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Wonderful World

[슬램덩크] What a Wonderful World 1

우성명헌 스파이물... (우기기)............

3RD by 자엉

완결내면 올리려다가 요즘 통 업데이트가 없어가지고…

주의: 제가 좋아하는 이거저거 암약하는 액션요원물?을 혼합하였는데… 안타깝지만 오픈엔딩입니다 (일단은)

 

 

 

 

 

 

약속한 시각은 오전 열한시였다.

짧은 머리카락은 정돈할 게 없었으나 한 번 더 꼼꼼히 다듬고 면도를 깔끔히 했다. 매끈한 턱과 뒷덜미를 오른손으로 쓸어내리고서 스킨, 로션, 코롱의 순으로 다시 문질렀다. 드디어 옷을 입을 차례. 옷장 문을 열어젖히고 가진 것 중에 제일 비싼 셔츠를 꺼냈다. 때깔도 곱지만 맨살에 닿는 촉감이 예술이었다. 고민하다 옷장 구석에 걸어 둔 셔츠 가터를 꺼냈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줄을 조금 늘여 허벅지에 채우니 딱 맞았다. 기왕 격식을 차렸으니 양말 가터까지 꺼내 진회색 양말 위에 채웠다. 먹색의 정장 바지를 꺼내 입고 양말과 같은 색의 벨트를 찬 뒤, 셔츠 소매의 단추를 커프 링크 한 쌍으로 채웠다. 마름모꼴의 흑단추는 특수 처리된 것으로 2초 길게 누르면 착용자의 현재 위치를 전송할 수 있었다.

바지와 함께 맞춘 재킷은 투 버튼 블레이저였다.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블레이저 위쪽의 단추 하나만 채우니 나름 꾸몄는데도 격식을 덜 차린 것 같은 차림새가 되었다.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한 우성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약속 한 시간 전. 만나기로 한 장소는 산책하듯 걸어도 삼십분이 걸리는 테라스 카페였다.

이만하면 만족스러웠다. 우성은 거울 속 자신과 눈을 마주하며 기합을 다졌다.

이제, 그는 살인하러 간다.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그는 열여섯이었다.

우성의 부모는 열다섯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때 함께 죽었더라면 짧고도 근심 없었던 삶에 마침표를 찍었겠으나 그의 목숨은 질겼다. 중학교 졸업식 직후 가족끼리 식사를 하고 귀가하던 길이었었다. 도로로 뛰쳐나온 산짐승을 피해 운전대를 꺾은 자동차는 나무를 들이박았다가 비탈길 아래로 떨어졌다. 차는 둔덕에 걸려 애매하게 멈췄고, 우성은 뒤집힌 채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엄마의 목은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운전석 뒷자리에 있었던 그는 운전대를 잡았던 아빠가 어떤 상태였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둘은 아들의 애타는 부름에 대답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흐릿했다.

본래 우성은 운동특기생으로 수도권의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우성은 장례식에 온 먼 친척의 권유로 전원 기숙사 생활에 장학금을 준다는 산왕기술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이 국제용병, 이를테면 사설스파이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줄 알았더라면 입학을 재고했을 터였다.

뭐, 가족 없는 고아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기술학교 학생 모두가 현장에서 근무하는 용병이 되지는 않았다. 일부는 전문기술을 익혀 졸업하고 평범하게 생활했다. 우성같이 갈 곳 없는 애들이 시키는 대로 특수훈련을 받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학생일지라도 견습 신분으로 현장에 내보내기도 했다. 목격자의 뒤처리를 하거나 사후 보고서를 배달하거나, 몸값 비싼 용병을 쓰기는 그렇지만 일반인에게 맡기기 애매한 그런 임무들이 견습에게 배정되었다.

그래서 사람을 처음 죽인 게 열여섯,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남겼을 때였다. 목격자의 뒤처리였다.

그 일에 한해서는 재수 없이 휘말리긴 했어도 마약과 여자를 유통하던 인생쓰레기였으므로 죄책감이 덜했다. 그래도 가능한 한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고 미간에 총을 쏴서 처리했는데, 커다랗게 뜨인 채 감기지 않은 그 자식의 눈은 이듬해 초봄까지 꿈에 나왔다. 날씨가 풀리니 저절로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2학년이 되어 새로 반배치를 했을 때 파트너가 된 선배가 도와 준 덕분이었다.

삼 년 전에 우성을 대신해 죽었던.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비통하게 만들었던 남자가 오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볕이 잘 드는 자리를 양보하는 거나 달콤한 크림을 얹은 커피를 주문하는 취향은 예전 그대로였다. 한때 우성은 저 두툼한 입술에 흰 크림이 묻은 걸 보고 밤새 뒤척였고, 그를 부드럽게 응시하는 시선에 괜히 뺨을 붉히기도 했다.

“너도 커피?”

“아뇨, 레모네이드로.”

주문을 받아 적은 종업원이 자리를 떠났다. 테이블 위의 서류 봉투를 우성에게 내민 남자가 본론을 꺼냈다.

“이번 일은 짧아.”

“얼마나요?”

“하룻밤.”

봉투 안에는 5밀리리터 가량 두께의 인쇄물이 들어 있었다. 양식만 보면 여느 무역회사의 평범한 내부 보고서 같았다. 물론, 내용은 달랐다.

접근해야 하는 대상은 제약회사의 최고기술책임자(CTO)였다. 접근 대상이 발표자로 참석하는 국제세미나가 사흘 뒤 홍콩에서 열리며, 세미나를 진행한 호텔에서 소소한 저녁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소소하다’는 건 규모가 아니라 참석 인원을 뜻했다. 역사는 밤에 쓰이고 음모는 한밤중의 연회에서 시작되는 게 통설이었다.

접근 대상이 만찬에서 접촉 및 거래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1차 목표였다. 덤덤하게 서류를 훑은 우성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2차는 여기 없네요?”

첫 번째가 있다면 두 번째도 있기 마련이었다. 대화가 잠깐 끊긴 사이에, 마침 종업원이 음료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남자 앞에 묵묵히 커피 잔을 내려놓은 종업원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세미 정장의 신사에게는 서비스 정신을 한껏 발휘해 미소 지었다.

“과자도 같이 드세요. 서비스예요.”

“예,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대꾸한 우성은 종업원이 등을 돌린 후에 포장된 과자를 남자에게 건넸다. 달짝지근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사람은 우성이 아니었으니까. 남자는 포장지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오지에 떨어트려도 굶고 다니지는 않겠어.”

“대답 안 해 줄 거예요?”

남자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공개할 수 있는 목표는 일단 1단계까지. 그 다음은 비공식적인 거고 구두로 전달해야 해.”

“당신이 전달하는 거고요?”

“그리고 넌 얼굴을 알리면 안 돼.”

“작업해야 해요?”

작업은 변장을 의미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너 편할 대로 해. 봉투 안에 넣어놓은 거는 꼭 듣고.”

공식적인 지령 하달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대로 일어나도 상관없었지만, 우성은 일부러 연두색 빨대 끝을 물었다. 작전 혹은 작전 준비 중에 계산이 필요해지면 대부분 책임자가 지갑을 열어야 했다. 기왕 얻어먹게 되었으니 레모네이드를 컵 바닥까지 쪽쪽 빨아먹을 생각이었다.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던 남자가 깜빡했다는 양 말을 이었다.

“이번에 내 이름은 명헌이야. 이명헌.”

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작전 수행을 위해 뒤집어쓰는 페르소나가 몇 개 있었다. 그의 선배, 통칭 ‘관제탑’으로 불렸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한국 출신인 척을 할 때 즐겨 쓰는 가면이 ‘이명헌’이었으니 이번에 그도 ‘정우성’이 되어야 했다.

“그럼, 명헌이 형.”

말을 할까 말까.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던 우성이 고민을 끝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응.”

“원래 죽었던 거 아니었어요?”

명헌이 침착하게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랬었지.”

“이마에, 탕, 하고.”

“CCTV를 봤구나.”

“나중에 찾아봤거든요.”

“어디까지 봤는데?”

“전부.”

용병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작전도 있었다. 작전의 기반이 되는 정보가 잘못되어 함정에 빠진다거나, 동료를 구하기 위해 작전 자체를 포기하거나. 의뢰받은 작전이 어그러지는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우성이 명헌과 함께 나갔던 작전은 함정이었다.

훗날 정보를 역추적해보니, 명헌은 처음부터 함정일 가능성을 어림짐작한 듯 했다. 작전 지역에 잠입하여 목표한 정보를 탈취한 둘은 각각 퇴로를 찾았다. 함께 이동하는 것이 안전할 터였는데 명헌은 고집을 부렸다. 우성은 지하 터널로, 명헌은 지상으로. 당시에는 연인이었다 하더라도 작전 책임자의 명령이었다. 하릴없이 지정된 퇴로로 향하던 우성은 뒤지게 깨질 것을 각오하고서 되돌아갔다. 직후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는 경보가 요란하게 울렸고, 조급하게 뛰어갔을 때는.

“형을 내다버리는 걸 직접 봤으니까, 찾아봤죠.”

작전 지역은 험한 산세를 이용하여 숨겨놓은 군사시설이었다. 생필품은 지하 터널로 보급했고 정면의 입구는 호수로 가로막혀 있었다. 보병 몇 명은 걸어올 수 있어도 탱크 따위의 장갑차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우성은 군복을 입은 병사 둘이 명헌을 호수에 내던지는 것을 봤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호수로 쫓아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죽었을 리 없어. 우성은 현실을 부정했다. 명헌은 졸업반이 되기 전에 정식 용병이 된 특출 난 인재였다. 이번 작전은 난이도로 따지면 B급에 불과했는데. 형은 죽지 않았다. 죽은 척하고 있다가 상황을 봐서 호수를 벗어날 게 틀림없었다. 우성은 숨어있는 자리에서 한참을, 꽤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호수의 수면은 그가 기다리는 사람을 뱉어내지 않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명헌에게 문제가 생겼다면 상부에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우성은 헐떡이는 본능을 누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여 안전 지역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한국에, 그런 전통이 있었잖아요. 삼년상이라고. 부모 돌아가시면 삼년 예를 다하고 지아비가 죽어도 삼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고. 그렇다고 여태 두문불출했다는 건 아니지만요.”

“네 기록은 봤어.”

커피는 벌써 다 마셨을 것 같은데, 명헌이 잔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부상으로 일 년 병동 신세였고. 그 후에는 어중이떠중이 임무만 맡아 지내고.”

“어중이떠중이라니 말이 심하다.”

“통장 잔고가 남아있기는 해?”

“이제 와서 신경 쓰여요?”

“삼년상이라고 했지.”

명헌이 드디어 빌어먹을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그런 거 하라고 했어?”

우성이 서류를 갈무리했다. 지난 삼년 간, 그는 엘리트 훈련을 받은 사설용병치고 한량처럼 지내긴 했다. 허나 그건 상대도 다르지 않았다. 사설용병이 죽음을 위장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우성은 명헌도 그런 줄 알았다. 미처 말하지 못했을 거라고.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그렇지만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우성이 별 볼일 없는 임무에서 일부러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졌어도 나타날 생각을 안 했다. 마치 세상에서 그대로 없어진 것처럼. 그날 애인 말 좀 들으라며 윽박지른 게 유언이었다는 것처럼.

우성은 이틀 전 갑작스레 연락받기 전까지, 남자가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었다.

때문에, 그는 지금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명헌을 걷어차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 있었으나 청소년기에 혹독하게 배운 심상 훈련으로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여기서 정줄을 놓으면 ‘내 손으로 확실하게 죽이면 두 발 뻗고 잘 수는 있겠지’ 다짐했던 걸 현실로 만들게 된다. 그러면 그에게 호감을 표한 종업원이 기겁해서 경찰을 부를 테고 상부는 우성을 정신병동에 처넣을 거였다.

“나는 그렇다 치고 당신도 오늘 할 말이 있었을 텐데요. 이렇게까지 판을 깔았는데 어떻게 사과 한 마디를 안 해요? 아니면 사과할 일도 아니라는 건가?”

우성은 음료를 원 샷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채널은 그대로니까 사과하고 싶으면 연락해요.”

명헌은 우성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죄책감어린 표정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가소로워한다거나 하다못해 측은해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레모네이드를 저 반질반질한 면상에 끼얹을 걸. 치정 싸움이라 변명하면 되었는데. 속으로 씩씩거린 우성이 등을 돌렸다.

 

 


 

명헌이 작전 책임자가 되면 브리핑을 끝내는 즉시 현장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이력을 감안하여 차려입은 것이 무색하게 숙소로 털레털레 돌아온 우성은 제일 먼저 수면제를 변기에 죄 쏟아 버렸다.

‘참, 환경 보호해야하는데.’

살짝 죄책감이 인 우성은 환경 파괴하는 쓰레기 몇 놈을 조만간 지옥 급행에 태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옷이라는 것은 입을 때는 신중하지만 벗을 때는 허물이 되어버린다. 우성은 대충 벗어 허물을 의자에 걸쳐 두고 봉투의 내용물을 챙겼다. 납작하게 생긴 구형 MP3 플레이어였다. 비공식적인 지령을 녹음하여 넣어둔 것일 터다. 우성은 짐에서 이어폰을 찾아, 속옷 차림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플레이어를 재생했다.

“작전명 슈베르트. 이번 작전은 협동과 비밀 유지가 중요하다. 참여자는 총 셋으로 다른 한 명은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나는 작전의 책임자이고 너는 청소를 맡는다. 청소 대상은 진행에 따라 달라질 거야. 일차적으로 작전 대상이 접촉하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지면, 현장의 판단에 따라 작전 대상의 제거 여부를 결정한다. 상부에서는 작전 대상이 우리와의 협약을 누설했다고 확신하고 있어. 다만 이용가치가 크기 때문에 즉결처분할지 심문 후 처분할지를 고민하는 중이지. 즉결처분하게 되면 너는 현장을 청소해야 한다. 심문 후 처분이 결정되면 대상을 지정된 장소로 전달해야 해. 이후 심문은 전문가가 맡게 되어 있다. 만에 하나 작전 대상이 제3의 세력을 끌어들이거나 적대적으로 나온다면 너는 현장의 우리를 지원하고 마지막에는 확보한 퇴로를 알려줘야 한다. 서류 13페이지의 주소를 찾아. 그곳에 필요한 물품들이 있다. 작전 중 채널은 서류 15페이지에 있어.”

명헌의 목소리가 끊겼다. 파일 재생이 끝났나 싶었지만, 기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우성아.”

얼마 후, 명헌이 익숙한 어투로 그를 불렀다.

“가능하다면 너랑 다시 일하고 싶지 않았어.”

녹음 파일의 재생이 끝났다.

 

 


 

산왕기술학교는 6년제로 여느 중고등학교와는 교과 과정이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사설 학원과 비슷했는데, 절반은 우성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나머지 절반은 친인척 어르신의 사업이 얽혀 있어 진학을 결정했다. 기술학교에서 사설용병으로 자리 잡게 되면 얼마 전까지 교무실이라 불렀던 곳을 ‘상부’라 부르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산왕기술학교를 졸업한 사설용병들은 거대한 혈연과 인맥으로 구성된 조직에서 구르고 있는 셈이었다.

연줄 하나 없던 우성이 사설용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특수훈련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교관이나 선배들은 우성의 단점을 종종 지적했는데,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들을 솎아내자면 결론은 하나였다. 너무 잘생겨서 눈에 띈다는 거였다.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 큰 것도 한 몫 보탰고 말이다.

사설용병이라 아우르기는 하나 의뢰인이 종종 쓰는 용어는 스파이였다. 너희 스파이 좀 빌려줘. 그때 그 스파이는 뭐 하고 지내? 자고로 스파이란 눈에 띄지 않고, 설령 눈에 띄더라도 사람들에게 쉽게 잊혀야 했다. 그런데 우성은 그게 어려웠다. 변장과 연기에 피나는 노력을 쏟아 부은 덕분에 인파에 녹아들 수는 있었으나 또래 중에는 타고난 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용병이 여럿 있었다. 처음 변장 기술을 배우라 했던 명헌도 그래서 조언의 방향을 바꿨다. 앞서나가지 마. 판을 읽고 지원하는 능력을 키워. 우성의 지원 능력은 명헌과 단둘이 작전을 수행하던 시절에 부쩍 발전했다. 사랑의 힘이었던 것 같기는 했다. 맘에 안 들면 버리고 간다는 식이었던 명헌을 쫓아가려 필사적이었으니까.

명헌이 알려준 13페이지에는 가상의 무역회사가 구입한 자재 목록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우성은 기술학교에서 사용하는 방식대로 단어를 추려내 임시 숙소의 주소를 알아냈다. 국제세미나가 열리는 곳은 홍콩에서 가장 번쩍거리는 센트럴 플라자였다. 지원 용병에게 주어지는 숙소가 작전 지역에서 먼 곳일 리 없으니 인근에 있을 게 분명했다.

이틀 뒤 우성이 도착한 곳은 예상대로 센트럴 플라자에서 멀지 않은 주거형 호텔이었다. 엄청나게 가깝지 않고 그렇다고 멀지도 않다. 공항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수로로 가는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퇴로를 확보해야 한다면 바다로 빠지거나, 상대에 따라서는 북쪽의 신계 지역까지 움직여 자취를 감추는 게 나을 듯 했다. 지형 파악을 끝마친 우성이 빠른 속도로 비치되어 있던 짐을 풀었다. 더플백에는 종업원이 입을 법한 단정한 의복과 가발, 구형 무전기와 초소형 무전기, 위성을 연결할 수 있는 군용 노트북이 있었다. 짐의 가장 밑바닥에는 불법으로 들여온 게 뻔한 무기가 두 정 있었는데, 하나가 좀 의아했다.

분해된 상태였지만, 우성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맥밀란 대물 저격소총이었다. 일반 라이플이라면 몰라도 암살이 가능한 무기를 비치해두었다는 건 간접적으로 지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전 대상은 홍콩을 떠나기 전에 죽어야 했다.

‘아니면 다른 지령일 수 있지…….’

더플백의 앞주머니에서 선불용 핸드폰을 발견한 우성이 오른 검지로 톡톡 이마를 두드렸다. 우성이 명헌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건 상황에 맞춰 작전 사항을 변경하던 애인(전)의 못된 버릇 때문이기도 했다. 상부와 현장의 의견이 충돌할 때에는 대체로 명헌 쪽이 옳기는 했으나, 상부는 그게 더 언짢았던 모양이었다. 한 번은 작전 책임자도 아닌 우성에게 별도의 지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명헌이―당시에는 후카츠였던 그 남자가 이중 스파이인 것 같으니 물증을 확보하면 즉시 처분하라는.

지원 용병에게 주어지는 선불 핸드폰의 쓰임새는 늘 같았다. 단축키 1번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됐다.

“오랜만입니다, 사와키타 씨.”

이거 봐. 우성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이름으로 은밀하게 접촉해오는 상대는 늘 선택을 강요하며 그를 못살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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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창의적인 족제비

    진짜 너무너무 재밌어요...

  • 유랑하는 플라밍고

    1이 붙고 ’일단은‘라는게 붙어서 얼마나 희망을 갖게되는지 몰라요... 이 다음을... 제가 얼마나 요원물을 사랑하는지 엉님은 이제 알게되실거에요. 이걸 위해 펜슬에 다시 로그인을하고 덧글을 남기는건... ㅠㅠ 명헌이 심정도 궁금하고 우리 우덩이가 겨우겨우 참고 잇지만 속에서는 이명헌을 갈망하고 여전히 못 놓고 잇는거 너무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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