는 중이었니. 나는 천 년 전으로, 널 찾으러 가는 중이었어. 천 년을 거슬러서, 천 년을 거슬러서……. 나 역시 누군가가 천 년을 거슬러 날 만나러 왔기에, 이번에는 너에게 간 거야. 잊지 말라고, 그 '나'도 나에게 말하더라. 잊지 말라고. 너는 이제서야 눈치챘을까. 한아 안녕, 나는 윤이야. 또 나는 한이야. 너 거기서 이제 그만 미치라고, 나 역시 미친 적이 있었으니까, 너는 이제 또 네가 기억할 수 있는 천 년 전의 너를 찾아가. 찾아가서 네가 접은 걸 가져다줘. 또 미치지 말라고, 그 애가 하는 걸 잘 지켜봐 줘. 』

『 너는 천 년 동안 걸어서도, 내 말을 잊지 않을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어. 너와 만나서 한 것도 내가 들은 것에 맞게 한 건지, 애초에 어딘가에서 잘못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내가 널 기다리며, 생각하며 담을 걸은 시간들이 헛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하지만 네 옛 기억을 떠올리게끔 해줬다면, 그것만이라도……그것만이라도 너는 나름 괜찮았겠지. 좋은 게 아니라 괜찮았다고, 너의 기억이 가장 끔찍했을 때의 어느 일부분이 이르러 마냥 묻어두고만 싶은 기분이 들지 않게끔. 나도 그랬고, 천 년 전의 나도 그랬고, 이천 년 전의 나도 그랬다고 했고, 삼천 년 전의 나도 그랬을 거고, 사천 년 전, 오천 년 전, 육천 년……. 』

『 네가 너에게 좋은 '너'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잠시 만난 것뿐이지만, 나쁘고 힘들었고 알 수 없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느꼈다면, 너는 날이 밝을 때 즈음, 지겹겠지만, 담을 걸어서 천 년 전의 너에게로 걸어가겠지. 그렇게 천 년이라도, 만 년이라도 거슬러서 가. 내가 불안한 건지 이 말을 계속하는데, 그만큼 중요한 거라고 여겨줘. 얼마 동안 우리가 걸었는지 나조차 알 수 없지만, 훗날에 너에게 힘을 주는 추억의 한구석이 되기를. Blue someday라고 불리더라. 그게 무엇이든, Blue가 가진 뜻 중 하나인 '우울한'이 되지 않도록. 그냥 푸른 언젠가 정도로 기억해줘. 외롭거나 슬플 땐 그 푸르름이 너의 뇌리에 가득히 새겨져서, 너의 기분마저도 파랗게 들떠버릴 수 있게. 』

『 편지가 길어지는 것 같다. 너라면, 너는 어차피 나니까- 잘할 거라고 믿을게. Blue someday 속 '네'가, 윤이. 』

한은 편지를 내려놓았다.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빠르게 그것을 접어버렸다. 그리고 힘없는 웃음으로 조금 웃었다. 또 걸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걷지 않아도, 그래도 되는 걸까.

그래 봤자 고작 '나'일 뿐인데 알게 뭐야?

한은 순간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니, 현재의 자신만 해당되는 거니 이기적인 것도 아니려나. 그는 시각, 05시를 보고, 그가 잠들고 일어난 후에는 담을 걸으려는 의지가 생길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천 년 만에 자는 잠. 뿌리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순수하게, 그 존재 자체로, 달콤한, 잠. 한은 괴상한 것도 꾸지 않고, 그냥 파란 하늘을 헤엄치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평소처럼 일어나 평범하게 옷을 입고 그런대로 아침을 대충 때우고, 한은 그날처럼 방엘 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날은 여전히 시리게 푸르렀고, 종이 역시 가만히 거기 있었다. 한은 그 종이를 텅 빈 서랍 안에 집어넣고, 침대 아래의 접은 것들을 죄다 꺼냈다. 그리고 한 아름에 끌어안아 저 하늘로, 파란색으로 멀리 던져버렸다. 거미나 먼지 같은 것들을 맞은편 집으로 우수수 떨구고는, 그 접은 것들은 어딘가의 담으로 사라져갔다. 얼마 후에 그것들은, 나에게 그랬듯 천 년 전의 '내' 다리를 뜯어먹으려 들까.

한의 앞에 놓인 담은 변함 없이 파랄 뿐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