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너와 내가 함께한 그 달들과, - 8월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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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오기 시작한 장맛비는 아직도 창문을 거세게 때리고 있다. 물기진 창에는 바깥 불빛이 아롱아롱히 흔들린다. 물방울은 덩이 져서 주르륵 흘러내리고, 맺힌다.


 딱 8월 1일이 된 자정, 멀리서 시계탑의 종이 열두 번째 종을 칠 때 누군가 내 방 창문을 두드렸었다. 1층도 아닌 맨 꼭대기라 천장도 지붕처럼 'ㅅ'자를 이루는, 쓸데없이 높아 날 한없이 작아 보이게 했던 나의 방. 그 방에 걸맞게 창문은 컸고, 그 큰 창문과 작은 나에게 누군가 두드렸었다.

 어린아이의 발 하나나 겨우 지탱할 수 있었던 창문턱에 걸터앉아서 너는 빼꼼히 열린 창문 사이의 내 눈을 쳐다보았다. 장마의 초입이던 그날 밤. 너는 으레 8월의 젖은, 푹신한 땅이나 이슬을 머금은 푸르른 이파리, 보금자리가 물에 잠겨서 뭉그적대며 기어 나와 높은 땅을 찾는 야생동물을 담은 듯한 눈이었다. 그 눈 위에는 그날 내리던 굵은 빗방울이 아른거리게 녹아 있었다. 장난스럽게 뻗친 흑빛 머리의 너는 하늘하늘한 푸른 셔츠와 5부 청바지까지 어느 곳 하나 여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필시 너의 이름은, 물어보진 않았지만, 여름이나 장마 아니면 장마가 오는 여름인 팔 월이 분명했다.
 팔 월은 8월 1일 비가 내리던 밤에 날 찾아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비 오는 밤 세상을 걷지 않겠느냐고. 당시 나는 잠옷 차림이었고, 딱히 우산이나 우비도 없었지만, 팔 월 너와 함께 걷고 싶었다.


 굵직한 빗방울 사이로 가로등만 조금 밝고 있었다. 너의 눈에 담긴 것처럼 비 맞은 잔디는 기분 좋게 차가웠고, 땅은 기분 좋게 푹신했다. 그 땅에서는 온갖 작은 동물들과 젖은 식물들 같은 것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청개구리가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낮에는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고운 꽃잎들도 고요히 피어있었다. 그런 거를 신이 나서 보고 있다 보면 잠옷이 점점 젖어들고 있었고, 팔 월의 어깨도 젖어갔다. 나는 나와 함께 그 장난스러운 소년도 젖는 게 좋아서, 가족 아무도 모르게 한밤중에 맨발로 정원을 걷는 게 좋아서 팔 월을 잠시 안았다. 젖었는데도 너는 마치 젖지 않았던 것마냥 포근했다, 저 땅처럼. 그 후 근 한 달간 나와 걸었던 너답게.


 잠든 지도 몰랐던 채 일어나면 항상 나는 8월의, 나의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밤마다 걸어서인지 발끝은 물집이 잡혀 있었지만 풀이나 흙 부스러기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더럽혀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발에서는 8월의, 팔 월의 향내가 났다. 얼마 동안은 일찍 일어나서 발을 확인하고, 그 향을 확인해 아직 8월이라는 걸, 즉 오늘 밤도 네가 찾아오리라는 걸 되새기는 게 일상이었다. 그건 매일같이 비만 올 때 이 넓디넓은 집에서 혼자 놀 수밖에 없는 나를 버티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었다.


 가끔의 낮에는, 나는 엄마의 큰 파랑 우산을 들고 밖엘 나가곤 했다. 어리석게도 첫날에는 맨발로 우산도 없이 뛰쳐나갔었다. 땅은 변함없었지만, 발은 저절로 깨끗해지지 않았고 젖은 옷과 머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크게 혼났고, 저녁 먹기 전까지 욕실에서 박박 씻어야 했다. 두 번째 날부터는 우산을 몰래 가지고 나갔고 장화도 신고 나갔다. 결국은 항상 장화를 벗어 던지고 땅을 밟았지만. 그건 최고급 침대의 매트리스보다, 트램펄린 위에서 뛰던 기분보다 좋은 거였다. 정원의 수도꼭지를 틀어 발을 씻고 제멋대로 놓인 장화를 신은 채 돌아갈 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너와는 땅뿐만 아니라, 물기 어린 뜨뜻한 아스팔트를 걷기도 했다. 며칠 주기로 조금씩 비춰주는 햇빛에도 그렇게 쉽게 달구어져 있었던 아스팔트 길. 이쪽은 꽤 외진 곳이라 밤중에 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고, 별빛과 가정집에서의 희미한 불빛만 반짝였다. 그렇게 반짝이는 길거리에서, 나는 너의 손을 잡고 걸었다. 가다가 움푹 팬 곳에 물이 고여있었고, 발끝으로 그 물을 튀기는 것도 나름 즐거웠다. 발은 욱신거렸지만 따뜻하게 데워진 물기가 발을 감싸줬고 그것 또한 즐거웠다.


 그러다 8월 후반이 다가왔고, 장마는 계속될 때였다. 너와 걷는 밤은 항상 즐거웠지만 잠도 자지 않고 옷을 입은 채 창문 앞에 서서 널 기다리면, 너는 이제 날 좀 하지 말라곤 했다. 빗방울이 맺힌 창문에 손을 갖다 대고 8을 그리노라면, 너는 날 좀 말리곤 했다.

 9월 1일은 성큼성큼 다가와, 9월이라곤 실감조차 나지 않았던 8월 1일부터 조금 걱정된 17일, 1분이라도 더 같이 있자고 졸랐던 25일을 거쳐 이제 바로 내일로 걸어왔다. 8월의 마지막 날, 너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눈에서도 8월이 보인다고, 시익 웃었다. 너는 언제 한 번도 이름을 밝힌 적도, 8월 동안만 올 거라고 얘기한 적도 없지만 나는 왠지 알고 있었다.

 너는 이례적으로 8월 31일 23시 59분에 찾아와, 내게 그 말을 하고 멀리 사라지려 했다. 그렇지만 한 달 내내 꾸준히 운동한 덕에 나는 잽싸게 네 다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너는 당황했지만 곧 시계탑의 종이 열두 번째 울렸고, 내가 당황했다. 너는 사라졌다. 09.01. 00:00.

 비는 아직도 오고 있었다. 나는 네가 싫어했던 걸 기억하면서도 자정만 되면 비로 얼룩진 창문에 다가가 손을 기댔다. 너를 위해 열어주기 위해 했던 것처럼. 나는 기억할까, 너에게 이 창문을 열어주었던 것을. 혹은 너와 걸었던 그 촉촉했던 밤들을. 너와 나를 청명한 눈으로, 순한 눈망울로 바라보던 8월의 동물들. 밤이슬을 머금은 채 우리에게 나타났던 수많은 꽃들. 너는 기억할까, 나도 기억할까. 혹은 너, 팔 월, 그리고 너는 나. 서로를 잊지 않을까.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린 다만 몇 마디 말만 나누고, 그저 땅 위를 걸은 것 뿐이지만. 8월은 내게 꿈 같았다.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면. 그런다면 몇십 년 후라도 8월에. 나를 찾아와줄 수 있을까, 너는. 네가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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