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놀

철의 맛.

백호열/모브호열

생각날 때 마다 적습니다.


한달에 한 번 사쿠라기 군단은 모여서 술자리를 만들었다. 처음 몇 번은 모르겠으나 회차가 두 자릿수가 될 무렵부터 술에 찌든 사람을 집에 던져다 놓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날은 요헤이가 좀 취한 수준이었고, 하나미치는 어쩐지 요헤이를 데려다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요헤이는 웃었다. 날이 추우니까 돌아가는 길에 얼지 않으려면 따뜻하게 데운 술을 마셔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요헤이는, 조금 풀려서 몇가닥 내려온 앞머리가 무색하게 멀쩡해보였다. 그대로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하나미치는 요헤이의 파르스름한 옆얼굴을 보다가 마저 맥주를 마셨다. 백토에 가네트를 섞어서 만든 술잔은 무언가 잘못 쏟아버린 음료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요헤이는 엄지와 중지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잔의 귀퉁이를 쥐고 입술 끝을 살짝 내민 채 술을 들이켰다. 어지간히 뜨거운지 홀랑홀랑 넘기지 못했다. 그럴거면 찬 술을 마시지 그랬어. 하나미치의 말에 요헤이는 뜨거워진 손가락 끝을 엄지에 문질러 열을 덜어내면서 웃었다. 가다보면 추워진다니까… 생맥주를 담아놓은 기린 마크의 맥주잔도 요헤이가 생각하는 것 보단 덜 차가울텐데. 그래도 요헤이는 뜨거운 술이 식기 전에 다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다른 곳에 더 가자는 츄이치로를 유지가 지하철 역 쪽으로 잡아끌었다. 노조미는 편의점엘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붕 뜬 감각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하나미치는, 간다, 소리를 하고 저만치 걸어가는 요헤이의 등을 보았다. 데려다 줘야 할 것 같았는데. 요헤이는 너무 멀다. 돌아가서 연락해, 라던가. 역시 데려다줄게, 따위의 말은 군단이라는 묶음 안에서 돌기에는 적지 않게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하나미치는 뭐가 올라오기라도 한 것 처럼 저 골목으로 꺾어진 요헤이의 등을 보면서 목을 긁어댔다.

요헤이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

첫 사흘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걸으면 얼굴 닿는 곳에 있던 학생과 사회인의 차이라고 하면 시간을 내서 만나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안부연락은 넘어가게 되는 점이다. 유지의 시시콜콜한 라인을 읽던 하나미치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다시 달렸다. 하나미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나흘부터 하나미치는 이상함을 느꼈다. 술병이 났다 하더라도 사흘 뒤엔 연락이 있었는데 없다. 요헤이라는 녀석은 취해도 숙취는 없는 녀석이었고(어떠느냐 묻느냐면 성인이 되자마자 입에 꽂아놓은 술병만 몇개인데 다음날 혼자만 멀쩡하게 일어나서 보리차를 끓여마셨다.) 잘 들어갔어? 말을 보내기엔 그 날 이후로 시간이 너무 지나서 하나미치는 라인의 기본 배경만 노려보다가 꺼버리기를 수차례는 반복했다. 닷새. 노조미에게서 요헤이에게 연락 온 것이 있냐는 물음이 왔다. 하나미치는 스포츠드링크를 물에 희석시키면서 라인을 열었다. 술을 마시려 모이던 날 오분여 쯤 늦을 것 같다는 요헤이의 담백한 말풍선이 마지막이었다. 하나미치는 다시 목을 긁었다. 창을 넘겨 노조미가 있는 채팅창에 들어갔다. 접속중을 표시하는 초록색 원이 깜빡였다. 하나미치가 적었다. 아니. 전송. 열흘. 유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헤이에게 빌린 디브이디를 돌려주러 집에 갔다가 우유함이 터질 정도로 쌓인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고 유지가 말했다. 평소에도 라인을 잘 쓰지 않는 유지는 묘하게 찜찜한 목소리를 냈다. 가끔 어디로 휙 오가는 놈이긴 하지. 그런데. 하나미치는 별 말을 붙이지 않고 어디 여행이라도 갔나보지. 말했다. 누가 목을 졸랐다가 막 풀어준 것 처럼 형편없이 갈라진 소리가 나와서 하나미치는 급하게 헛기침을 해 목을 다듬었다. 보름. 츄이치로가 무슨 일로 먼저 연락을 한다 싶더니 대뜸 요헤이 집에 가 보았냐는 말을 했다. 하나미치는 걔 집에는 뭐하러 가, 했지만 벽돌을 쌓기 전 시멘트를 얹는 과정에 오른 것 같다는 감상이 떠올랐다. 과연. 찝지름한 유지의 목소리가 꼬리를 끌면서 오던 시간은 낮이었다. 그믐.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하나미치는 새벽같이 뛰어나갔다. 러닝을 하기 위해 신발끈을 묶다가 한 행동 치고는 어울리는 것이 없었지만 애초에 하나미치에게 어울리는 행동이라는 것을 따지는건 태반이 바보짓이었던지라 이것도 문제되는 일은 아니었다.

하나미치는 곧장 골목을 가로질러 달렸다. 이미터가 넘는 단련된 육체는 근육을 쥐어짤 수록 지면과 발바닥의 접촉이 줄어들었다. 종국에 하나미치는 앞으로 달린다는 표현보단 앞으로 튕겨지고 있었다. 짧게 친 머리가 바람에 길을 터주었다.

시장으로 빠지기 직전 골목에 놓은 작은 파출소에 뛰어들어간 하나미치는 당직을 서고 있던 순경의 어깨를 잡아 흔들어 깨웠다. 뭐야, 뭐죠, 반쯤 졸던 정신을 빼내려는 거침에 순경의 모자가 정수리에서 굴러 바닥에 떨어졌다. 하나미치가, 숫제 울면서 말한다, 요헤가 연락을 안 받아요. 덩치가 크다는 수준을 넘어 일반인 기준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키의 사람이 공무원을 뒤흔들며 운다는건 복합적으로 보았을 때 위협적인 상황이었지만 순경은 노련한 공직자였다. 그는 하나미치의 팔뚝을 잡고 진정을 시킨 뒤 자리에 앉히고 실종신고를 도왔다.

미토 요헤이, 스물 여덟, 검은 머리에 내려간 눈매, 짧게 다듬은 눈썹, 포마드 헤어, 실종 당시 착의, 회색 블루종, 흰색 반팔, 연한 색의 청바지, 카멜색 코트, 검은색 나이키 운동화.

몇번을 헛돌던 펜으로 운동화スニーカー를 적던 하나미치가 마지막 장음을 긋지 못하고 펑펑 울자 순경은 하나미치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손에서 진술서를 뺏어들고 나이키인거죠? 말하고 대신 적었다. 볼펜에 뭉친 잉크가 눈물에 녹아 종이에 얼룩을 만들었다.

겨울의 태양은 게을러서 하나미치가 울음을 멈추고 파출소의 문턱을 넘을 때 까지 제대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서늘하고 낮은 새벽공기가 하나미치의 젖은 뺨을 더듬었다. 하나미치의 몸은 아주 느렸다. 내달리던 때와 매우 달랐다. 근육은 늘어지고 척추는 구부러진다. 걸음은 느슨해진다. 그림자는 물 안에 빠진 것 처럼 한참 밝은 가로등 아래에서만 머리를 내밀고 허우적댔다. 하나미치는 자신의 러닝화의 흰색 코만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었다. 순전히 집 근처라서였다.

요헤이가 거기에 있다.

언젠가 하나미치가 생일선물이랍시고 사다 준 검은색 운동화를 신은 요헤이가 서 있다. 물빠진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멘션의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간 어지간히 걸어다녔던 것인지 쿠션이 두툼한 나이키 운동화의 희게 빠진 아웃솔이 조금 닳아 있었다. 머리는 내린 채였다. 하나미치는 잠시 거리를 두고 요헤이를 보았다. 헤어스타일 외엔 골목으로 걸어가던 모습과 바뀐 것이 없어서였다. 요헤, 부르려다가 만다. 닿는 것이 더 빠를 수 없을텐데도 하나미치는 보폭을 넓혀서 요헤이의 옆에 빠듯하게 붙어섰다. 살갗에 끼치는 체온에 요헤이가 고개를 돌렸다. 아, 하나미치. 요헤이의 흰자 가장자리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너. 하나미치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말이 한번에 머리에 떠올랐는데 입과 혀는 하나씩이라서 말을 순서대로 배열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지 여백의 미학 그런건 아니다. 그걸 아는 요헤이는 하나미치의 말이 다발로 던져지기 전에 자리를 뺏었다. 열쇠를 잃어버렸어. 철물점 열 때까지만 여기 있을게. 그러고 나서 요헤이는 하나미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하나미치의 멘션 공동현관쪽으로 걸었다. 하나미치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요헤이의 등만 보았다.

하나미치는 요헤이를 위해 현관을 열고 집 안을 보였다. 일인분의 생활감이 진하게 남은 집 안에는 뛰어나가기 위한 어떤 전조도 없어서 하나미치는 이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요헤이가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이나 자신이 요헤이의 집에 가는 것이나 하나같이 당연스러운 것인데. 요헤이는 익숙하게 하나미치의 집 안으로 들어와 블루종을 벗어 옆구리가 터진 좌식소파에 던져놓았다. 씻지도 않고 구겨진 이부자리에 기어들어가 눈을 감았다. 거실과 방 사이의 어중간한 문턱에 서서 하나미치는 요헤이의 어깨가 느리게 오르내리는 것을 보다가 베란다 통창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에 고개를 들었다. 요헤이가 있다. 하나미치는 몸을 돌려 현관으로 나갔다. 러닝화 안에 발을 밀어넣고 신발끈을 묶었다. 실종신고를 철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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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려깊은 카멜레온

    모브호열… 이 소리가 날 되살아나게 한다… 몇번이라도… 110번이라도……… 선생님 특유의 문체와 상세한 묘사…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어떠한 일에 휘말린 호열이와 그런 호열이를 지켜볼 백호의 이야기가 너무너무 궁금하고 기대되어요…… 아 행복해 매일매일 이 글만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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