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젖은 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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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K에게.



 K, 오랜만입니다. 당신을 잃어버린 후 꽤 오랜만이에요. 생각으로나, 이렇게 종이를 맞대는 것으로나 어느 쪽이든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 때문인지 다소 손이 떨려서 잉크가 번지는 것은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지금 비가 내리거든요.

 얼마 전에 당신을 봤어요. 동네의 세탁소에서 그 큰 미닫이문을 열어두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신은. 젖은 단화를 벗어두고 콘크리트 바닥에 발을 기대고 있었죠. 세로로 붙여진 빨간 세탁 스티커가 드문드문 벗겨지고 모기장도 없는 그 문 안에서 말이에요. 파산했는지 어쨌는지, 한참 버려져있던 가게. 그곳에는 한산한 거리와 빽빽하게 심어진 비 맞은 플라타너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젖어서 갈라진 머리칼을 가끔가끔 헝클어뜨리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어요.
 곡조는 단순했습니다. 그 곡이 뭔지 알아차리는 것도 꽤 빨랐죠. 당신은 한 손만으로, 항상 나와 당신이 치던 그 노래를 치고 있었으니까요. 비 오는 날이면 '인생의 회전목마'를 치곤 했습니다. 당신은 왼손, 나는 오른손. 당신은 요즘도 비가 오면 그 곡을 치나 봐요. 오른손잡이인 당신의 손가락이 어색해 보였죠. 다소 애처로워 보였어요. 그럼에도 피아노 소리는 멀리멀리 퍼져서 저 너머, 너머로…….



-



 당신은 언제 서부턴가 그 거리를 산책했었죠. 평일 오후 그 장마철에, 항상 별일 없이 거리를 산책했죠. 나는 그 땐 당신을 보고 있었지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왜인지 텅 빈 세탁소, 어느 날 피아노가 생겼습니다. 당신이 가져다 놓은 것일까, 궁금했어요. 비는 공간에 맞추느라 세로로 놓은, 그 피아노에 앉아서 가끔 연주하는 사람도 생겼어요. 그리고 난 그 사람이 모두 당신일 줄은 몰랐었죠. 당신은 언젠가부터 이 거리에 나타났고, 언젠가부터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또 당신은 자신의 옆모습을 구경하는 날 처음으로 바라봤고, 물기 가득한 내 손에 종이 한 장을 쥐여줬어요. 그리고 좋은 꿈을 꾸게 될 거야, 라고 가볍게 웃으며 속삭여주었죠. 아마 그 구겨지고 젖은 종이를 함부로 펴볼 용기도 없이 방 한구석에 소중하게 숨겨둔 후부터 나는 당신의 피아노 의자에 앉았을 겁니다.
 따, 다, 따단. 따다, 따단. 당신은 내 손가락을 일일이 짚어주며 날 가르쳤어요. 나는 금세 그 멜로디를 외웠고 다시 마주쳤을 때는 당신과 의자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비를 맞고 오는 날이면 세탁소는 피아노 소리로 가득 찼던 것, 기억나나요. 들고 나갔지만 정작 쓰지도 않았던, 문틀에 기대놓은 우산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세찬 비는 쏴아-. 그 속에서 우리가 피아노를 쳤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우린 나가서 비를 맞고, 걸었었죠.
언젠지 모를 때부터, 역시 언젠지 모를 때까지요.

 피아노 소리에 맞춰 짐짓 우아한 척 왈츠를 췄던 적도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둔탁하게 나무가 울리는 소리만 나는 건반이 있는 낡은 피아노였지만 나는 그나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맨발로요.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으며 춤을 췄어요. 그동안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죠. 나는 혼자 춤을 췄고, 당신은 피아노 건반을 눌렀어요. 발바닥은 다 까지고 닳았지만 나는 춤을 췄고, 당신은 천천히 곡을 연주했습니다. 빠른 빗소리 속에서 음 하나하나가 잔잔히 울려서,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의 나는 그게 최고의 왈츠 음악인 줄만 알았었죠.



   
-




 오늘 우연히 떠돌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방금 비를 맞고 온 듯하더군요. 내가 얘기했던 대로, 내가 기억하는 대로 당신은 단화를 벗고 그 곡을 치고 있었다니까요. 당신에게 나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콘크리트의 그 까슬까슬한 벽에 어깨를 기대고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어요. 연주가 끝날 때까지도 가만히, 그냥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꽤 어둑어둑해진 5시에 세탁소를 나왔습니다. 나와서 이 빗속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을 처음으로 만지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만 꿈에서 깨야 한다는 걸 알았죠. 지금은 다만 이 편지가 젖지 않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사실 이 글의 첫머리에 당신의 이름 앞에 어떤 말을 붙여야 할지 고민했어요. 하지만, 선택한 후엔 어색했을지 몰라도 이미 줄줄이 써내려간 후의 지금으로선 참으로 적절했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사랑하는. 당신은 모르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잊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를, 그 낡은 피아노 소리를요.

비가 더 심해졌습니다. 이 비는 끝에는 말라서 흔적조차 없어지겠지만 당신이 곱게 접어둔 우산은 그대로 있겠죠. 그럼 나는 이제 당신에게로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축축히 적시면 당신은 감기에 걸릴 테지만 그러면 당신은 피아노 소릴 떠올릴 거야. 따다따단, 따다, 따단…….


 그걸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그 피아노 건반 위의 내 손은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이따금 당신의 꿈에 찾아가 비를 흠뻑 내릴 거에요. 여기 돌려드립니다, 십여 년 전의 당신이 불쑥 내게 건네준 그 낡은 티켓이요. 최고의 꿈을 선사해준다는 꼬깃꼬깃한 티켓. 당신도 날 기억하고는 있을 테니 우리만의 꿈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내겐 가장 달콤한 꿈이었으니 오늘 밤은, 당신이 가장 달콤한 꿈을 꿀 수 있게 됩니다.

 이미 편지 윗부분은 빗물에 흐려져서 글씨 하나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금테가 둘린 이 색바랜 종이는 그때 그날 당신의 손처럼 당신에게 무사히 도착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곧 떠날 테지만, 당신은 꿈 속에서 전과 같이 피아노를 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했었다는 것은 꿈을 깨고는 잊어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당신의,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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